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시간은 실체가 없어 보이지만
지나고 나면 형태로서
눈앞에 나타난다
불과 며칠 사이 박주가리 씨앗이
오동통해졌다
이제 곡식과 과일들이 이렇게
여물어가는 시절이 왔다는 실감.
습기 머금은 아침 공기가 박주가리 꽃향을
꽉 붙들고 있는 아침.
덜 고통스럽고 더 입맛 도는
하루이기길. .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지금행복하자 2015-08-21 09:29   좋아요 0 | URL
여주같이 생겼어요~ 박주가리라는 거.. 익숙하면서도 막상 첨 보는것 같아요~

2015-08-21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너 없이 걸었다 - 뮌스터 걸어본다 5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우연의 도시 어느 우연의 시인

 

책장을 덮으며 생각한다. 그래, 시인은 이렇게 푹 젖어 사는 사람이구나...  

책이 이렇게 예쁠 수도 있구나!  

읽기도 전에 손에 잡힌 촉감 만으로 이미 책을 다 읽어버린 느낌이다.

 

 서문에서 시인은 맹인 독자를  직접 손을 잡아 이끌 듯 뮌스터로 안내한다. 말로 공간을 대충 그리는데 그 흐릿함이 오히려 명확하게 다가온다. 지도를 펼치라 했건만 지도쯤은 펼치지 않아도 머릿 속으로 대충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마르고 닳도록 지도를 봐서가 아니라 명확함이 싫은 그 아스라함만으로 뮌스터는 벌써 마음 안에 머릿 속에 자리한다.

 

'어느 날, 트라클의 시를 읽다가 내가 잊고 있던 뮌스터의 첫인상이 20년이라는 세월을 뒤로한 채 문득 찾아 왔다. 아주 짧은 시간의 층이라 얇야서 없어져 버린 줄 알았는데 트라클의 시가 내 시간의 얇은 지층 하나를 돌려주었던 것이다. 시를 읽는 어떤 시간은 이런 시간이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것이 돌아오는 시간, 그 시간을 새로 발견하고는 그 시간으로 들어가보는 것.' 32쪽

 

그녀는 '트라클'이란 강에 몸을 깊숙히 담구었고, 아주 천천히 일어났다. 우리는 그녀의 온기로 기화되는 트라클의 수증기를 가만히 바라보거나, 공기 중에 흩어진 수증기의 입자가 우리에게 닿아 소멸 되는 것을 그냥 느낄 뿐이다. 대상에게 침잠했던 시인이 대상의 시세계에서 건져올린 사유를 가만히 되뇌인다.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그녀가 가진 물기를 호흡할 뿐이다.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엔 수 많은 겹이 있고, 꿈이 있고, 결국은 떨어지고 말 별똥별이 대기하고 있다.

 

부드럽고 따듯해서 마음이 촉촉해진다. 결국 눈가도 촉촉해지고 만다.

 

기차역에서

칠기박물관 앞에서

뮌스터의 푸른 반지

츠빙어에서

소금길, 그리고 다른 길들

 

뮌스터의 반을 걸었다. 그냥 걸은 것이 아니라 외로움과 그리움의 사유들과 함께. 시인이 사랑한 시들을 읽으며 오래 된 길들을 걷고, 사람과 건물들을 만났다. 기차역이든 박물관이든, 짙은 숲그늘의 가로수길이든 과거의 유적 앞에서든 시인은 고향을 그리워하고 '너'와 '나'를 향해 가는 질문들을 한다. 시인을 떠나오게 했고, 돌아가고 싶게 만든 영원의 질문들이 뮌스터의 거리 곳곳에서 불쑥 불쑥 튀어 나온다. 시인은 열다섯 시간의 거리 그 너머에서 고향이 가깝다고 말한다. 갑자기 베낭하나 둘러 메고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를 타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4시간 반 기차를 타면 뮌스터. 우연의 일치로 어제 마저 읽은 헤세의 <황야의 이리>도 뮌스터가 배경이다. 소설 속에 배경이 특정한 역할을 하지도 배경의 묘사도 거의 없지만, 허수경 시인의 뮌스터와 '하리 힐러'의 뮌스터가 오버랩 되면서 글이 더 쫄깃하게 읽힌다.

 

지도는 깜짝 선물이다. 다 읽어 버리기 아까워 반을 남긴다. 남아 있는 동안은, 읽어 가는 동안은 먼 곳의 그리움을 시인과 함께 느낄 수 있겠지. 시인이 좀 덜 외로웠으면 한다.

 

상점 거리의 시작을 박물관이, 상점 거리의 끝을 성당이 장식한다는 건 이 도시가 제 중심부를 그저 상인들에게  내어주지 않았다는 걸 의미한다. 시간을 보존하는 박물관과 마음을 달래주는 성당이 있어야만 비로소 자본주의 상점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도시의 설계자들이 진즉에 했는지도 모르겠다.네게로 가는 길을 잃어 버렸을 때 역사를 바라본다는 건 휴식을 뜻할 수도 있다.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고 기를 쓰면 진짜 잃어버린다. 그 때는 잠시 덮어두는 것이 최고다. 10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떤 부류의 인간이든 나름의 표식과 특징, 나름의 미덕과 악덕, 나름의 죄악이 있는 법이다. 황야의 이리의 특징은 그가 밤의 인간이라는 점이다. 아침은 무서운 시간이고, 좋은 일이라고는 일어나는 적이 없는 불쾌한 시간이다. 어느 아침이고  그가 정말로 즐거운 기분을 가져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오전 중에 좋은 일을 하거나 기발한 착상을 떠올리거나, 자신이나 남을 즐겁게 해준 적도 없었다. 오후가 지나면 비로소 서서히 몸이 달아오르고 활기가 차올랐고, 저녁 무렵에 되어서야 -물론 일진이 좋은 날에 해당되는 얘기지만- 활발하고 생산적이 되어서, 가끔은 정열적으로 일하면서 행복해지는 거였다. 고독과 자유에 대한 욕구 또한 이러한 생활과 관련이 있었다. 자유에 대하여 그 보다 더 깊고 열정적인 욕구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젊은 시절, 가난 때문에 호구를 위해 애먹던 시절에도, 그는 한 조각 자유라도 건질 수만 있다면 차라리 다 떨어진 옷을 입고 굶더라도 그쪽을 택했다. 66

 

이 경우 <자살자>는 개성화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다시 말하자면 인생의 목적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완성과 실현에 있지 않고, 자신의 해체, 즉 어머니에게로, 신에게로, 전체에게로 돌아가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이다. 이러한 천성을 가진 사람들 대부분은 실제로 자살을 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자살이 죄악임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그들은 자살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삶에서가 아니라 죽음에서 구원을 보며, 자기 자신을 바치고, 내던지고, 지워버리고, 시원(始源)으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70

 

저 낯선 세계의 소리가 나의 호기심을  강렬하게 자극했고, 나는 종종 몇 시간이고 그것에 대한 생각에 흠뻑 빠져들곤 하였다. 그럴수록 <보통 사람은 입장할 수 없음>,<미친 사람만을 위한 것임>이라는 경고가 나에게 와닿고, 저 세계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걸 보면, 나는 <보통 사람>과 거리가 먼 미친 사람임에 틀림없다. 아뿔싸, 나는 오래전부터 보통 사람의 생활, 정상적인 사람의 삶과 사고와 멀리 떨어져 살아온 건 아닐까? 그렇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이 부르짖는 소리를 충분히 이해했다. 이성과 속박과 시민성을 떨쳐버리고 광인이 되라는, 영혼과 공상의 풍요롭고 규범 없는 세계에 몰두하라는 요구를 나는 이해하고 있었다. 102

 

나는 이 두려움을 벗어날 길을 찾지 못했다. 절망감과 소심함 사이의 싸움에서 오늘은 어쩌면 소심함이 승리할지 몰라도, 내일 또 매일 새로운 절망이 내 앞에 맞서 있을 것이다. 그것도 자기 경멸에 의해 고조된 절망이. 나는 언젠가 마침내 그것을 저지를 때깢는 면도칼을 손에 잡았다 다시 집어던지기를 되풀이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해치워버리는 편이 낫다! 나는 마치 겁먹은 어린애를 타이르듯 내 자신을 차근차근 설득했다. 그러나 어린애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달아났고 살고 싶어했다. 그는 덜덜 떨면서 나를 온 도시로 끌고 다녔다.

 

내가 절망적으로 동경한 것은 지혜나 이해가 아니라, 체험과 결단, 충격과 도약이었다. 149

 

내가 당신 마음에 들고 당신에게 중요해진 건 내가 당신에겐 일종의 거울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에요. 내 내면에는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에게 답을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요. 본래 모든 사람들은 서로서로 상대를 위한 거울이어서, 서로 답을 주고받고 서로 조응하는 거지요. 그러나 당신 같은 기인들은 괴팍하고 쉽게 마술에 걸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읽어낼 수도 없고, 세상에 어느 것 하나 중요하게 여기지 않지요. 153

 

대개 동물들은 슬픔에 싸여 있어요. 그녀는 말을 계속 했다. 그리고 한 인간이 매우 슬퍼하면, 치통이나 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무언지, 인생이 무언지를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슬퍼하게 되면, 그런 사람은 언제나 얼마간은 동물과 비슷하게 보여요. 그는 슬퍼 보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더 진실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거예요. 당신이 그렇게 보였어요. 황야의 이리씨. 당신을 처음 보았을때 말이에요. 162

 

왜냐하면 내가 당신과 같기 때문이에요. 나도 당신처럼 외톨이이고, 당신처럼 인생과 인간과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고, 진지하게 대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인생에서 지고의 것을 요구하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조야함에 만족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죠.178

 

축음기는 금욕적인 정신으로 가득 차 있던 내 서재의 공기를 더렵혔고, 낯선 미국풍의 춤곡들은 내 정돈된 음악세계를 교란하면서, 아니 파괴하면서 밀어닥쳤다. 이처럼 모든 것을 해체시키는 두렵고도 새로운 힘이 지금껏 그렇게 정확한 윤곽을 지니고, 그렇게 엄격하게 폐쇄되어 있던 내 삶 속으로 밀려 들어온 것이다. 인간이 천 개의 영혼을 지닌다는 <황야의 이리론>과 헤르미네의 말은 옳았다. 182

 

나는 우연히 잘 할 수 있었던 서너 가지 능력과 수양만을 정당화하면서 하리라고 하는 사내의 상(像)을 그려내어 본래 문학, 음악, 철학에 지극히 빈틈없는 교양을 갖춘 전문가인 그자의 삶을 살아왔던 것이고, 그러면서 내 개성의 나머지 부분, 즉 그 밖의 모든 능력과 충동과 노력의 카오스를 부담스럽게 느껴 <황야의 이리>라고 불러왔던 것이다. 182

 

옮겨 적다가 멈춘다...부분이 의미가 없다. 계속해서 필사하고 싶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약자가 약자를 혐오할 때
@patriamea님의 트윗을 확인해 보세요 : https://twitter.com/patriamea/status/633773926535970817?s=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