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칸트적인 인과율 개념과 한용운의 시 「인과율」이 만나는 지점을 제시하여 한용운이 대면한 근대의 이율배반을 드러내겠다. 먼저 인과율에 대한 일반적인 분류에 따르면 인과 이론은 발생인과론과 계기인과론으로 나눌 수 있다. 발생 인과론에서는 원인은 결과를 발생하게 하는 능력으로 간주되며, 원인은 그 결과와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계기 인과론은 원인이 어떤 사건이나 상태의 앞에 오는 것으로서 우리가 그 뒤에 그런 종류의 결과가 오리라고 기대하는 심리적 경향을 획득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원인이라고 단지 불려진다고 본다. 따라서 발생인과론은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사건이나 상태들 사이의 관계는 그것 안에 내재해 있고, 원인과 결과는 서로 독립적이 아니며 결과는 원인없이 일어날 수 없는 데 비해 계기인과론은 인과관계를 그 관계를 맺고 있는 원인과 결과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본다. 계기인과론의 관점에 따르면 원인과 결과의 결합이라는 사건은 원인과 결과라고 불리우는 사건을 아무리 분석해도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비슷한 사건을 반복적으로 관찰한 후 생기는 일종의 정신적인 습관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한용운의 「인과율」에 대한 선행연구는 ‘인과율=불교=동아시아 문화 일반이 지닌 전통’이 ‘지나간 업보에 따른 결과는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의 나의 행동에 따라 얼마든지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보는 한 ‘발생 인과율’에 부합하는 해석이다. 하지만 흄과 함께 칸트 철학은 ‘계기 인과론’에 기반하고 있다.
이제 칸트 철학이 계기 인과론에 근거한다는 점을 환기하면서 이 개념이 순수이성의 이율배반에서 맡은 역할을 파악해 보자. 칸트는 변증론에서 순수한 이성이 네 개의 범주-양,질,관계,양상-에서 완전성의 이념에까지 사고를 계속해 감으로써 부딪치게 된 네가지 이율배반을 다룬다. 여기서 양, 질 범주에 따른 이율배반을 ‘수학적’이라 하고 관계, 양태 범주에 따른 이율배반을 역학적이라고 한다. 칸트는 수학적 이율배반이 형이상학적 우주론으로 성립할 수 없다고 본다. 그 대신 역학적 이율배반은 서로 이율배반이 되는 정립과 반정립이 각각 이종적인 세계에 대해서 타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 경우 정립과 반정립은 일정한 관점에서는 다 같이 참일 수 있는 것이다. 칸트는 이에 정립은 사물 자체의 세계, 곧 예지의 세계에 대해 타당할 수 있고, 반정립은 현상의 세계, 곧 감성의 세계에 대해 타당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인과율은 역학적 이율배반의 관계 범주에서 확인된다.
관계 범주에서 이성은 ‘현상의 발생의 절대적 완벽성’을 생각하고 그때 이성은 이율배반에 부딪친다. 이를 정립과 반정립으로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정립: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인과성은, 그로부터 세계의 현상들이 모두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아니다.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유에 의한 인과성 또한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
반정립:자유는 없다. 오히려 세계에서 모든 것은 오로지 자연법칙들에 따라서 일어난다.
칸트에 따르면 자유란 자연 경험 중에는 있을 수 없는, 기껏해야 공허한 사고의 산물일 따름이다. 그러니까 세계가 오로지 감성의 세계인 자연뿐이라면, 그 안에 ‘자유’가 있을 자리는 없다. 그러나 생각 가능한 세계, 곧 예지의 세계에서라면 자유의 원인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칸트는 이러한 방식으로 자유의 개념을 구출하여 도덕의 세계가 가능한 ‘희망의 세계’를 열고자 했다.
이처럼 인과율은 칸트의 이율배반 개념에서 형이상학이 불가능한 근대를 ‘희망의 세계’로 이끌기 위해 핵심적인 중요성을 갖는데 이는 한용운이 주목한 무명과 진아의 구분과 연결된다. 한용운이 ‘근대 사상으로서 불교’의 인과율에 대한 한용운의 사유는 시 「인과율」에서 그 단초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인과율」은 사랑의 감정을 다루고 있다. 사랑은 무명(에 빠진 중생)이 휘둘리는 감정을 대표한다. 칸트는 사랑과 같은 감정을 경향성(Neigung:기울어지는 성질,성향, 애착) 개념으로 다루었다. 칸트에 따르면 ‘감정’은 시간 속에서 유동적으로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철학의 대상이 아니다.
무명의 사랑은 감정인 이상 “옛 맹세”를 통해 영원성을 얻지 못한다. 인간의 이성은 관계 범주에서 ‘현상의 발생의 절대적 완벽성’을 생각할 때 이율배반에 빠지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아는 예지의 세계에서 자유의 원인성에 의해 영원불멸을 이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논문은 한용운의 인과율을 “동아시아 문화 일반이 지닌 전통”의 원리(이선이), 혹은 전통적인 불교 교리 이해(남정희)로 해명하기보다는 량치차오-칸트를 경유한 ‘사상으로서의 불교’로 보려 한다. 한용운의 시에서 표상되는 사랑의 갈등은 무명과 진아로 분할된 근대인이 대면해야 하는 역학적 이율배반을 감각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한용운의 시 「인과율」은 역학적 이율배반과 관련한 개념적 사고를 ‘자유로운 유희 속에 있는 상상력과 지성간의 조화로운 관계’로 표현한 것이었다. 현상계에서 “당신은 옛맹세를 깨치고 가”고 있다. 현상계의 인간인 ‘무명’은 자유의 원인성이 아니라 경향성에 휘둘리는 감정을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지계에서 옛맹세는 자유의 원인성에 따라 지켜질 수 있다. 따라서 시적 자아는 인간 이성의 역학적 이율배반을 대면하면서 무명을 따르지 않고 진아를 따르는 선택을 “당신의 최후의 접촉을 받은 나의 입술을 다른 남자의 입술에 대일 수는 없습니다”라는 싯구와 같이 감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인과율」의 시적 원리는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에서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는 절창으로 이어지고 있다. 더 나아가서 「인과율」의 시적 원리는 『님의 침묵』에 대한 전반적인 해석의 실마리인 ‘자유’의 비밀을 함축한다. 가령 「군말」에서 제시되고 있는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라는 테제는 자유 연애에 대한 단순한 반명제가 아니라 자유 연애의 이율배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 제기를 통해 무명의 사랑에 대한 초월, 반성이 가능하다면 인간의 이성은 자유의 원인성이 있는 예지계를 열어제칠 수 있다는 시적 사유가 1920년대의 한용운에 의해서 주어지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