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맛
히라마쓰 요코 지음, 조찬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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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먹기 시작하면 늘 정신없이 먹게 된다. 육수를 머금고 있다고는 해도 토란대 자체에는 대단한 맛이라는 게 없다. 하지만 한 줄기, 또 한 줄기 계속해서 젓가락이 간다.

 쓸쓸한 맛, 고연한 맛이라고 정리하면 간단하겠지만 그것과는 좀 다르다. 베어 무는 순간 이 사이로 잘 익은 부드러움이 느껴지고, 그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싶을 때 바로 아삭하기도 한데, 그 식감이 너무 좋다. 이를테면 입천장이 개운해지는 상쾌함이랄까. 씹는 동안은 희미한 맛의 편린이 드러나지만 잡으려고 하면 이내 사라져 버린다.

그런 허무함이야말로 토란대 맛이 아닐까. 이것과 비슷한 맛이 있었던가. 이것저것 떠올려 보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아삭하고 씹는 맛이 좋다는 점은 머위와 같다. 하지만 사각사각 딱딱한 샐러리와는 전혀 다르다. 역시 토란대는 토란대다. 유일무이하다. 164

 

달력 넘기는 것을 깜박할 때가 있다. 매일매일 넘기는 달력이라서 하루 늦으면 두 장 연속으로 넘겨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그러니까 이틀이 획획 몇 초 만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마치 여우에게 홀린 듯한 묘한 기분이 든다. 더 혼란스러울 때는 달을 넘길 때다. 9월 29일, 30일을 연속으로 찢어 넘기면 느닷없이 10월 1일이 나타난다. 이건 당황할 수 밖에 없다. 아직 여름의 끝을 붙들고 있었건만, 단숨에 가을 한복판에 내던져진 듯해 그저 멍하니 서 있을 수 밖에 없다.

계절이 나를 내버려 두고 가 버리면 왠지 모를 외로움이 격화된다. 가을이 시작될 즈음이라면 유독 서운한 것이 바로 은어다. 그도 그럴 것이, 봄에는 치어, 초여름에는 치어보다 조금 큰 것, 한여름에는 성어를 맛보며 은어와 함께 계절을 나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고 좋았던 게 뭐였어요?"

 누군가 이렇게 물으면 남몰래 헤아릴 만큼 소중한 것들이 몇 가지 있기는 하지만, 큰 소리로 답해야 한다면 단단히 마음먹고 이렇게 말 할 것이다.

"은어 맛을 알게 된 것이요."

은어는 시시각각 맛을 바꾼다. 예를 들어 한여름 포동포동 살이 오른 은어 소금구이를 덥석 물었을 때의 맛, 푸르스름한 이끼의 향. 단단한 살의 맛, 쌉싸래한 맛, 뼈를 씹을 때의 식감. 맑은 물에서 물보라가 팔딱팔딱 추는 춤. 한편 늦여름부터 가을 사이, 알이 배어 살이 푸석해진 은어에게서 느껴지는 시골스러움 맛은 또 어떤가.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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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많은 음식 에세이들을 읽어 왔지만 필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책은 처음이다. 내게 익숙한 먹거리들이 불러 일으키는 향수 탓만은 아니리라, 산골에서 멧돼지 전골을 먹는 부분도 필사하고 싶었으니까.

 

말린 토란대와 은어를 먹고 자란 것이 갑자기 자랑스러워지는 밤이다. 심지어 밤중에 사촌오빠들이 은어잡이를 나갈 때 따라간 적이 있었던 것 같은 희미한 기억(기억의 왜곡인지 알 수 없는).

 

올 해는 늦여름과 가을사이에 그 곳에 있었지만 은어를 맛보진 못했다.

언젠간 가을 바람 소슬한데 마당에 피운 숯불 위에서 구운 소금 뿌린 은어를 먹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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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7-10-05 11:13   좋아요 1 | URL
매일 넘기는 달력… 아, 그 때의 시간이 정겨워지는 느낌이에요. 지금은 벽걸이 달력조차 사용하지 않는 세태가 된 것 같습니다.
한반도 기상 조건이 바뀌면서 식물과 동물 등의 생태 역시 바뀌고 있다고 하니 은어를 구경하기 힘든 때가 도래하지 않을까 걱정도 앞섭니다.

2017-10-06 23:05   좋아요 1 | URL
네 옛날과 비교할 수 없는 환경이 되어가고 있지요. 섬진강의 은어도 예전같지 않다는소식이 들려오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