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의 이상과 현실
김민제 지음 / 역민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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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프랑스 혁명사는 결코 완성된 적이 없었으며 또한 영원히 완벽하게 서술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사는 그 자신이 가능케 만든 역사가 전개됨에 따라
세세손손 인간에 대한 성찰과 정열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킬 것이다." - 소불

1. 서론 : 내가 발견한 혁명론

프랑스 혁명(The French Rovolution)! 이른바 대혁명이라 일컬어지는 프랑스 혁명은 2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이름이 갖는 위용이 녹슬지 않았다. 혁명이란 단어가 주는 감동은 이미 낡은 것이 되어버렸을지언정, 혁명이 지닌 미래 지향적이며 이상적인 성격은 21세기인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상이야말로 인류를 현재의 실존으로 이끈 주요한 작동 원인 중의 하나이며, 이는 미래에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엔 혁명이 새로운 생필품의 등장에도 붙여질 수 있는 흔하디 흔한 단어가 되어버렸다. 이는 혁명이 그만큼 보편적인 개념이 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위상이 가벼워졌다는 의미도 된다. 어쩌면 이제 혁명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이 아닌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맥락에서 인식하는 개념이 되었을지 모른다. 각자의 일상 속에서 혁명을 이루어내는 것이 정치적 사명을 갖는 것보다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근대적 평등을 이룬 역사적 업적의 결과일 수 있지만, 보수화된 개인들이 사회적 영역에 무관심해져버린 현상일 수도 있다.

낭만주의적 시각에서나 실존주의적 시각에서나 프랑스 혁명은 여전히 매력적인 탐구 대상이다. 교육의 영향이겠지만 프랑스 혁명은 무의식적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극적인 도약이며 기점이 된 사건으로 느껴진다. 누구에게나 프랑스 혁명의 이미지가 다르겠지만 나에게  프랑스 혁명은 '베르사유의 장미'라는 일본 만화를 통해 최초로 강렬하게 인식되었다. 역사를 흥미로운 옛날 이야기 정도로 여기던 유년 시절, 프랑스 혁명은 마치 비극적이며 황홀한 꿈처럼 느껴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만화는 18세기 프랑스의 상황을 정통적인 시각에서 그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비록 초점이 사랑의 비화에 맞추어 있긴 했지만 귀족들의 생활과 고통 받는 민중, 혁명의 과정에서 일어나던 인간적 비극, 혁명의 쓰라림과 폐해 등에 대해 나름대로의 사회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었다. 흥미로운 이야기성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지만 '베르사유의 장미'는 내게 혁명에 대해 최초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더불어 역사 속에서 인간성은 어떻게 진화해왔는가, 인간은 어떤 개인적 · 사회적 삶을 창조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기도 했다.

다시, 프랑스 혁명으로 돌아오자. 고백하자면, 『프랑스 혁명의 이상과 현실』은 내가 이제까지 접해보지 못한 형식의 책이었다. '이상과 현실'이라는 흔한 대조가 이 책에서는 끈질기게 대립하는 팽팽한 극단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이상'에 완전히 빠지지 않고 '현실'을 완전히 긍정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였던가. 여러 역사가들의 프랑스 혁명사관을 시간순에 의하지 않고 주제별로 나열하였기에 혼란은 더더욱 컸다. 그러나 책을 다 읽은 후의 나의 결론은 역사가들의 택하는 관점과 비슷했다. 즉 나는 이 책에서 내가 믿고 싶어하는 혁명론을 발견하였다. 그렇기에 나의 주관적 혁명관 역시 이 책에 의해서 뒷받침될 수 있는 것이다.

본론의 방향은 이러하다. 수정주의 학자들이 정통주의 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며 논지를 펼친 것처럼, 나는 역으로 수정주의 학자들의 논지를 공격하려 한다. 물론 그 논지는 이 텍스트의 내용을 기반으로 한다.

2. 본론 : 수정주의 해석에 대한 정리와 반박

수정주의적 해석은 소위 '엘리트 혁명' 이론과 '일탈'의 이론으로 집약할 수 있다. 전자는 진보적이며 자유주의적인 그리고 새로운 사상의 개방적인 귀족층과 부르조아지 상류층 사이에는 '엘리트'라는 범주 속에 일종의 합의가 존재하였다는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상황에서 대혁명은 회피될 수 있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개혁적인 타협과 입헌군주정의 단계에서 안정되어질 수 있었지 않았을까하는 주장이다. 후자는 '다행인 해'인 1790년을 거쳐 1791년부터 1794년까지 이루어진 이른바 프랑스 혁명의 '일탈'이란 토지와 식량문제에 관한 전통적이며 복고주의적인 요구를 주요 동기로 삼아 동원되었던 도시대중과 농민대중이 전혀 예기치 못한 불법난입을 가져옴으로써 대혁명을 원래의 궤도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었다는 이론이다.

수정주의적 해석의 큰 두 가지 이론은 위에서 인용한 바와 같다. 수정주의적 해석은 프랑스 혁명의 부정성과 무용성, 우연성을 주장한다. 전자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계급투쟁론이나 부르주아 혁명론을 부정하고, 후자는 혁명의 근본인 개혁성이 부족하고 복고주의적 경향이 보였기에 실패한 혁명임을 주장한다.

수정주의 학자들은 미시적인 역사 연구를 통한 실증적이고 사실적인 시각으로 프랑스 혁명을 바라본다. 역사적 사실들의 간격을 상상력과 그럴 듯한 명분으로 메꾸지 않고 각각의 그림을 세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프랑스 혁명에 관련된 주요 쟁점을 정리하며 수정주의 학자들의 의견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계몽사상을 위시한 여러 '위대한 이념' 들은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는 데에 영향을 끼쳤는가

수정주의 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이 '위대한 이념'에 의해 발발했다는 명제를 한때 유행하던 낡은 논리 정도로 여겼다. 계몽 사상은 혁명적인 사상이 아니며 단지 '개혁적인' 사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보편적인 생각이고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루소의 계몽 사상은 애매모호한 데다 중구난방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대중들은 루소의 책을 즐겨읽지도 않았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사상의 조류를 오직 유행하는 책으로 가늠할 수 있다면, 사상사 연구는 훨씬 쉬워질 것이다. 그러나 이념은 통계치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퓌레에 따르면 "혁명가들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 이념을 무의식적으로 수행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혁명을 진행시킨 건 의식이었지 결코 무의식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혁명가들에게는 이상주의적일지라도 명확한 목표가 설정되어 있었으며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수정주의 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복고적이라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고전에 나오는 영웅들의 사고와 행동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전혀 새롭지 않은 정치 개념은 그리스와 로마 시절을 답습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과거의 것이라고 무조건 복고가 아니며, 현재적 의미에 걸맞는다면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이념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수정주의 학자들은 쟈코뱅의 이념이 "지역마다 그리고 해마다" 달라졌으며, 또한 쟈코뱅이 보다 급진적이기 위해 수시로 정책을 바꾸었음을 지적한다. 쟈코뱅의 결점은 사회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 성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몽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계몽 사상의 혁명적 성격을 무시하면서 동시에 계몽 사상을 이해하지 못한 결점을 지적하는 것은 모순이다.

또 수정주의 학자들은 정통주의 학자들이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이념을 패턴화하고 구조화했다는 사실에 대한 개별적인 반론으로 이를 부정한다. 혁명을 주도하는 세력들이 혁명의 과정에서 따르게 되는 강령이야 존재하겠지만, 어떤 혁명의 이념도 결코 단선적으로 패턴화시킬 수는 없다. 또한 로베스삐에르가 일관성 없이 행동했다는 사실 역시 똑같은 형태로 이해해야 한다. 현실에 따라 이념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그는 혁명가가 아니다. 그는 혁명을 물리적으로 이루어냈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의미의 혁명가는 아닐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혁명가에게 혁명은 늘 회의의 대상이며, 완전을 향해 끊임없이 지향되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구체제의 모순은 존재하였는가

수정주의 학자들은 혁명가들이 구제도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혁명가들은 구제도를 파괴하기 위하여 구제도를 창조했지만, 결과적으로 구제도란 개념이 오히려 혁명을 창조했고, 혁명을 구성해주었으며, 또한 혁명에 한계를 가져다주었다."

왕이 귀족들에게 특권을 포기하게 하는 일을 상상할 수 없는 시대는 전근대적인 시대다. 그렇다면 근대적 태도와 이념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가? 근대성이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의 이념적 발명품이라면, 그 발명품은 무(無)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그런 태도가 전혀 존재할 수 없는 바탕에서 서서히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평민들도 특권을 누렸다는 점을 지적한다면, 시대에 편승하는 기회주의적 인물은 역사 어디에서나 빠짐없이 볼 수 있고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반박할 수 있다. 만약 우리 사회에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혁명 따윈 안중에 없으며 단지 개인적 영달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존재가 없어져야 하는가? 혹은 그들이 많기 때문에 혁명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인가? 어느 계층에나 중도적 인물이나 극단적 인물, 무의지적 인물이 있기 마련이 아닌가.

평민들이 가난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수치로 환산한다면 그것 역시 환원론적 결론이 되기 쉬울 것이다. 세심한 부분들간의 차이 빠리와 지방의 차이, 평민들의 개인적 재산 차이 등 에 집착한다면, 전체적인 경제사를 바라보기 어렵다. 폐부로 느끼는 부와 생존간의 간격이 지금과는 크게 달랐을 것임은 자명하다. 분명히 존재했던 농업의 위기상황을 기술적인 진전이 있었다거나 '굶지 않고 살았다'라는 식으로 표현하며 역전시키기는 어렵다.

또한 수정주의 학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이상사회 건설을 위한 폭력적 혁명 따위를 바라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평민들이 올린 진정서에는 "이상 사회에 대한 바램"만이 적혀 있으며 "이들은 대립보다는 화합을 원했고, 왕을 신뢰했으며, 또한 왕이 그들이 생각했던 문제를 푸는데 중재자의 역할을 해주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절박한 문제를 푸는 중재자의 역할을 왕이 해줄 수 있었던가? 이상사회는 말 그대로 이상사회에 불과했다. 그들이 가만히 있었다면, 역사는 결코 그들이 원하는 이상사회를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평민 일반이 봉건 제도에 적대적이었다고 규정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그 반대편도 마찬가지다. 봉건 제도를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 4%(어떤 기준에 근거한 수치인지는 모르겠다. 혹은 어떤 집단을 100%로 상정하고 내린 퍼센트율인지도 또한 모르겠다)라고 하는데, 만약 어떠한 이상적인 제도를 상정하고 말하였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이에 찬성하지 않았을까. 길을 가다 설문조사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국가제도를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국민의 몇 %정도가 그래야 한다고 주장을 할까? 그러한 설문조사의 결과가 부정적이라고 해서 '국민은 보수적이며 현 체제에 긍정적이다'라는 결론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프랑스의 구체제가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수정주의학자들의 말은 궤변이다. 우리가 역사적 사건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현재와 과거를 대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18세기 뿐만 아니라 19세기도, 20세기도 얼마든지 구체제가 될 수 있다. 왜 유독 프랑스 혁명에 있어서 구체제란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말하는 것일까? 구제도는 시대착오적 산물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을 발생하게 한 실제적 체제이다. 정통주의 학자들이 말하는 선이 뚜렷한 모순이 없었다 하더라도 구체제 자체가 혁명 후에 아무 단절없이 복고화되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부르주아 혁명론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젠트리나 부르주아를 세밀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 그들의 경제적인 기반이 거의 같은 데다가 개개인에 따라서 경제적 운세 등이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더구나 계층에 대한 고찰은 더욱 어렵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귀족과 제 3신분, 쌍뀔로뜨 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들을 정확한 숫자로 분류하고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일이다. 더구나 중간분류의 사람들을 나누는 방식은 그들이 천차만별이라는 점에서 더욱 난항에 빠진다.

이는 프랑스 혁명이 밑으로부터의 혁명인가, 아니면 위로부터의 혁명인가, 하는 문제와도 맞물려 있다. 밑으로부터의 혁명이라면, 정치적 언어에 고무되고 피폐한 삶에 지친 민중들이 그들 중의 지배자로 하여금 새로운 정부를 세우게 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는 혁명을 지배한 건 소수의 혁명가와 엘리트 집단이었으며 민중은 그들에게 그냥 끌려 다녔다고만 할 수 있다. 부르주아 혁명론은 '부르주아' 계층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추상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부르주아 혁명론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부르주아 계층은 갑작스럽게 생겨날 수 없었다. 그들이 스스로의 역할을 찾아내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혁명은 몇몇 사람들만이 주도적으로 움직이게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혁명이 여러 사람을 움직이게 했다. 그래서 이 추상적인 집단의 설정이 가능하다. 프랑스 혁명 당시에 존재했던 부르주아는 그 구성인원이나 이념이 동일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부르주아는 혁명을 탄생시켰고, 혁명은 또 부르주아를 탄생시켰다.

문화의 연속성에 대한 수정주의 학자들의 입장은 어떠한가

수정주의 학자들은 신문이 프랑스 혁명 이후에나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나는 다시 수정주의 학자들의 비판의 근거가 매우 미시적이라는 판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즉 정통주의 학자들이 여러 가지 세부적인 원인들을 통해 통시적이고 종합적으로 혁명을 바라보는 것에 비해, 수정주의 학자들은 개별적 원인들이 혁명의 직접적 원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집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언론이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미친 요인 중에 하나라는 것이 정통주의 학자들의 입장이라면, 언론이 혁명 당시(1789년의 혁명을 말한다면)가 아니라 후에나 영향을 끼쳤다는 명제를 통해 혁명을 부정하는 것이 수정주의 학자들의 입장이다. 어떤 거대한 역사적 사실을 이루어낸 수많은 사건의 조합들 중 개별적인 것을 뽑아내어 원인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하는 주장은 매우 미심쩍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를 뭉뚱그린 상상적 대상으로 바라보자는 말이 아니다. 사실과 사실 사이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상상력을 필요 이상으로 동원해버린다면 그것은 날조된 역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과 사실 사이의 공백을 무시하기 위해 개별 사료들만을 부각시킨다면 그것 또한 불완전한 역사일 것이다. '바스티유 감옥 파괴 사건이 있은 후 약 3개월이 지난 1789년 10월에는 빠리의 급진적인 신문들이 시민들을 베르사이유로 향하여 행진을 하게 유도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라는 서술을 보자. 혁명이 바스티유 감옥 함락 사건에 불과하다면, 신문의 영향력은 없다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의 연속성을 말하기 전에 그 문화가 어떤 문화였는가를 먼저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 문화가 달라진 인간성을 반영하며 특수한 의식이 움트고 있었다면, 그것은 혁명 이후에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승 · 발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정주의 학자들은 구체제 하에서 대중문화가 융성했으며, 낭만적인 감성이나 일종의 평등 사상도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문화적 현상들이 혁명이 없어도 저절로,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었을까? 구체제 하에서의 문화 자체가 혁명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는 바탕이 되고 있다. 즉 구체제 하에서 평등 사상이 존재했다라는 말은, 그 문화 속에 내재된 혁명의 씨앗을 부정할 수 없다고 돌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 문화'가 완전히 새롭게 생겨났다는 정통주의적 입장에 대해서는 그리 수긍하지 않는다. 문화는 서서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변해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정주의 학자들의 '혁명 이전의 대중 문화가 혁명 당시의 문화보다 훨씬 더 활기가 있었고, 진정한 의미에서 대중적이다'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혁명에서의 폭력적 성향은 필요악인가 아니면 회피할 수 있는 것인가

조레스는 말했다. "혁명은, 진보라는 견지에서 볼 때 야만적이 사건이었다. 아무리 하나의 혁명이 고상하고, 건설적이며,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혁명은 인간의 발전 단계에서 역시 열등한 사건이었고 반은 짐승의 행동에 속하였다." 폭도들이 프랑스 혁명을 움직인 주요한 세력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또한 프랑스 혁명이 저지른 9월 학살과 방데에서의 비극, 낭뜨의 처형 등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혁명을 피를 위한 혁명이었다고 규정할 수는 없다. 혁명의 분위기 조성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면, 혁명은 인류가 다시는 겪어서는 안될 끔찍한 사건일 것이다. 혁명은 폭력적 관성에 의해 진행되는 면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혁명 당시에는 폭력을 강조하는 것이 혁명가들에게는 더욱 강력한 선동성을 부가해주었으며, 반혁명가들에게는 더욱 강력한 부정성을 인식하게 했다.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지만, 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 라는 말은 역사의 비극성을 암시해준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은 인류의 폭력성을 자각하게 함으로써 폭력에 대한 면역을 기르게 했음도 간과할 수 없다. 또한 프랑스 혁명은 언젠가는 넘어서지 않으면 안될 신분제도에 대한 도전이었다. 신분제도는 고대로부터 인간을 억압하며, 엄청나게 부당한 폭력 앞에 다수의 인간을 놓아두는 제도였다. 사회적 인간의 폭력은 더 큰 폭력을 경고하고 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 이는 얼마 전 일어난 미국에 대한 9.11 테러를 상기하게 한다. 미국은 세계 질서 유지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목숨을 살상해왔는가. 그러나 무고한 미국인들은 9.11 테러의 희생양이 되었다. 더 큰 폭력은 그보다 규모가 작지만 끔찍하기는 마찬가지인 테러를 양상하였다. 프랑스 혁명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혁명을 움직인 것은 결국 필연인가 우연인가

수정주의 학자들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프랑스 혁명 당시의 정치 향방을 바꾸었다고 말한다. 결국 혁명이 진행된 원인은 부르주아의 이념 따위가 아니라 그저 "정치가들이 정책 판단을 하는 과정에서 개입될 수 밖에 없는 환경적인 우연성과 이에 연관된 제반 현상들" 이라는 주장이다. 혁명의 과정에서 우연적인 사건이 있을 수는 있지만 프랑스 혁명 자체를 우연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그런 왕이 아니고 그런 왕비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가정 역시도 우연의 힘을 지나치게 신봉하고 있다. 이미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을 사실과 다르게 가정함으로서 그 존재 자체를 우연으로 만들 수는 없다. 또한 "인간사에는 논리가 작용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다"라는 고찰 속에서도 역으로 프랑스 혁명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비논리적인 인간들의 무책임한 혁명이라는 뜻이 아니다. 역사의 비논리적인 부분들을 인식하고 이를 바꾸어나가려는 의식 자체가 프랑스 혁명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이다.

시대착오주의적 프랑스 혁명 해석이란 무엇인가

수정주의 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에서 민중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정통주의 학자들의 초기 연구에서 민중의 역할에 대한 고찰이 부족했음은 사실이다. 또한 수정주의 학자들은 정통주의자들이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제도를 가정하고 그 제도의 문제점을 찾아내려고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구제도의 결점들이 유기적으로 작용해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주장을 시대착오라 규정한다. 그러나 시대착오가 바스티유를 유명하게 만들었을 뿐이라는 가정은 미심쩍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존재한 유명한 역사적 사건들도 시대착오적인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바스티유에 있던 죄인들이 사실은 정치범이 아니라 잡범이었다는 사실이, 민중들이 바스티유를 함락했던 사건의 의미 자체를 완전하게 훼손시키는가? 전설과 허구와 시대착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의 오해를 제하고도 바스티유는 의미 있다. 혁명은 혁명의 순간들을 모아 이루어진 것이며, 바스티유는 그 순간 속에 있다.

혁명의 영향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자유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죄악"이라고 수정주의 학자들이 부르는 혁명은 그 과격함과 지나친 선동성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또한 왕정 복고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혁명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이는 프랑스 혁명에 진보성이 없다는 부정적인 견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극단적인 역사적 변화가 궁극적으로 역사를 진보시켰는지, 아니면 퇴보시켰는지에 대한 판단은 개인에 따라 다를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평화적 혁명에 대한 인간의 이상을 무참히 깨뜨린 혁명이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나는 혁명적 이상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의 부정적인 결과를 모두 무시하는 긍정적이고 정통주의적인 역사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유효한 것은 혁명이 지닌 순도 높은 이상이며,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인식의 새 지평을 마련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3. 결론 : 우리의 혁명론에 대한 물음

이 책에서 대립되는 큰 명제는 다음과 같았다. 정통주의 학자들의 프랑스 혁명의 필연성과 그 위대성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수정주의 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은 우연히 일어났으며, 그 개념은 후세의 역사가들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정통주의 학자들은 역사의 진보를 가정하고 계급투쟁과 부르주아 혁명론으로 인해 프랑스 혁명의 발생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수정주의 학자들은 인간의 비논리성에 의한 역사의 후퇴를 인정하고, 객관적 사실들로 조합된 쿠테타로 프랑스 혁명을 설명한다. 전자가 역사를 거대한 전범이자 철학적 성찰의 장으로 삼는다면, 후자는 역사를 적나라한 객관적 사실들의 조합으로 보고 가차없는 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이 세상의 일부분으로 자신을 여기던 인간이 비로소 세상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절대적이었던 세계관을 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자유주의적 역사 전통이 제 3세계에는 오히려 폭력과 억압으로 작용하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프랑스 혁명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역사론을 종합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그 전통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이유도 포함된다. 내가 프랑스 혁명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갖는 이유는 '서구적 전통'에 대한 동경 때문이 아니라 역사의 진보성에 대한 강한 믿음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속한 대한민국의 현실에 혁명이 필요하다는 자각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식의 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서구적 전범에 대한 탐구 역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성을 논한다는 것은 매우 미묘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근대성이 제대로 체화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탈근대성의 징조가 나타나는 복합적인 양상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성은 환상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이 우리에게 있는가? 우리에게 근대적인 역사는 있는가? 근대를 모르면서 근대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친일에 대한 역사적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혁명의 길은 더욱 멀어질 것이다. 근대와 탈근대 사이의 막막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는 우리의 근대, 우리의 역사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필요할 것이라고 믿는다. 혁명이 아니라 개혁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현실은 역사적 자부심의 결여 때문이 아닐까. 혁명의 전통은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역사를 진보시킬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의 역사적 의의가 미래까지 계속 이어지리라고 믿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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