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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뢰전 가이 1
후쿠모토 노부유키 지음, 서현영 옮김 / 학산문화사(만화) / 2000년 11월
평점 :
품절
이틀 연속 밤잠을 줄여가며,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만화들을 다시 읽어 버렸다. 깡으로 버텨 나가기에 세상은 비정하게만 보였고, 나는 분명 지쳐 있었다. 끔찍하리 만큼 강한 무언가에 감염이라도 되어, 나를 추스르고 싶었다. 그때 떠오른 게 이 책이었다.
전작 <도박 묵시록 카이지>나 <은과 금>에서와 마찬가지로 작가 후쿠모토는 주인공을 더 이상 나쁠 데 없는 극한으로 몰고 나간다. 인간 이하의 생활을 넘어서서 아예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그곳은 정글이다. 그것도 경쟁에서 패배한 인간을 한순간의 도락 삼아 망가뜨리면서도 태연한 사람들이 지배하는, 이미 생존경쟁을 넘어서 버린 한층 잔혹한 인간들의 정글이다. 당연히 그 세계에 우리가 믿고 있는 인간의 선의, 도덕, 약속, 믿음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시련을 당하는 주인공은 오직 처절할 수밖에 없다. 어쩌겠는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인데, 사력을 다할 수밖에.
이 책의 주인공 가이가 처한 상황도 그러했다. 전작에서 도박을 통해 승부사들을 그려낸 반면, 여기서는 다만 억울한 누명을 쓴 소년이 등장할 뿐이다. 그러나 그에게 누명을 씌운 이들 역시 전작에서 보이는 정글을 지배하는 자들과 다를 바 없고, 그래서 가이가 처한 상황 또한 극한점이다. 여기서 살아나가려면 잡념을 버리고 모든 의지를 끌어모아야만 한다. 싸우려면 배수의 진을 치라고 했던가. 다만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발현체. 이 에너지가 넘쳐 흘러, 작가의 스피디한 그림체와 방백을 통해 화면 전체를 장악해나간다.
아무 데도 기댈 데 없는 후쿠모토의 주인공들은 그렇게 초인이 된다. 홀로 그 정글의 사자와 대적해 결국은 그를 쓰러뜨린다. 사자들은 힘을 잃고, 주인공을 응원하던 우리들은 환호한다. 그러나 힘을 잃은 사자들은 금새 무력한 일개 노인으로 돌아와 버린다. 허망할 정도다. 욕망과 의지를 잃어버린 패배한 승부사란. 그리고 이때가 후쿠모토의 주인공이 빛나는 순간이다. 이는 우리들이 편들어 줄 수밖에 없는 주인공의 승리여서도 아니고, 권선징악적인 안도감-사실, 가이 빼고 그의 다른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딱히 선하다고만은 할 수 없기도 하다-을 주기 때문도 아니다. 강한 의지만으로 헤쳐 나온 그 에너지에 감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에너지에 감염되고 싶었다.
후쿠모토의 주인공들은 진정한 초인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힘은 강한 체력이나 재력이나 권력이 아니라, 내몰려 버린 사람만이 발휘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가이를 도와 일어난 사람들은, 빗속에서 몇 시간이고 세워져 있던 ‘인간학교’의 무력한 개인들이었다. 나나 당신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이 비정한 세상에서 우리 무력한 개인들이 그나마 버틸 수 있게 하는 힘, 그 생명력과 의지를 작가는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