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5
박규태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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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야스쿠니 신사에 많은 참배객들이 몰렸다고 한다. 이차대전 때 전사한 이들을 신으로 모시고 있는 그곳에 그들의 패전 기념일,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광복절 주간인 8월에 참배객들이 모이는 것은 굉장히 씁쓸하다. 거기다 간간히 신문이나 뉴스에서 들려 오는, 재일한국인에 대한 명시적 폭력이나 우경화는 혹 군국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지내는 예의 바르고 선한 몇몇 일본인들과 현대를 디스토피아로 보고 앞으로 다가올 아이들의 세상에 부디 평화가 있기를 바라는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이들을 볼 때, 일본이라는 나라는 내게 모순으로 가득 찬 기묘한 곳으로 보인다. 이 책, <아마테라스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에서 저자는 일본의 창세신화에서 얼마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옴 진리교 사건까지, 일본의 종교사를 훑어 나가며 그 기묘함이 어디에서 오는지 밝히려 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밝혀낸, 그리고 내가 느끼는 기묘함의 원천은 그들이 갖고 있는 독특한 선악의 역설과 어령(御靈) 신앙, 그리고 원령(怨靈)에 대한 관념이다. 산천초목에서 한낱 미물에 이르기까지 신이 깃들어 있고, 그 신에는 나쁜 신도 좋은 신도 있으며, 나쁜 신이 좋은 신이 되기도 하고 그 반대로 변하기도 한다는 생각, 그리고 그에 따라 깃들어 있는 신이 우리 인간에게 해악을 미칠 수도 있으리란 두려움이 그것이다.

여기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선한 일본인’에 대한 의문이 약간 풀릴 수 있을 것도 같다. 어쨌든 편히 죽지 못한 원혼들을 달래 주어야 한다는 거다.(비록 선신과 악신을 구분하는 문화에서 자란 나로서는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또 우경화하는 일본에서,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에는 분명 정치적인 의도도 개입되어 있을 것이므로.)

그러나 부정한 것은 씻어내어 되돌릴 수 있고, 반대로 더러움이 타면 부정한 것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는, 악신에서 선신으로, 선신으로 악신으로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상대적인 선악관에서 저자는 일본인의 문화적 관용과 그 반대편에 폭력으로 화해 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본다. 초탈함을 이상으로 했던 옴 진리교가 선악의 역설이란 논리를 통해 곧바로 폭력을 정당화하게 되고, 결국 폭력이 되어 버린 것이 그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태평양 전쟁 때 일본이 자신을 합리화했던 대동아주의의 그림자를 보았다. 자신들이 품고 있는 이상,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옳은 것이라는 확신하에 어느 정도의 폭력은 대의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도 있다는 논리적 정당화. 여기서 너그러움과 폭력은 위태한 경계에 서게 된다. 그리고 오늘날 그 경계를 넘어서 버리게 하는 것은, 중립을 가장해 쏟아지는 정보들과 그것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 버리는 성찰하지 않는 개개인들이다. 그러나 이것이 다만 개개인으로서는 선한 일본인들이 어째서 야스쿠니 신사 같은 데를 가는 걸까라는 의문에만 한정되는 것일까.

이 책을 읽어 가면서, 나는 한 사회의 정신문화에서 기저를 이루는 종교를 통해 일본이라는 나라를 살펴보자는 저자의 의도에서 벗어나 자꾸만 내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자의적인 종교적 혹은 도덕적 판단을 통한 오독(誤讀)이 일본에만 한정되는 기묘함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까운 예로, 얼마 전에 있었던, 부시의 자의적인 선악구분을 보라. ‘그래도 살아라’라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언과, ‘모두 죽어 버리면 좋을텐데’라는 안도 히데야키의 전언이 거의 동시에 유행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 역시 이 희망과 절망의 한 가운데 서 있는 것 같다. 다만 여기서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밝은 눈으로 살피고 계속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이 책이 내게 요구하는 것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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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뢰전 가이 1
후쿠모토 노부유키 지음, 서현영 옮김 / 학산문화사(만화)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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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연속 밤잠을 줄여가며,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만화들을 다시 읽어 버렸다. 깡으로 버텨 나가기에 세상은 비정하게만 보였고, 나는 분명 지쳐 있었다. 끔찍하리 만큼 강한 무언가에 감염이라도 되어, 나를 추스르고 싶었다. 그때 떠오른 게 이 책이었다.

전작 <도박 묵시록 카이지>나 <은과 금>에서와 마찬가지로 작가 후쿠모토는 주인공을 더 이상 나쁠 데 없는 극한으로 몰고 나간다. 인간 이하의 생활을 넘어서서 아예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그곳은 정글이다. 그것도 경쟁에서 패배한 인간을 한순간의 도락 삼아 망가뜨리면서도 태연한 사람들이 지배하는, 이미 생존경쟁을 넘어서 버린 한층 잔혹한 인간들의 정글이다. 당연히 그 세계에 우리가 믿고 있는 인간의 선의, 도덕, 약속, 믿음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시련을 당하는 주인공은 오직 처절할 수밖에 없다. 어쩌겠는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인데, 사력을 다할 수밖에.

이 책의 주인공 가이가 처한 상황도 그러했다. 전작에서 도박을 통해 승부사들을 그려낸 반면, 여기서는 다만 억울한 누명을 쓴 소년이 등장할 뿐이다. 그러나 그에게 누명을 씌운 이들 역시 전작에서 보이는 정글을 지배하는 자들과 다를 바 없고, 그래서 가이가 처한 상황 또한 극한점이다. 여기서 살아나가려면 잡념을 버리고 모든 의지를 끌어모아야만 한다. 싸우려면 배수의 진을 치라고 했던가. 다만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발현체. 이 에너지가 넘쳐 흘러, 작가의 스피디한 그림체와 방백을 통해 화면 전체를 장악해나간다.

아무 데도 기댈 데 없는 후쿠모토의 주인공들은 그렇게 초인이 된다. 홀로 그 정글의 사자와 대적해 결국은 그를 쓰러뜨린다. 사자들은 힘을 잃고, 주인공을 응원하던 우리들은 환호한다. 그러나 힘을 잃은 사자들은 금새 무력한 일개 노인으로 돌아와 버린다. 허망할 정도다. 욕망과 의지를 잃어버린 패배한 승부사란. 그리고 이때가 후쿠모토의 주인공이 빛나는 순간이다. 이는 우리들이 편들어 줄 수밖에 없는 주인공의 승리여서도 아니고, 권선징악적인 안도감-사실, 가이 빼고 그의 다른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딱히 선하다고만은 할 수 없기도 하다-을 주기 때문도 아니다. 강한 의지만으로 헤쳐 나온 그 에너지에 감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에너지에 감염되고 싶었다.

후쿠모토의 주인공들은 진정한 초인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힘은 강한 체력이나 재력이나 권력이 아니라, 내몰려 버린 사람만이 발휘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가이를 도와 일어난 사람들은, 빗속에서 몇 시간이고 세워져 있던 ‘인간학교’의 무력한 개인들이었다. 나나 당신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이 비정한 세상에서 우리 무력한 개인들이 그나마 버틸 수 있게 하는 힘, 그 생명력과 의지를 작가는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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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기행 학고재 산문선 6
시바 료타로 / 학고재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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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무엇이었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시바가 답했다. “나는 마적이 되고 싶었어.”

고백하건대, 나는 그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따라갈 수 있을 거라 자만했다. 휴가를 받아 목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향하면서, 그의 <한나라 기행>과 <탐라 기행>을 읽었다. 머릿속에 그려 둔 지도에서 빨간 선이 자라나, 그가 걸었을 부여와 백제와 신라 그리고 제주를 훑어 나갔다.

그러나 그가 연북정(戀北亭)이 있는 제주의 조천리를 거닐며,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떠올리고 동행한 강재언을 통해 조선의 주자학을 돌아보는 동안, 나는 나대로 그곳에 살던 친구와 중국 사신이 혈을 끊어 버려 인물이 나지 않고 신의 노여움으로 바람이 몹시 불어 배를 띄우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있는 종달리 마을을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그의 꿈을 오해했는지도 모른다. 땅으로 이어져 있는 대륙을 여기저기 내달리고 싶었다는 뜻 정도로 믿어 버렸다.

그를 따라가 봐야겠다는 계획은 결국 실패했다. ‘가도(街道)를 가다’라는 마흔한 권의 여행기 시리즈 중 한 권이었지만, 가이드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한나라 기행’에서 한국이라 하지 않고 굳이 ‘한나라’라고 칭함으로써, 구체적인 외국을 말하지 않고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보려고 했던 것처럼. 이 책에서 시바가 밟아 온 제주도의 길들은 강재언 씨를 비롯해 그가 만나온 제주도 사람들 이야기로 시작해, 그가 자라온 일본의 역사와 한국의 역사를 비추고 있다. 내가 제주의 길을 걸으며 시바와 내 나름의 기억에 의지했던 것처럼...

관광이 아닌,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의 체험과 기억을 총동원해 낯선 곳을 익숙한 곳으로 만들고, 자신과 그 낯선 곳의 사람들을 연결지음으로써 자신만의 기억을 또 하나 만들어내는 것이다. 시바가 ‘마적이 되고 싶었다’라고 말한 것은, 다만 좀더 많은 곳을 돌아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만남을 소중히 할 줄 아는 일기일회(一期一會)의 습속을 지닌 유목민적 삶을 살고 싶었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한라산을 따라 오르면서, 처음에는 십여 년 전 그가 이 산을 오르며 본 몽골의 초원을 나도 보려고 했다. 그러나 운동부족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아픔과 떨리는 근육에 힘을 주어 버티게 한 것은, 한라산 정상에 펼쳐질 그가 말한 초원에 대한 기대가 아니었다. 오르락내리락 완급이 있는 산의 구름 너머에 무엇이 나타날지 보고 싶어 미칠 것 같던 그 호기심, 상상력이었다. 시바로 하여금 제주와 한나라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 것도 이런 감정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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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天葬)
박하선 글, 사진 / 커뮤니케이션즈와우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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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의 어느 일요일 아침, '도전지구탐험대'에서 그들을 보았다. 시신의 뼈마디와 살점을 잘게 자르고 있는 천장사의 모습과 그것을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배우 조재현의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일요일 아침 서울의 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늦은 아침을 차려 먹고, 지하철을 타고, 밖에 나가 친구를 만날 그 일요일에 그들이 찾아왔다.

작년 겨울에 이 책을 우연히 얻어 보게 되었다. 손에 먹이 묻어날 것 같은 검은색의 비릿한 책이다. 사진 속에 텔레비전 화면 속의 그 천장사가 여전히 시신을 수습하고 있었다. 첫장을 펼치니 한 면 가득 티벳의 하늘이 펼쳐진다. 광각렌즈를 사용한 듯, 한껏 늘어나 있는 하늘. 이 하늘로 죽은자들의 영혼이 올라가고 그들의 육신은 새들에게 보시되어 땅 위에 남긴 미련은 아낌없이 거두어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진가의 시선은 잠깐 그들이 살고 있는 티벳의 어느 마을을 부감법으로 비추어내고, 그리고 마을 사람의 얼굴로 옮겨간다.

짧은 다큐멘터리 필름처럼 사진이 천장 의식을 따라간다. 천장이 행해지기 전 사원에서 스님들이 행하는 포와 의식을 지나, 시신을 잘게 부수는 천장사의 의식이 행해진다. 사진 사이사이에 한두 장씩 끼워넣은 새까만 먹지, 하얀 여백이 마치 영화의 점프컷처럼 이 의식(儀式)의 흐름을 잘라내고, 다음에 펼쳐질 장면까지 걸렸을 시간의 흐름을 대신한다. 새까맣게 독수리떼가 뒤덮고 있는 사진을 넘어 독수리가 사라진 다음장을 펼치니 눈구멍과 뼈에 거죽이 약간 달라붙어 있는 시신이 나타난다. 서로 밀치며 부산하게 움직거렸을 독수리들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비릿한 잉크 냄새는, 천장 의식에서 나고 있었을 피내음 같다.

숨막히는 천장 의식 사이사이에 놓인 작은 사진들의 배열은 사진가의 의도일까. 아니면 편집자의 배려일까. 독수리들이 파먹고 있는 시신의 사진 옆에, 언덕에 몸을 기대고 앉은 느긋한 표정의 유족이 있다. 시신을 수습하는 천장사의 흐릿한 모습을 뒤로 한 채, 정면을 쳐다보는 소녀와 눈이 마주친다. 혹시 나는 그들을 욕되게 하고 있는 걸까. 심호흡을 하고 다음장으로 시선을 옮긴다.

셀 수 없을 만큼 널려 있는 두개골들 뒤로 독수리 한 마리가 하늘을 난다. 천장 의식이 끝났다. 다시 먹지 여백을 지나면, 살아 있는 그들의 사진이 한 장 한 장 놓여 있다. 천장사는 웃고 있고, 어머니는 아이를 업고 있고, 사람들은 무언가를 기원하며 온몸을 던져 기도를 하고 있다. 아이가 자라 다시 아이를 낳고, 지게를 진 채 언덕을 오르는 사람은 내일도 지게를 질 것이다.

내가 여전히 일요일에 늦은 아침을 먹고, 친구와 약속을 하고 집을 나서듯, 텔레비전 화면 속의 조재현이 얼굴을 찡그리며 그 의식을 견디고, 마을 사람들과 음식을 나눠 먹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여행 보고를 하는 것처럼, 그들도 자신들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천장 의식을 가운데 두고 배열되어 있는 도입부의 마을 모습과 뒷장의 사람들 모습이 이렇게 뫼비우스의 띠처럼 만나고 반복된다. 마지막 페이지의 나무가 뿌리로는 땅과 만나고 가지로는 하늘과 만나는 것처럼.

이 책 <천장>은 살아서 노동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죽어서는 다시 하늘로 돌아갈 그들과 다르지 않은 우리들 삶을 보여주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 필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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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디자인의 교감 빅터 파파넥 - 대화 02
조영식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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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는 돈을 따른다." 작년에 어느 디자인지에 실린 편집장의 글 제목이다. 한해를 마감하면서, 그는 좋은 디자인이란 그것을 가능케 하는 금전적 투자와 그것이 팔릴 시장에서만 가능한 것임을 힘주어 말했다. ‘디자이너들이여, 디자인은 상품이라네. 그래서 조악한 디자인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라구.’ 아마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무정한 클라이언트들과 냉정한 소비자 사이에서 방황하는 디자이너들에게 그는 이것을 일깨워 줘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 깡통 라디오가 하나 있다. 조개 껍질, 나일론 끈 조각 등이 얼기설기 붙어 있는 이 라디오들은 어디서도 팔지 않는다. 이 책의 주인공, 빅터 파파넥은 1960년에 인도네시아 발리에 도착했다. 당시 발리 섬은 화산폭발로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집을 잃었다. 유네스코의 개발도상국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한 파파넥은 그들에게 도움이 될 무언가를 고안해야만 했다. '만약 뉴스를 들을 수 있는 라디오가 있었다면, 이 사람들은 더 빨리 대피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가난한 원주민들의 주머니 사정에 맞을 만한 라디오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섬의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깡통을 몸체로 하고, 땅콩기름을 동력으로 사용하는 라디오를 고안해냈다. 깡통의 틈새로 보이는 지저분한 전선을 가릴 장식은, 1달러가 채 안 되는 그 라디오를 갖게 될 원주민들에게 맡겼다. 그 결과 라디오들은 개별 소유자들에 의해 '장식'이 되었고,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물건이 되었다.

이 라디오를 보고, 서방의 유명한 디자이너들은 '아름답지 않다'고 일축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오히려 그는 버리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했고, 최소비용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삶의 질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에 집중했다. 여기서 그의 디자인은 시작한다. 교육기회에서 배제된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고안한 교육방송을 수신할 수 있는 골판지 TV, 사막화하는 지역을 녹지로 되돌리고자 수십만 개의 씨앗을 싣고서 하늘을 날아오를 작은 종이 프로펠러들, 문맹도 사용할 수 있는 색과 도안을 이용한 피임약, 키가 작은 어머니를 위해 만들었던 그의 첫 디자인, 굽 높은 주방용 신발.

이렇듯 파파넥에게 디자인이란 그럴싸한 형태도, 생산공정을 절감할 수 있게 획기적으로 단순화시킨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에게 디자인이란 그것이 놓일 공동체의 삶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고안'이었다. 그래서 그의 디자인은 완제품이 아니라, 사용자가 자신의 미감에 맞춰 직접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하는 아이디어였다.

그러나 그의 디자인은 대부분 실현되지 못했다.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만, 구매력있는 소수에게 매력적인 상품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책 중간에 이미지 컷으로 오늘날 우리들이 쓰레기로 분류하여 버리는 것들-플라스틱 용기, 신문지 등-을 등에 지고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 그들이 주워간 신문지는 땔감이 되거나 벽에 발릴 것이고, 플라스틱 용기에는 무언가가 보관될 것이다. 자원의 순환주기를 몇 번이고 반복시키는 것,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소박한 경외감.

이러한 감정이나 태도는 오늘날 우리들이 기꺼이 버린 것이다. 디자인을 상품으로서, 생산자를 오직 디자이너만으로 한정지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발리 원주민들의 라디오를 기억해내자. 파파넥의 실현되지 못한 디자인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그것. 한정된 물질의 순환주기를 반복함으로써, 장애인, 문맹과 같은 소수자를 고려함으로써 이뤄낸 공평한 배분과 최대한의 이익.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종교에 가까운 경건함을 생각했다. 상품으로서의 디자인이 저 한 편에 있다면, 저자는 파파넥의 말을 빌어 누구에게도 배타적이지 않은 삶의 태도로서의 디자인을 설득력있게 전한다. 그것은 '공동선'의 추구이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감히 그 편집장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비록 시장이 협소하고, 투자가 적을지라도 우리는 나쁜 디자인을 비난할 수 있다. 왜냐하면 디자인이란 결국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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