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회장의 그림창고
이은 지음 / 고즈넉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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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회장의 그림창고’는 풍자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워낙 어렵기도 하고, 드물게 쓰이는 장르라 관심을 갖고 보게 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모두 허구입니다’라는 관습을 깨고 ‘이 소설엔 의외로 사실인 게 더 많다’고 호언하며 시작하는 서문이 몹시 흥미로웠다. 작가는 미대 출신인 경력을 십분 이용해 미술계의 한 ‘현상’을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미술계와 정치계의 만남이 어떠한 시너지 효과를 이루어내는가? ‘수표 바꿔치기, 대포통장, 차명계좌, 양도성 예금증서, 박스떼기, 불법 해외 부동산 매입, 유령회사 설립’ 등으로도 꼬리가 밟히던 자금 세탁의 새로운 창고, 바로 고가의 미술품 구입이다. 거기다 10대 기업의 총매출이 국내총생산의 80%를 차지하는 기형적인 경제 구조에서 재벌의 비자금 세탁은 흥미로운 소재다. 거기다 미술품 구입으로 재벌 부인들은 ‘계급적 차원으로 품격을 부상’한다. 미술품은 ‘속물 이미지를 고상하게 바꿔주는 정신적 명품’이며 ‘최종적인 코팅의 산물’인 것이다. 

10대 기업 중 하나의 총수인 박 회장은 다음 대권에 유력한 후보인 한민족당 총수인 서민왕에게 ‘불타는 꽃밭’이란 그림을 뇌물로 주기로 한다. 그림은 은밀한 뇌물로도 적절한 상품인 셈이다. 박 회장의 후처나 다름없는 미술관장 이사벨은 그 그림과 편지를 총수에게 가져가는 길에 차치기를 당한다. 남자친구와 남동생이 공모한 도둑질로 인해 여주인공 소미는 위기에 처한다. 인생에게 늘 약자였던 소미는 차라리 박 회장을 협박하기로 마음먹는다. 한편 ‘불타는 꽃밭’이 이동하는 중에 그림을 훔치려던 ‘피카소파’ 역시 난관에 부딪힌다. 이야기는 소미와 박 회장, 박 회장이 고용한 건달들과 피카소파 간의 좌충우돌하는 에피소드로 속도감 있게 재현된다. 경매장 에피소드나 마지막 장면의 활극 등도 작가의 서사적 능력을 보여준다.

한편 이자벨의 예술관도 눈여겨 볼 만하다. 이자벨에게 예술은 자신의 인격을 높이는 도구이며, 자산을 불리는 수단이다. 그녀는 철저히 예술을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예술은 현실이다. 예술만큼 현실적인 것이 없다. 돈과 권력과 항상 가깝다. 후원자, 예술의 기호는 후원자들이 쥐락펴락했다. 예술가의 재능은 후원가의 환심을 사는 천재적인 정치성과도 닿아 있다. 예술은 순수했던 적이 없다. 

그렇다면 살아서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는 현실적이지 못한 셈이 되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예술에 대한 더한 고찰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박 회장 부인의 입장을 참고할 만하다.

하지만 이 소설을 지인에게 선뜻 추천하지는 못하겠다. 소위 문장 페티시즘(?)에 경도된 소설이 서사나 이야기 자체의 재미를 주지 못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문장을 읽는 맛은 소설을 읽는 기쁨 중 하나다. 문장은 이야기 속에 녹아 이야기와 일체가 되어야 할뿐 아니라 동시에 아름다워야 한다. 적절한 단어 사용과 독창적인 은유, 인물의 성격을 보여주거나 사건을 전개하는 필수적인 대화나 행동, 사건을 바라보는 전체적인 관점 등이 소설의 부분이자 전체다. 이 소설은 마치 영화 제작을 염두에 둔 것처럼 서사 위주로 경쾌하게 진행되었지만, 문장이 맘에 들지 않는다. 비어의 남발이나 거칠고 세태적인 표현이 곧 풍자가 되는 건 아니다. 고급한 풍자는 오히려 숨기고 가리면서 세상을 비웃지 않던가. 직설적인 화법으로 쏘아붙이는 건, 시사 고발프로그램이 아닌 창작품에서는 미덕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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