조카들이 방으로 몰려와선 한차례 웃고 장난치다 나간다. 거실에 있는 막내는 아이들 보고 걸어다니라며 윽박지르며 쫓기놀이를 한다. 쫓아내면서 걸어다니라고 말하는건 능청스런 막내다운 수법이다. 다시금 썰물처럼 밀려든 요녀석들의 소요. 화장실을 간다, 밥을 먹어야겠다며 정신없이 굴어댄다.
 

-이모, 근데 밥은 시계가 저기 가리키면 먹는거지?
-응, 옥찌. 조금만 있어봐. 벌써 배고파?

  조그만 올챙이 같던 녀석이 벌써 다섯 살이다. 이건 어디서 배웠을까. 내 손가락을 끌어다가 고사리 같은 새끼 손가락에 끼운다. 졸지에 밥순이 신세다.
 틀어놓은 음악소리만큼이나 감미롭게 번지는 웃음, 행복하다.
 그래서 더욱 맘이 불편해진다.

 뉴스는 목도리녀처럼 예쁜 사연만을 전해주진 않는다. 그래서 뉴스를 잘 보지 않는다.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사건에 무감각하게 반응하는게 싫고, 감각의 역치를 사정없이 높여버리는 일들이 두려운 까닭이다.
 그래서 시사프로도 아닌 미담 위주의 저녁 프로에서 아이의 죽은 얘기가 나올때 모른척 했어야 했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아이, 4개월도 안 된 아인 24시간 위탁기관에 맡겨졌단다. 한달에 한번 아빠만 들여다볼 뿐인 아인 보호시설에 있기엔 너무 어렸다. 아이 엄마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아이란 존재가 갑작스러웠고 태어난 시점을 기준으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주기엔 받은 사랑이 너무 없었을 뿐이었다. 부모에게만 사랑받는건 아니겠지만, 고아인 여자에겐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아이를 놀이방에서 데려와 기르던 엄만 밤늦도록 칭얼대는 아일 견디지 못했다. 사람은 견딜 수 없는 순간에 외면하거나 도망친다. 견딜 수 없었던 그 순간에 엄마는 차라리 도망을 쳤어야 했다. 모성애란게 생기기 전까진. 아니 그런 거창한게 아니더라도 내 몸에서 나온 살가운 존재에 대한 일말의 애착이라도 갖기 전엔.

 하지만 엄만 아이 울음소리에 신경이 너무 날카로워졌고, 그만 아이를 때리고 말았다. 이제 그만. 엄만 더 자지러지게 우는 아일 얼래서 맘에 품어야했다. 그래, 하지만 그 날 엄만 신경이 날가로웠던걸까. 다른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벽에 아이 머릴 쿵.
 아인 혼수상태로 전기 장판에 아침까지 방치되었다.

 아침 댓바람에 병원 응급실에 아일 데리고 온 엄만 아침에 아이가 죽어있었단 얘길 한다. 의사가 화상과 피멍든 자국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여자의 말은 유아돌연사란 흔한 일로 묻혀졌을지도 모른다. 의사는 엑스레이를 찍어보고 두개골에 금이 간걸 의심해서 경찰을 부른다. 경찰 앞에서 여잔 사실을 다 말한다. 아마  아침이 되기까지 두려움과 고통으로 떨었을 아이 얘긴 아마 한마디도 하지 않았겠지.

 나혜석은 모된 감상기에서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고 했다. 조카를 보기 전에 난 그 말이 섬뜩해 나혜석이 남다른 사람이라 그렇게 생각하나보군 정도로 치부했다. 동생이 아이를 키우는걸 옆에서 보고, 간혹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나혜석이 별난 여자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양육하는건 생겨날지 여부를 알 수도 없는 모성애만으로 가능하지 않다는걸 알게 되었으니까.  

 엄마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생각을 한다고 한다. 엄마의 도움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일 키우는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건 연애처럼 서로 으쌰으쌰해서 맞춰가는 것도 아니고 애완견을 기르듯 물건을 사들이듯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맹목적인 외로움을 벗어나려고 사력을 다하는 것도 아니다. 양육은 어찌보면 숭고하지만 대체적으로 반복적인 노동과 지난한 피로감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일이다. 보상없는 일에서 느끼는 허탈감은 아이의 깨알같이 쏟아지는 웃음과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 보드라운 손, 나를 닮은 존재의 생명이란 인식으로 갈음된다.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고, 육체적으로 솔깃하지 않지만 단지 아이란 이유로 이러한 일들은 가능해진다.

 그리하여 옆에서 가끔 기저귀나 갈아주고 예뻐해주기만 하면 되는 주변 사람은 아이 키우기의 어려움을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난 그 여자를 ‘처죽일 년’이라고 섣불리 말하진 못하겠다. 아직까진 여자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방송의 선정적인 보도에 눈살이 찌푸려지면서도 제일 먼저 떠오른건 의식을 잃은 채 아팠을 아이였다. 그리고 너무 미안하게도 조카들은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을 해버린 미안함이었다. 죄 많은 인간 어른이라 아이에게 미안했다.

 예쁘게 커서 재롱도 피우고, 놀이방에서 배운 노래도 부르고, 새끼 손가락 걸고 꼭꼭 약속하는 야무진 면도 보이고, 더 쑥쑥 자라선 사랑도 하고 실연도 당하고 살다가 좌절도 느끼고, 행복도 느끼면서 그렇게 그렇게 살아있음 좋았을텐데......

 어린 죽음은 그들이 밟지않은 길을 자꾸 상상하게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8-06-24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6-24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