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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야기 ㅣ 찔레꽃 울타리
질 바클렘 지음, 이연향 옮김 / 마루벌 / 199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가을 산엔 열매가 주인이다. 찔레 열매의 붉은 빛에는, 꽃이라 이름 붙은 국화와 마타리도 명함 못 내민다는... 나무 딸기의 색감은 또 어떤가. 보랏빛을 품은 그 깊고 그윽한 검은 빛은 향내마저 감미롭다. 표지 한가득 나무 딸기 넝쿨이 얼커러진 찔레꽃 울타리의 ‘가을 이야기’는 들쥐 마을의 귀염둥이 앵초가 잠시 길을 잃었던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다.
질 바클렘의 그림, 그 귀엽고 아기자기함이란! 섬세하면서도 생략의 묘를 살린 넉넉함,,색감의 자연스러움..찔레열매와 돌능금나무, 버섯과 각종 열매들 잼 병으로 가득 찬 마타리의 집안 풍경, 예쁜 퀼트 소품들이 앙증맞은 들쥐 부부의 집..가을의 식물들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작가의 치밀한 속내를 들여다 보는 듯하다.
찔레 열매가 한 가득인 페이지를 넘기면 가을 햇살에 알뜰히 영글어가는 돌능금의 주황빛이 수줍고, 메꽃과 이질풀, 고개 숙인 밀 이삭이...또 페이지를 넘기면 가을산의 또 하나의 주역 버섯..동물들이 겨울을 날 수 있는 땅 속 동굴이 펼쳐져 있다.
이야기의 초반부는 열매를 수확하고 저장음식을 마련하는 부산스러움을 통해 풍요의 이미지를, 이야기의 후반부는 길 잃는 앵초의 마음을 대변하듯 초록의 에너지가 사라진 숲 속의 스산함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책을 읽다보면 가을이라는 계절이 주는 이미지가 마음에 자연스럽게 스며온다. 이렇듯 가을은 풍요로움과 쇠락의 기운을 함께 품고 있는 계절이다. 극과 극을 품고 있는 그 여유로움은 사람을 충만하게도 하지만 쓸쓸하게도 만든다.
하지만 마지막의 따듯한 김이 나오는 도토리죽을 보면, 가을이 주는 쓸쓸함은 어느새 저만치 도망가고 없다. 이번 가을엔 아이들과 도토리를 몇 개만^^ 주워서 죽을 한 번 만들어 보고 싶다. 들쥐네처럼 포근한 퀼트 주전자 덮개를 만들어 씌우고, 자랑겸 이웃을 청해 도란도란 차 나누는 그런 재미를 느끼고도 싶다. 돌고 돌아가는 세월과 자연의 이치가 마음 속으로 걸어 들어 오는 책. 계절을 느끼고 사는 것을 감사하게 만드는 책. 소박함이 행복으로 느껴지는 고마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