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나 다를까 잠이 깼다. 분명히 냉장고 안에 한라산 한 병, 처음처럼 한 병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없었다. 안주만 있고 술이 없는 이 급박한 상황에 냉장고를 더 뒤지니 맥주 한 캔이 나왔다. 아, 소주가 마시고 싶은데 하며 씽크대 쪽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요리술로 쓰는 소주 반 병이 보였다. 저거라도 싶어 얼른 들고 와서 황급히 맥주와 말아주신 다음 급하게 벌컥벌컥 들이키고 누웠다. 취하고싶어 빨리 마셨더니 바로 취했다. 당신 지금 자면 열두시에 깬다. 하더니.

어제도 중간에 잠이 토막 나 하루종일 빌빌 거렸는데
오늘도 그럴 확률 90퍼센트. 오랫만에 집에서 술을 마셨는데 뒤끝이 좋지 않다. 기분이 나쁘다. 술은 역시 천천히 마시는 게 진리다. 누구 표현에 의하면 목 마르다 싶을 만큼 천천히.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와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동시에 읽었다. 그러려고 그런 것은 아니고 둘 다 머리맡에 두고 그 때 그 때 짚이는 대로 읽어서 그리되었다.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는 삼분의 이쯤 읽었는데 지금 불을 켜고 책을 찾고 싶은데 일어나기가 싫다. 스탠드는 선이 뽑혀있고 옆사람은 숙면중이다. 좋겠다.

역시나 책 속의 주인공에 빙의 되었을 때 책이 재밌다. 그러니까 엄중히 감시 받는 열차의 주인공은 소년병.
소년병 맞나?
너무 시끄러운 고독만큼 빠져 읽어지지 않았다. 필사하고싶은 마음도 안생기고. 초반에 소년이 자기 할아버지 얘기를 하는 부분은 넘 재밌었다. 왜일까. 그 할아버지에 빙의 되는 느낌은. 연금으로 편하게 생활함을 자랑하다 맞아 죽는 캐릭터에 빙의 되다니
영광이다.

어쨌든 소년보다 할아버지에 빙의 된다는 게 핵심이다.
책이 지금 손에 없는 상황에서 책 내용이 뭐였지? 생각하다보니 읽고 있을 때 느꼈던 감정보다 더 강렬한 느낌이 떠오른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 주었던 강렬한 매혹 때문에 상대적으로 재미없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아니다.

역사와 현실에 기반한 캐릭터가 살아 숨쉬는 좋은 소설이다. 그런데 이 캐릭터 역시 내리 눌리는 슬픈 짐승이구나.30분만 눈감고 있음 잠이 올 것 같다.
2시에 잠들어 8시에 일어나면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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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성공하지 못하고 뒤척이다 일어나서 스탠드를 켜고 이러저리 책을 찾은 결과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더미 속에서 엄중히 감시 받는 열차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음..소년병이 아니라 열차 기관사도 아니고 철도역에서 근무하는 어린 철도원 정도가 되겠다. 아무 것도 모르고 전쟁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있는.

 

"접니다. 밀로십니다. 사모님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내일모레 제가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는데요, 차장인 마샨데, 누군지 아시죠? 틀림없이 그녀는...저를...원할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죠?"101

...

조언을 좀 구하려고 왔습니다. 저, 그러니까, 저는 틀림없는 남잡니다. 하지만, 막상 그것을 입증하려 들면, 갑자기 남자가 아니게 됩니다. 책을 찾아 보니까 '에야쿨라티오 프레콕스'라는 증상이라는데, 무슨 뜻인지 아시죠?"

...

"사모님께서는 잘 아실 거예요, 잠깐만요. 바로 지금, 이 순간에는....그래요, 잠깐만 그대로 있어 주세요. 제발..지금은 남자가 됐습니다. 한 번 만져 보세요!"

102

...

 

지금까지 책없이 연상하던, 그런 뉘앙스가 아니었다. 급격히 야한 모드로 넘어간 것도 아니었다. 단지 어린 철도원이 얼마나 순수한? 소년인지 드러내는 장치 정도에 불과한 내용이었다. 그래도 새벽에 혼자 읽고 있자니 쫌 뭥미? 하는 심정이 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뒤로 갈수록 좀 더 첩보적인? 내용이 나오는데, 새벽 4시쯤 저절로 잠이 들었다. 드레스덴 폭격이 배경으로 잠깐 나오는 걸 읽으며 잠이 들었는데, 이 책 몇 장 남았는데, 다시 읽어야 겠다. 뒤로 갔더니 드레스덴 폭격이야기도 나오고 역시 그냥 읽는 책이 아니었어. 배경지식이 있어야 했어...

 

이 책은 불어본을 번역한 <너무 시끄러운 고독>과 달리 체코어 버전을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내용이 그런가 그나마 감정을 덜 건드린다. 출판사가 '버티고'이고 초판을 2006년에 발행했는데, 아직 이 출판사가 버티고 있는지 좀 궁금해졌다.

 

증조부는 열여덟 살 때부터 하루에 금화 한 닢씩을 연금으로 받으셨던 분이다. 물론 나중에 공화정이 들어선 후에는 화폐단위가 코루나로 바뀌긴 했지만 말이다. 증조부는 1830년에 태어나, 열여덟 살이 되던 해인 1848년에 육군의 고수가 되어 카렐대교 전투에 참전하셨다. 이 전투에서 학생들은 다리에 깔린 포석을 파내어 군인들을 향해 던졌고, 증조부는 그 돌에 무릎을 맞아 평생 절름발이로 사셨다. 이때부터 증조부는 매일 금화 한 닢씩을 연금으로 받았는데, 그 돈으로 매일 럼주 한 병과 담배 두 갑을 사셨다.

 가만히 집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럼주를 마셨으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증조부는 그것들을 들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온 동네를 돌아다니셨다.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면 어디든 나타나 자랑하는 것을 재미로 여기셔서,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한테 싱글싱글 웃음을 던지며 가져간 럼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셨다. 그래서 증조부는 항상 어딘가에서 흠씬 두들겨 맞곤 하셨는데, 이런 일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되풀이되었다. 그 때마다 할아버지는 증조부를 손수레에 싣고 집으로 돌아오곤 하셨다. 그것도 잠시, 증조부는 상처가 거의 나을 만하면 다시 밖으로 나가 자랑을 하며 돌아다니다가, 사람들한테 또 무참하게 두들겨 맞곤 하셨다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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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이 좀 각별하다.

각별함을 즐기느라 아직도 2017년으로 진입하지 못한 느낌이다.

2016년 1월에 필립 로스를 만나 죽고 못살아 직진했었고,

2017년 1월엔 보후밀 흐라발을 만나 죽고 못사는 중이다.

철철이 이렇게 만나지는 기쁨이 있어 또 살 맛 나는 중이다.

 

주말엔 강의를 듣고 틈새 시간을 이용 친구를 만나러 갔다. 내 꼴이 피곤해 보였는지 친구가 자기가 가는 맛사지샾에 데리고 갔다. 등과 어깨 목을 집중적으로 맛사지를 받았는데, 안 받다 받으면 내일 좀 몸이 뻐근하실 거여요 하더니 어제 좀 진짜 뻐근했고, 오늘까지 여파가 미치었다.

 

일주일간의 여행을 다녀왔다. 생각해보니 2박, 3박 여행은 요 몇년간 한 적이 있어도 일주일의 먼 여행은 십년 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난 요즘 집에 있어도 여행을 한 기분을 느낄 수 있어. 여행 가고 싶지 않아 이러며 살았는데, 막상 긴 비행에 지쳐 나가떨어져 보니 그래, 이렇게 지친 비행을 한 번씩은 해줘야 했던 거야 하는 마음이 들었다. 결론은 좋았다였지만 단체여행이다 보니 사람에게 지쳤다. 머리 맡의 <라요하네의 우산>을 펼쳐 읽는데 내 맘 같은 단락이 나온다.

 

지미의 여행 콘셉트는 명료했다.그 어떤 장미꽃도 길들이지 않기,그 무엇과도 관계 맺지 않기. 냉정한 듯 덤덤한 지미에게 썩 어울리는 여행법이었다. 잦은 길들임과 번잡한 교류는 밥벌이용 현장만으로도 충분했다. 지미는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장애인 단체 관련 일을 하는데 작게는 장애우 보살피는 일부터 크게는 단체 예산 집행하는 일까지 한시도 사람 곁에 머물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낯선 여행지에서만이라도 혼자이고 싶었다. 66 

 

혼자이고 싶은 마음에 잠시 잠깐 일행과 떨어졌다가 눈밭에서 길을 잃고 헤매었다. 혼자 아침 산책을 하고, 혼자 있고 싶은 마음에 새벽에 눈이 떠졌으리라. 이번 여행에는 다시 올 수 없는 날들을 보내느라 혼자 있는 시간을 놓쳤는데, 문득 많이 피곤한 것은 혼자인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타자를 공감하고 탐색하는 일은 불편한 제 안의 진실을 발견하는 것과 같았다.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일은 피해가고 싶었다. 타자의 아픔이 제 아픔이고 타자의 욕망이 제 욕망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는 서글픔. 삶이 진행되는 한 지속될 형벌을 일부러 찾아가며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91

 

<라요하네의 우산>을 읽으며 다듬어진 문장과 깊은 사유에 감동받았다. 이제 차츰 읽어 나갈 계획이지만 한 편을 보니 나머지 글들도 빨리 읽고 싶어진다. 담주에 술 약속을 해두고도 그 때까지 못 기다리겠어서 여보님, 소주 마시고 싶은데 안주가 없다. 했더니 순대와 만두를 사왔다. 지금 마셔야 해서 이만...내일 오전 강의는 종쳤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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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8 23: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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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9 0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7-01-19 00:03   좋아요 0 | URL
필립 로스를 만나 죽고 못 살아~ 에 공감합니다. 저도 작년에는 필립 로스님 작품을 많이 못 읽었네요. 올해는 다시 읽기, 해봐야겠어요.
<라요하네의 우산>은 저도 아껴서 읽었어요. 순대와 만두와 소주와 즐거운 시간 마치시면 책 이야기 또 나눠주시길^^
편안한 밤 되세요~~~ *^^

2017-01-19 0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년 첫 영화
조금 더 파격적이고 조금 더 광기 어린 불안한 영화를 기대했었나 보다.

전체적으로 담백하고 잔잔해서 놀랐다.

에곤 실레가 28세에 요절한 것은 영화를 통해 처음 알았다.

당시 유행하던 독감에 걸려서 태중의 아이와 아내, 그리고 자신까지 불행한 죽음을 맞이했다.


짧은 생에 비해 남겨진 작품수가 대단하다.  살아 있는 동안은 미친 듯이 그림만 그렸구나

오로지 그리기 위해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서는 아동 성추행이나 누이와의 사랑등을 애매모호하게 그렸다. 관객의 판단에 맞기는 정도. 이제와서 그런 것들이 사실이든 아니든 놀랍지도 문제가 된다고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발리의 사랑은 가슴 아팠다.

빈의 벨베데레미술관에 클림트 그림을 보러가서 사실 더 매혹된 것은 에곤 실레의 그림이었다.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숨김 없는 그림..더러운 걸레 같은 그림과 반짝이는 벽지 같은 그림을 두고 어느 쪽에 눈길이 더 가느냐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일테지만, 태어날 때 부터 더께더께 먼지가 쌓인 듯한 심지어 그 먼지를 더러운 걸레로 문질러 닦아내려 한 듯한, 누가봐도 한 눈에 슬프고 외롭고 불안한 영혼이 그린 그림 앞에서 할 말을 잃었었다.

그리고 더 마음을 잡아 끈 것은 그가 그린 풍경화들. 28세 이전에 자연을 그런 감수성으로 바라봤었구나 싶으니 정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짧은 기간이기지만 압축된 삶, 열정적인 삶을 살아냈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그림을 찬찬히 더 보고 전기도 한 편 읽어보고 싶다.
2017년 첫 영화 본 기념으로 몇 자 적었다.


2017년 1월 시작을 에곤 실레와 보후밀 흐라발...철학 카페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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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7-01-18 07:44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영화 봤어요. 일단 에곤 쉴레역 배우가 넘 잘 생겨서 놀랐고. 생각보다 평범한 생을 산듯한 느낌에 좀 놀랐고 이런 화가는 삶의 굴곡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했나봐요. 너무 일찍 세상을 떠서 놀랐어요. 집에 와서 에곤 쉴레에 관한 책만 세권 구입해놓고 전시중이에요 ㅎㅎ
비슷한 느낌인가봐요. 발리와의 사랑이 너무 가슴아팠어요. 영혼까지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랑일지도 모르는데... 경제적 안정을 위해 그림을 위해 떠난 주제에 비밀결혼 먼저하자는 두마리 토끼 다 잡고 싶어하는 이기적인 남자의 마음에 좀 화도 났지만요~


2017-01-19 00:43   좋아요 0 | URL
넘 잘생겨서 놀랐어요. 저도.ㅎㅎㅎ 짧은 인생동안 그리 많은 작품을 남겼다는 것이 가장 놀라웠고, 생각보다 평범?해서 놀랐고요.
아무튼 요즘 영화관 가서 영화 볼 일이 거의 없는데 모처럼 극장 나들이가 저에겐 리프레쉬~ ㅎㅎ
 

의식이 돌아왔다. 눈을 뜨지 않으면 아직 눈밭이다. 떠오르고 펼쳐진다. 잠시 잡생각을 하다가 떨쳐내려 눈을 뜬다. 몇 시 일까?

무게 부담을 줄이려고 선택한 책이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그리고 눈이 떠질 때 마다 여행지의 침대 위에서 스탠드를 켜고 읽었다. 룸메는 없는 듯이 잠이 들어 있어서 늘 혼자 만의 방에서 읽는 것 같았다. 얇아서 하루 만에 다 읽어 버리면 어쩌지? 잠시 생각한 것은 기우였다.

전체 8장의 책. 그리고 중복되는 문맥들. 1장을 읽고 읽고 읽었다. 엄밀히 말하면 처음 열 페이지 정도를 반복해서 읽느라 진도 나가기가 어려웠다. 아! 어쩜 이런 글을 쓸 수 있지? 라고 생각하느라 또 자꾸 멈춰졌다.

이건 소설일까? 현존일까? 시일까? 계속 생각하며 읽었다. 이런 부분은 묘사가 아닌데 읽는 순간 왜 이렇게 펼쳐지는 거지? 각 장이 나름 완결되어 있으면서 연결되어 있고 시공이 왔다갔다 의식도 왔다갔다 하는데도 산만하지 않구나. 그런데 이건 쓰려고 노력해서 쓴 글 아니고 그냥 몸이 쭉 써내려 간 글 같다.

번역이 참 유려하구나.싶었는데 불어본을 번역했다. 체코어로 읽으면 어떤 맛일까 궁금했다. 더 건조하고 더 딱딱하고 더 슬플 것 같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고 나는 35년간 책과 폐지를 압축해왔다.

이렇게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영감을 주는 책이다.
내 책 하고 싶다. 나 인 것 같은 문장이 너무 많다.
작가랑 책이랑 나와 우주가 한 몸 같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병에 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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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봄이 더디 온다. 진눈깨비와 비와 안개가 여름 직전까지 찐득하게 우울하게 붙어 있다가 5월이 다와가서야 마지못해 우리 곁을 떠난다. 눈이 녹고 얼고를 반복해 공원 길은 질척거리고 피부 깊숙히 파고드는 냉기의 서늘함이란 사람을 지치게 한다. 그런가 싶을 때 왜 이다지도 봄은 더디 오는 거야, 3월인데 왜 아직 겨울인거야, 겨울 보다 왜 더 추운 것 같은 거야 라며 절규하고  싶을 때 공원 잔디를 뚫고 피어나는 꽃이 있다. 손톱 만한 크기의 데이지들. 물론 그 보다 더 일찍 구근을 심어 가꾼 개인 정원에는 크로크스와 스노우 드롭들이 꽃을 피우지만 한 낮에 아주 잠깐 해가 날 때 잠깐 꽃잎을 열었다 닫고 만다.

 

여행을 갔을 때 나름 기념품으로 사 오는 것이 식물화집이다. 가능하면 좀 세밀하게 그린 식물화집을 사오려고 하는데, 이런 것은 일반 서점에서 찾기가 쉽지 않다. 이번 여행길에서도 분명 제대로 된 화집이 있을 것 같은데, 의사소통 불가로 찾지 못하고 그냥 간단한 도감 수준의 식물화집을 샀다. 2월 말이면 피는 스노 드롭은 체코어로 스니젱카인데 스니젱카 라고 발음할 때 그 시즌의 공기가 풍경이 같이 떠오른다. 그런 의미로 나무 한 가지 꽃이름 한 가지라도 그 지역 언어로 알고 싶은 것, 거의 같지만 조금씩 다르기도 한 식물들을 알고 싶은 것이 그 지역에 대한 나의 애정 같은 것이다.

 

오늘 선생님께서 수마트라 섬의 어느 호수가에 혼자 수행을 가신 일을 말씀하셨다. 솔깃하여 그 호수 이름이 뭐예요..하고 점심을 먹을 때 여쭈어 보았다. 적지 않아 금방 잊은 게 흠이긴 하지만, 그 좋은 곳에서도 하루 이틀이면 여긴 어디? 나는 왜?의 심정이 된다고 하셨다. 혼자이고 싶고,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을 찾아 갈 때 습관처럼 색연필과 스케치북을 챙기지만 한 번도 (아니 어쩌다 한 번은 그렸지만) 제대로 색연필을 잡아 본 적이 없다. 그리는 것 보다 읽어야 할 일이 늘 산더미여서 연필 잡을 여유가 없었다. 벌써 뉴스 지면에는 눈을 뚫고 올라오는 복수초 사진이 실린다. 지금부터 올라오는 작은 꽃들 중에 바람꽃을 빼 놓을 수 없겠는데, 바람꽃은 주로 계곡 가에 피기에 절벽에서 보기 어렵다.(절벽의 바람꽃이란 시적 상상력이자 상징으로 읽었다) 추위를 뚫고 바람 속에 피는 꽃들이 그 어느 꽃들보다 여리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다.

 

발견! 시전문 잡지가 있었다니 반가운 마음으로 읽고 있다. 시도 읽고 시 평론도 읽고 이런 일이 살아가는 일 같다. 어딘가에선 시가 계속 쓰여지고, 누군가는 잡지를 펴내며 그리고 누군가는 그것을 읽고 행복해하는 일, 새 해 벽두가 보람차다.

 

 단체 여행에서 스케치북을 잡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 와중에도 스마트 폰 메모장으로 간단하게 그림을 그리는 분을 보았다. 젊은 시절 경도 된 작가라며 그의 유적지에서 흠뻑 즐기는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나도 시간을 만들어 나뭇 가지라도 하나 그리고 왔어야 하나 그랬어야 하는데 하는 약간의 후회가 남는다. 사람을 보느라 자연을 전혀 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언젠가,(그런 날이 올까?) 선생님이 수마트라 섬에 수행을 가신다면, 그 때는 나도 같이 가서 꽃과 나비를 그리고 싶다. 사람 말고 자연과 벗하고 싶다.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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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4 23: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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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4 23: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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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4 23: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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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4 23: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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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4 23: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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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5 08: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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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5 09: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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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5 09: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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