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근대인의 자유의 이행으로서의 자유정조

 

인간의 이성이 대면하는 (관계 범주의) 이율배반이 자유의 원인성이 있는 희망의 세계로 열려 있다는 칸트의 인과율개념은 동아시아 근대지성인 한용운의 시적 사유에 의해 사랑의 열도(熱度)를 획득했다.

이러한 (관계범주의) 이율배반을 대면하는 근대적 개인은 당신이 지금의 이별을 영원(永遠)히 깨치지 않는다 하여도 당신의 최후(最後)의 접촉(接觸)을 받은 나의 입술을 다른 남자(男子)의 입술에 대일 수는 없습니다.”고 말할 때의 고독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정미라는 데카르트나 칸트가 자신을 절대적인 존재로 정립하는 고독한 주체의 사유 속에서 주관주의적이며 자율적인 능력만을 감지해냄으로써 주체를 모든 타자와의 관계로부터 단절된 고독한 개별적 자아로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고독은 량치차오와 한용운에 의해서도 이미 주목되고 있던 문제이다. 이 문제를 당시 량치차오가 해결하는 방식을 먼저 검토해 보자. 량치차오는 칸트가 성리학보다 낫지만 불교만은 못하다는 논지를 이렇게 제시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진여는 일체의 중생이 공유하는 본체로서, 한 사람이 각자의 개별적 진여를 갖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칸트는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진아를 갖는다고 말하며, 이 점에서 불교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한 명의 중생이라도 성불하지 못하면 나도 성불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이는 본체가 단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교는 보편적 구원의 정신이 심원하고 간곡하다. 칸트는 우리가 진정으로 선한 사람이고자 한다면 곧 선한 사람이 되며, 이는 본체의 자유로움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수양의 의미가 더욱 실질적이며 쉽게 진입할 수 있다.”

 

량치차오는 진아의 고독을 보편적 구원의 문제로 해결한다. 이는 칸트 이후 근대 사상의 흐름에서 가능한 중국적 사유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량치차오는 개별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한 보편으로서 진여를 통해 칸트 이후 형성된 독일 관념론에 조응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량치차오가 말하는 진여헤겔이 말하는 절대정신처럼 그것은 세계가 작동하는 법칙이면서 또한 주관이다.”

한편 한용운은 량치차오와 또 다른 사유의 결을 보여준다. 량치차오가 진아=진여의 헤겔화를 경유해서 국가주의에 빠져든 것과 달리 한용운은 불교적 사상에서 상즉상리의 원리를 가져와 진아=진여의 국가주의는 거부하고서도 진여와의 관계가 가능함을 주장한다.

 

양계초가 부처님과 칸트의 다른 점에 언급한 것을 보건대 반드시 모두가 타당하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왜 그런가. 부처님은 천상천하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 하셨는데 이것은 사람마다 각각 한 개의 자유스러운 진정한 자아를 지니고 있음을 밝히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진정한 자아와 각자가 개별적으로 지닌 진정한 자아에 대해 미흡함이 없이 언급하셨으나, 다만 칸트의 경우는 개별적인 그것에만 생각이 미쳤고 만인에게 보편적으로 공통되는 진정한 자아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못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부처님의 철리(哲理)가 훨씬 넓음을 알 수 있다./부처님이 성불했으면서도 중생 탓으로 성불하시지 못한다면 중생이 되어 있으면서 부처님 때문에 중생이 될 수 없음이 명백하다. 왜 그런가.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셋이면서 기실은 하나인데, 누구는 부처가 되고 누구는 중생이 되겠는가. 이는 소위 상즉상리(相卽相離)의 관계여서 하나가 곧 만, 만이 곧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부처라 하고 중생이라 하여 그 사이에 한계를 긋는다는 것은 다만 공중의 꽃이나 제 이()의 달과도 같아 기실 무의미할 뿐이다.”

 

위의 인용에서 보듯이 한용운은 량치차오와 달리 칸트가 물자체는 알 수 없다고 한 것을 완전히 거부하지 않는다. ‘진아=진여(물자체)’는 성립하지 않지만 진아와 진여는 상즉상리의 원리에 기반해 일정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를 통해서 한용운은 량치차오와 달리 칸트가 자유의 원인성이 지켜지는 예지계를 주장할 때 발생한 근대인의 고독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위안을 줄 수 있었다. 칸트의 고독을 해소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그 자체로 칸트 이후 지성사의 보편적 흐름에 동아시아적인 고유성을 기입하고 있었다.

진여와의 상즉상리의 관계에 대한 한용운의 가르침은 1920년대의 근대 청년에게는 일정한 동시대성을 갖고 있었다. ‘미래를 종교로 삼은 전위주의 진여의 신앙은 현재에 대한 충실성을 가능하게 하는 희망을 내장한다는 점에서 칸트 이후의 고독에 위안을 제공한 것이다.

이러한 사정에 대해서 임화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렇다고 또한 내어다 볼 수 있는 미래의 길에 나타난다면 용이하게 시인은 그리로 향하여 질주할수있는 것이다. 우리 조선의 모더니즘은 비록 관념우에서 일망정 다행히도 그러한 길을 가지고 있던 예술이다. 감성의 활발한 도약은 현대에대한 비평의 정신으로 능히통어할수 있었을지 모르며 또한 반대로 그러한 정신이 감성의 활발한 도약에 원천이었을지도 모른다.”

 

위의 인용에서 임화는 자신의 청년 시대를 내어다 볼 수 있는 미래의 길을 믿고 그리로 향하여 질주할수있었던 시대로 회고하고 있다.

한용운의 상즉상리의 가르침은 1920년대 연애의 시대와 다른 근대성의 층위에서 작동하고 있었으며 이는 님의 침묵의 시적 사유의 중핵을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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