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의 발견이라면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다. 수개월전 <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삼분의 일쯤 읽고 반납하면서 별 미련을 두지 않았다. (선생님은 일독을 한다는 것은 두 번 읽을지 말지를 가늠하는 것이라고.)  결국 두 번 읽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기대감 없이 다시 펴든 책이 이렇게 재밌다니! 몇 개월의 차이지만 책과의 인연도 타이밍이 있다고 느낀다. 비슷한 경위로 몇 번 들었다 놓았던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도 기대된다.

"앨리스 먼로는 단편소설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대부분의 장편소설 작가들이 평생을 공들여 이룩하는 작품의 깊이와 지혜와 정밀성을 매 작품마다 성취해 냈다. 앨리스 먼로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예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반드시 깨닫게 된다." -2009년 <맨부커상> 선정 경위 중에서

 열여섯 편의 단편 중에서 앞의 세 편을 제외하곤 무작위로 대여섯 작품을 펼쳐 읽고, 마지막 두 작품을 읽고 나머지는 아껴두었다. 단편 중에서도 짧은 단편들이라 한 편 한 편의 감흥을 좀 더 즐기고 싶어서다. 중고서점 갔다가 눈에 띈 <디어 라이프>를 사두길 잘했다.

또 어제 강의를 듣던 중 `처음 읽을 때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나를 보는 것이라면 두 번째 읽을 때는 어떻게 씌여졌나를 보는 것`이라는 말이 와 닿았는데, 먼로의 인터뷰 중 이런 부분과 통한다. ˝저는 독자들이 ‘일어난 일’에 대해서가 아니라, ‘일어나는 방식’에 놀라움을 느끼기를 바랍니다˝ 아 이런 표현. 그러니까 먼로는 `순간의 진실을 포착해낸 시적 인간`이다. 고여있는 공간에 살면서 미생물이 포자를 어떻게 공기중에 퍼뜨리는 가를 직관적으로 포착하되, 현미경을 들이대고 관찰일지를 쓰듯 꾸준히 밀어 부친 사람. 하루에 일정량을 써야해서 육아기간 아이들을 잘 돌보지 못했다는 인간 적인 사람. 

 

이러구러 이번 주에 같이 읽고 있는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의 박완서 여사는 어떠한가. 먼로 여사와 완서 여사는 31년생 동갑내기이다. 먼로 여사가 고요한 호숫가에 살면서 그만그만한 일상을 포착해냈다면, 우리의 완서여사는 바닷가에 살면서 풍랑을 몹시도 겪어냈던 바 조금 더 스케일이 있는 서사를 구현할 수 밖에 없었던 운명을 타고 났다.

 

 

아, 나는 이 이야기를 박완서 여사보다 반세기 먼저 태어나 살다 죽은 버지니아 울프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울프는 여성은 모든 시대를 통해 번번이 그 재능을 좌절당해오기만 했다고 분노하며 "만일 셰익스피어에게 오빠와 똑같은 재주를 가진 누이동생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녀는 오빠만큼 위대한 작품을 남길 수 있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그녀는 사회의 제약과 여러 가지 여성에 부과된 의무들 - 가령 양말이나 깁고 국이나 끓이는 일상의 덫-에 갇혀 재능이 질식되어버렸거나, 혹은 반항적인 마음으로 가출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결국 자살해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케임브리지 대학의 여학생들에게 강연했다.

 

자, 나는 버지니아 울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여기, 동양의 한국에 한 여류 작가가 있는데 그녀는 여성으로서의 자기 의무(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집안의 주부로서의 의무)를 회피하지도 않고, 또 그것에 억압되지도 않으며, 그런 일을 모두 잘해나가면서도 왕성한 을 하고 있고, 또한 지금까지 여성을 억압해오기만 했던 사회를 향해 오히려 '다정한 회초리'까지 들고 있다고 그리고 그녀는 '여류 작가이기 때문에 느끼는 한계란 거의 없다'고 말하고 있다. 26쪽

 

물론 이 인용문의 앞에는 완서여사의 인터뷰가 실려있다. 그걸 옮기진 않겠다. 힌트를 주자면 좀 넘 멋지심이다. 이 인터뷰어인 승희여사님은 내가 대학시절 그토록 끼고 다니며 애정해 마지않던 <태양미사>, <달걀 속의 생>의 시인 김승희이다. 서강대에 한 번 찾아가 볼까, 청강이라도 하고 싶다고 염원해 마지 않던 그 분. 하지만, 나는 저 마지막 단락에 대해서 만큼은 유감을 표한다. 어머니, 아내, 주부로서의 역할이 있다면, 그리고 의무가 있다면 그것은 여성으로서의 의무가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의무, 인간으로서의 의무다. 여성이기에 져야 하는 의무는 없다. 역할에 대한 의무는 있을지 몰라도. 더 본질적으로 말하면, 의무 같은 것은 없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한계가 없다라고 말한 부분도 한계를 이미 받아들여서 그것을 한계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한계가 없었다면 완서여사님은 스무살에 등단하지 않았겠나. 그래서 19년생 도리스 레싱 여사님이 애 버려두고 글만 썼다 비슷한 이야기, 일생동안 일체의 가정사를 거부했다는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얘기를 들을라치면 그냥 좋은 것이다. 이게 인간적인 것이지, 육아도 잘하고 살림도 잘하고 글도 잘 쓰고는 환타지다. 아 또 사소한 것에 핏대 올릴려고 한다. 그냥 좀 불편했다. 여성의 의무 이런 표현. 마지막으로 또 한 명의 걸출한 31년생 토니 모리슨은 이런 말을 했다. 많이 불편하다.

 

" 당신이 정말로 읽고 싶은 책이 있는데 아직 그런 책이 없다면 당신이 직접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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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6-02-18 05:30   좋아요 0 | URL
이 아침 쑥님의 글을 읽으며 흐뭇해하고 있어요. 쑥님과 마치 대화한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제게 말을 걸어주시는 것 같아요.
걸출한 여성 작가들, 모두 멋지다는 생각...그걸 얘기해주시는 쑥님도 멋져요!

2016-02-18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낭자 2016-02-18 11:32   좋아요 1 | URL
꼬박꼬박 `여류`작가 운운하는 이가 여성의 의무 어쩌구 하는 소리는 그냥 웃기지도 않네요. 자기가 무슨 소릴 하는지 아무 생각이 없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