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소설이 뭘까? 소설이 대체 뭐기에 이렇게 사람을 홀리는 것일까?

기쁘게 하고 슬프게 하고 위로 받게 하고 탐구하고 싶게 만드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내내 하며 다닌다.

노드롭 프라이의 <비평의 해부>를 읽어 볼까? 단지 '예술'이란 말에 끌려

아서 단토의 <무엇이 예술인가?>를 다시 읽어 볼까?

아니면 더 많은 소설을 더 다양하게 읽어야 할까?

이런 와중에 만난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난 주말부터 소설 <세설>을 읽고 있는데, 오늘은 이 소설이 나를 꿈꾸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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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설>은 오사카의 몰락한 상류 계층의 네 자매 이야기다.

셋째인 유키코의 혼담을 중심으로 당시의 간사이 지방 풍속을

잔잔하게 그리고 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간사이 여성들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 호흡법과 말투 등 여성들의 문화를

소설이라는 구조 속에 처음으로 정착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는 태평양 전쟁 와중의 극적인 사건이나 인간의 의지 이상으로,

계절의 변화가 작품을 지탱하는 근간이 되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위대한 예술은 통속적이면서 동시에 고급 문학이어야 한다>하고 했던

다니자키를 통해 여성과 여성 문화의 요염하면서도 커다란 매력을 맛볼 수 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뒷표지에 나온 책소개를 읽으며 '위대한 예술은 통속적이면서 동시에 고급문학이어야 한다'라는

말에 아,하고 탄성이 나왔다. 요즈음의 답답함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말.

'통속적이면서 동시에 고급한' 대체 통속적이면서 동시에 고급하려면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지

에밀 졸라와 필립 로스, 카프카와 쿤데라,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레이먼드 카버와 하루키를 떠올려 보았다. 이 중에 통속적이면서 고급한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풍속을 잔잔하게 그린다'는 이 <세설>만 보더라도 '풍속'이라는 이 실체가 있긴 하지만 사진 찍듯 딱 드러낼 수 없는 분위기와 문화들을 글로 이렇게 섬세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 고급하다는 느낌이 든다. <미친 사랑>을 욕을 하며 읽고 마지막 책장을 덮고는 탄성이 나온 것과 좀 다른 맥락으로 <세설>은 참 술술 재밌는 이야기책이다. 이렇게 자잘한 일상과 오사카라는 공간과 장마와 홍수, 꽃놀이,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 사람 그 자체를 그려냄이 이만큼 자연스러울 수 있다니, 물 흐르듯 흘러가는 이 가독성이라니. 

 

'통속'과 '고급'이 예술을 정의하는 단 두 개의 키워드일 수는 없겠지만, 하나 하나 찾아서 한 권 한 권 발견해간다는 심정으로 책을 읽는 기쁨.

 

하루키가 그리스섬에 놓고 왔다는 <세설> 필립 로스가 일본 방문을 할 때 가장 먼저 찾았다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묘소, 살아 있었다면 가와바다 야스나리 먼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었을 거라는 다니자키 준이치로. <세설>에 이어  아직 번역 되지 않았다는 <미친 노인의 일기>도 읽어 보고 싶다. 기어다니며 며느리의 발가락을 빤다는..엽기 내용 포함이라고 하니, 대체 문학의 통속성은? 고급함은? 어떤 내용을 담고 어떤 장치 속에서 발현되는가?

 

책을 읽는 기쁨을 알고 열심히 읽겠다고는 하지만 역시나여서

오늘은 어디 갇혀서 책만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강제성은 어디에서나 필요한 듯, 이 자유를 부르짖는 아줌마가 이토록 강제성을 갈구하다니

이 또한 모순이로다. 문득 생각나는 시 한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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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감옥에 갇혔으면 하고 생각한다

감옥에 갇혀 사전을 끌어안고 살거나

감옥에 갇혀 쓸데없는 이야기나 줄줄이 적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병률 <기억의 집>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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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16-10-13 13:53   좋아요 0 | URL
잘 읽었어요. 저도 다니자키에 관심이 많아요.
<미친 노인 일기>는 왜 번역본이 안 나오는지.-_-

2016-10-13 21:15   좋아요 0 | URL
네..번역본이 좀 더 나와도 좋을 듯요. 저도 한 두 권 더 읽어 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