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의 여인
이순원 지음 / 문예중앙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삿포로에 눈이 내렸다. 펑펑 퍼붓기도 하고 풀풀 날리기도 하고 추적추적 내리 꽂히기도 했다. 라멘과 볶음밥을 함께 먹었다. 라멘은 뜨겁고 볶음밥은 달았다. 파와 달걀 뿐인 볶음밥은 꼬들한 쌀과 섞여서 혀에 착착 감기었다. 기름지고 단 맛이 익숙치 않아서 커피집을 찾아 오래 걸었다. 가이드 북에 나온 사진 한 장에 꽂혀서 찾아간 그 곳은 낡고 오래 된 가정집을 개조한 고즈넉한 다방이었다.

 

벽에 걸린 작은 꽃병에 빨간 열매가 꽂혀 있었다.안그래도 눈길을 걷는데 자꾸 빨간 열매가 발에 밟혔다. 하늘을 보았다. 어느새 하늘은 맑게 개이고 청정한 하늘을 배경으로 가로수 빈 가지에 빨간 것들이 점점이 박혀있었다. 이름이 궁금했다. . 빨간 열매를 맺는 나무들을 어찌 다 찾아 보나. 잎이 피는 시기에 다시 와야 겠구나... 했다.

 

<삿포로의 여인>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결핍의 시공간을 공유한 묵혀 둔 사랑 이야기로, 대관령의 배추밭 풍경으로, 삿포로의 눈발 날리던 아침으로. 마냥 다 좋았다. 오래전 눈밭이 보고 싶어 무작정 찾아 나섰던 겨울 피덕령의 풍경은 마음 속 그림 한 장이 되어 남아 있다. 이순원 작가의 다른 작품이자 역시 대관령이 배경인  <19>세의 똥고집 소년 정수의 기억도 생생하다. 그래서 곡절곡절 무슨 아는 이야기 읽듯 기시감 충만한데 통속적이지 않았다.  

 

43세 신문 기자 박주호가 20대 초반 잠시 살았던 대관령의 추억을 회상하며 잊혀졌던 한 소녀를 떠올리듯, 우리 모두는 각자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산다. 어떤 이는 그 이야기를 나누고 살고, 어떤 이는 꽁꽁 싸매두고 살고, 어떤 이는 남이야기 하듯 풀며 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대개는 잊거나 잃어버린 채로 살아간다. <삿포로의 여인>은 지금 여기과 그 때 그 곳을 한 숨 안에서 교차하여 아름답게 잘 풀어낸 이야기였다.  돌이켜 보니 그건 사랑이었어, 할 수 있는 순간을 가진 것만으로도 지금 혼자인 사람들의 외로움이 조금 가실 수 있으면 좋겠다.

 

눈을 좋아하고 마가목을 좋아하고, 대관령을 좋아하니 냉정하게 읽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게 읽을 수가 없었다. 소설인데 팬심 충만하게 읽은들 누가 탓을 하리오 만은, 다만 이 책이 사람과 순정한 마음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 한 편으로 잘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한창훈의 <순정>과 더불어 순정소설 범주에 넣어도 되겠다. 이렇게 말해버리면, 너무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에만 매몰이 될까 두려운데, 길아저씨,대관령 구판장의 이모부, 주호의 아버지, 유강표, 오수도리 산장의 주인등 잠깐씩 나오는 남성인물들도 내게는 다 각자의 이야기를 등에 업은 큰 인물들로 다가왔다.

 

아름다운 장면들도 많았다. 연어 바다 낚시 장면이나 깊은 산 속으로 마가목 열매들을 따러 가는 장면은 파랗게 또는 빨갛게 각인이 되었다. 페이퍼를 쓰면서 <삿포로의 여인>이 더 좋아진다. 하나의 이야기를 읽었을 뿐인데 가슴 속에 수백 가지 이야기가 담긴 느낌이다. 그 안에 그렇게 많은 이야기가 있는 줄 읽으면서는 미처 몰랐다. 인물들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진다.

 

<19>는 청소년 문고이고, 누구나 성장소설로서 청소년기 아이들에게 추천할 수 있는 소설이지만 <삿포로의 여인> 또한 청소년기 독자들이 읽어도 좋겠다. 아릿한 연애소설이지만, 선이 굵은 남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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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6-05-16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순원 작가 좋아하는데 쑥님 리뷰 보니 꼭 읽어봐야겠군요!

2016-05-16 21:41   좋아요 0 | URL
네 전 참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

2016-05-16 2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6 2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6-05-16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세~~ 청소년 아들을 둔 엄마의 필독서죠!^^

2016-05-16 21:42   좋아요 0 | URL
네 ㅎㅎㅎ 엄마의 필독서 맞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