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침묵에 수록된 한용운의 시를 사랑시로 읽을 때 이 시들은 근대적 사랑의 실제와 한계를 현시한다. 1920년대는 소위 연애의 시대였는데 당시 연애는 오늘날의 남녀간의 사랑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한국어에서 사랑하다는 원래 생각하다는 뜻이었지만 그다지 자주 쓰이는 표현은 아니었다. 기독교의 전래이후 사랑은 신의 사랑이라는 뜻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고, 신에 대한 사랑과 비슷한 용례로 국가에 대한 사랑이 함께 쓰이기도 했다. Love의 번역어로서 사랑이 남녀의 사랑으로 쓰이게 되는 것은 1920년대로 보인다. 하지만 1920년대에는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 사랑이 아니라 남녀간의 사랑에 한정한 연애가 더 많이 쓰였다. 근대전환기 근대적 개인의 출현은 사랑(연애)이라는 화두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연애는 인생 최고의 선이요 미이며 예술이라는 진술이나 아아 강렬한 자극 속에 살고 싶다는 토로가 보여주듯이 근대 문학은 사랑의 움직임에 대한 문서고이다. 본고는 이러한 문서고에서 한국 근대시사의 주류적 경향에 거스르는 사랑시로 한용운의 시를 살펴보겠다

(중략)

이번 논문은 한용운이 최초의 근대 청년인 동시에 1920년대 연애의 시대에 기성 세대의 대표성을 갖고 있었음에 주목한다. 소위 세대론에 기대면 왕년의 청년이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 어떤 갈등이 야기되는지 예단하게 되기 쉽다. 하지만 한용운은 근대성의 복합적인 측면의 중요한 일부를 견지하면서도 새로운 청년 문화와 대화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은 어른이었다.

이번 논문은 한용운의 시 인과율자유연애를 매개로 하여 이러한 대화의 성과를 밝히고자 한다.

.2장 근대인이 대면한 이율배반으로서의 인과율

 

근대전환기 청년 지성으로서 한용운의 진보적인 태도는 당대에는 가장 선진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님의 침묵이 나온 1920년대에 한용운은 40대의 기성세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20년대의 문화 청년들에 비해 보수적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근래의 문화사적 연구는 이러한 상식적 추정에 근접하는 해석을 보여준다.

선행연구에 따르면 1910년대 중반에서 1920년대까지는 우리 사회에서 자유연애에 관한 담론이 가장 활발하게 제기된 시기이며 자유연애 담론과 근대적 독자층의 형성은 님의 침묵이 집필되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한용운의 문학활동은 자유연애론에 대한 반명제라는 각도에서 조명할 수 있다는 것은 근래의 문화사적 해석을 대표한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는 연애와 결혼 특히 자유연애와 자유결혼 그리고 자유이혼을 근대적으로 학습해야 할 내용으로 인식했다. 근대적 사랑은 다른 어떤 기준에도 의존하지 않는 열정을 요청하며 이러한 열정이 근대적 주체를 탄생시킬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용운의 문학활동을 자유연애론에 대한 반명제라는 각도에서 조명할 때 관건은 평생토록 그 사랑을 지속할 수 있는지 여부에 있으며 이것은 한용운의 시가 근대적인 개인의 상호적인 계약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자유연애의 이상보다는 전통적인 반려애와 유사하다는 다음의 비판으로 연결된다. 한용운은 전통적인 사랑의 정서와 새롭게 유입된 사랑의 방식을 접목시켜 우리 나름의 근대적 사랑의 윤리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시도로서의 의미는 컸지만, 그 귀결점은 전통적인 반려애에서 느낄 수 있는 사랑의 형식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문화사 연구의 흐름 속에서 인과율은 구체적인 비판점을 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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