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과 황홀 - 성석제의 음식 이야기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성석제의 음식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칼과 황홀>. 꽂아 두고 늘 힐끔거리며 '저 책 재밌었지'하며 속으로 뇌까린다. 그래도 정작 어떤 내용이었지?하면 잘 생각나지 않아서 언젠가 한 번은 다시라는 마음으로 보다가, 오늘은 문득 꺼내서 아무데나 펼쳐든다.

 

금방 음식이 나왔다. 밥 한 그릇, 미소장국, 김, 우메보시, 계란 반숙, 그리고 길쭉한 청어 한 마리였다. 먼저 국을 들여마시고 밥을 입에 넣었다. 일본인의 습속에 따라 그릇을 들고 먹어야 되나 하다가 무시해버렸다. 밥알을 입에 문 채 청어 껍질을 벗기다가 귀찮아서 뼈만 바르고 4분의 1정도 되는 큼직한 토막을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입에서 기다리던 밥알이 청어를 마중 나왔다. 탄수화물은 달았고 청어 껍질 속의 지방은 입에 녹아들어 고소한 맛을 냈다. 청어를 구울 때 뿌린 소금이 단백질과 미네랄의 맛을 힘차게 끌어냈다. p 46

 

'청어의 봄'이란 산문 속의 일부분이다. 이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20대에 막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 어느 일본이 시인이 쓴 시를 읽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제목은 '봄', 내용은 단 한 문장이었다.

 

  청어 한 마리가

  지하철을 타고

  식탁으로 오고 있다

 

 형식으로 보면 현대식 하이쿠 같지만 그때만 해도 그런 게 있다는 것을 잘 몰랐으므로이 시는 사전 지식이나 해설 없이 난데없이 주어진 화두 같았다. 시가 이럴 수도 있구나 하는, 모르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강렬한 감흥이 느껴졌다.

 

작가는 20대 문학청년 시절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일본 규슈 지방을 여행했을 때의 경험, 그리고 할아버지의 추억으로 한 편의 산문을 완성한다. 기억의 실타레를 엮어내는 솜씨와 간명한 문장이 돋보이는 글이다. '입에서 기다리던 밥알이 청어를 마중나왔다'지 않는가...

 

이 책을 떠올렸을 때 가장 기억에 남던 장면이 작가가 어느 식당에서 여종업원을 집요하게 꾸짖어 울리는? 부분이었는데, 마침 그 장면이 다시 읽어졌다. 시골의 어느 중국집에서 냉면을 시켰는데 정체불명의 음식이 나온 에피소드이다.

 

"나는 냉면을 먹지 않았지만, 돈은 낼 겁니다. 그렇지만 먹지 않은 냉면 값을 내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죠. 다른 음식이라고 하면 그 값을 낼게요. 짜장면은 아니고 짬뽕도 아니고 울면도 아니고 기스면도 아닌데, 면은 면 같은데, 뭐예요, 이 면의 이름?"

 

종업원은 울기 시작했다. 동행이 너무한다는 뜻이 담긴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지갑을 꺼내 짜장면 두 그릇 값에 해당하는 돈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종업원은 "안 받습니다, 안 받아요, 돈 가지고 가세요"하면서 계속 울었다. 나는 " 아, 또 나만 나쁜 놈 됐네" 하면서 나오다가 젊고 잘 생긴 남자가 커다란 식칼을 들고 앉아서 양파를 다듬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이 글의 제목은 '아가씨들, 미안해요!'이다. 제목으로 유추가 가능하듯이 이 에피소드의 앞에서 작가는 또 한 명의 아가씨를 울린다. 겉으로 보기에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의 작가인데 집요하고 예민한 구석이 있는 사람인가 보았다. 기억의 회로에서 꺼내는 토막 이야기들이 사뭇 괴짜스러운 성격들을 보여주는데, 장면 장면들이 피식피식 실소를 터뜨리게 한다. 이런 부분은 작가도 인정하고 반성하는 의미로 썼다고 실토한다. 특히 아가씨들을 울린 일들은 평생을 두고 후회하고 있다고..

 

350쪽에 달하는 음식이야기를 쓴 작가가 청년시절까지 고기를 입에도 안 댔다거나, 하카타의 돼지뼈 육수 냄새에 질려 포장마차 촌을 포기하고 청어정식을 먹은 일화들이 평범하지 않은 작가의 음식 취향들을 보여준다. 그런 일반적이지 않은? 음식 취향을 가진 작가가 풀어내는 음식이야기들이라 더 감칠맛이 나는 글이 되었다고 할까. 곳곳에 반전적 요소가 있다.

 

 나는 문득 이 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한때임을 깨달았다. 귀한 줄 모르고 쉽게 흘려보냈던 시간, 사람들이 연상되면서 가슴이 아려왔다. 턱을 괴고 바라보는 바깥의 어둠은 매끄러운 듯 아름다웠다. p296

 

이 글은 '어떤 저녁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의 부분이다. 나는 문득 이런 글을 읽으며 에세이들은 내용을 읽는 것이 아니라 정서를 읽는 것이구나 한다. 문득 이런 시간 이런 느낌을 가져 보지 못한 사람들이 단순히 글을 읽는다고 해서 그런 정서에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날 잠시 그저그런 시간처럼 흘려보낸 어떤 순간들이, 사람들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 이런 글들에게서 위로를 공감을 얻는 것은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베를린의 동네 명가수'에는 이런 부분이 나온다.

 

흔한 필스너 비어인 생맥주와 달리 밀과 보리를 섞어 발효시킨 바이젠 맥주로 거품이 많고 향이 풍부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거기다 맥주를 병입할 때 여과를 하지 않아 효모와 부유물질 때문에 뿌연 색깔을 한 헤페 바이젠과 대조되는 깨끗하게 여과한 크리스탈 바이젠이었다. p241

 

또 '품격있는 술꾼' 에는 이런 부분이 나오기도 한다.

 

 특히 무엇이든 시작했다 하면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퍼부어 끝장을 보고야 마는 한민족의 성격 때문인지 싱글몰트 중에서도 물을 섞거나 여과하지 않고 숙성통에서 병으로 직행시킨 '캐스크 스트렝스'의 찬미자가 많아지고 있다. 캐스크 스트렝스는 알코올 도수가 58~63도에 이르고 당연히 비싸다. 그 외에도 하일랜드, 로우랜드, 캠블타운, 스테이사이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싱클몰트 위스키인 글렌피딕, 글렌피딕보다 더 비싼 매캘란 등등으로 이야기가 뻗다가 아일레이에서 우리 두 사람은 구름에서 내렸다.p267

 

아무 것도 하기 싫을 때, 아무렇게나 아무 데나 펼쳐 읽어도, 공부도 되고^^ 그냥 웃음 지을 수도 있는 잘 읽히는 산문집이다. (그의 감각과 재치를 닮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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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04-24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품격 있는 술꾼`을 보니 제가 아는 한 분이 생각납니다. 취미가 위스키 수집인데요... 집 찬장에 거의 그랜져 한대 값의 위스키가 보관되어 있구요....위스키 제조공장 위치가 표시되어 있는 커다란 영국 및 아일랜드 지도를 품에 품고 다니시죠..ㅎㅎㅎㅎ

그런데 그분은 사실 술은 거의 못하세요..ㅎㅎㅎ. 그래도 위스키는 조금씩 음미하며 드시는 듯...

2015-06-09 11: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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