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탐라기행 ㅣ 학고재 산문선 6
시바 료타로 / 학고재 / 1998년 2월
평점 :
품절
꿈이 무엇이었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시바가 답했다. “나는 마적이 되고 싶었어.”
고백하건대, 나는 그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따라갈 수 있을 거라 자만했다. 휴가를 받아 목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향하면서, 그의 <한나라 기행>과 <탐라 기행>을 읽었다. 머릿속에 그려 둔 지도에서 빨간 선이 자라나, 그가 걸었을 부여와 백제와 신라 그리고 제주를 훑어 나갔다.
그러나 그가 연북정(戀北亭)이 있는 제주의 조천리를 거닐며,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떠올리고 동행한 강재언을 통해 조선의 주자학을 돌아보는 동안, 나는 나대로 그곳에 살던 친구와 중국 사신이 혈을 끊어 버려 인물이 나지 않고 신의 노여움으로 바람이 몹시 불어 배를 띄우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있는 종달리 마을을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그의 꿈을 오해했는지도 모른다. 땅으로 이어져 있는 대륙을 여기저기 내달리고 싶었다는 뜻 정도로 믿어 버렸다.
그를 따라가 봐야겠다는 계획은 결국 실패했다. ‘가도(街道)를 가다’라는 마흔한 권의 여행기 시리즈 중 한 권이었지만, 가이드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한나라 기행’에서 한국이라 하지 않고 굳이 ‘한나라’라고 칭함으로써, 구체적인 외국을 말하지 않고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보려고 했던 것처럼. 이 책에서 시바가 밟아 온 제주도의 길들은 강재언 씨를 비롯해 그가 만나온 제주도 사람들 이야기로 시작해, 그가 자라온 일본의 역사와 한국의 역사를 비추고 있다. 내가 제주의 길을 걸으며 시바와 내 나름의 기억에 의지했던 것처럼...
관광이 아닌,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의 체험과 기억을 총동원해 낯선 곳을 익숙한 곳으로 만들고, 자신과 그 낯선 곳의 사람들을 연결지음으로써 자신만의 기억을 또 하나 만들어내는 것이다. 시바가 ‘마적이 되고 싶었다’라고 말한 것은, 다만 좀더 많은 곳을 돌아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만남을 소중히 할 줄 아는 일기일회(一期一會)의 습속을 지닌 유목민적 삶을 살고 싶었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한라산을 따라 오르면서, 처음에는 십여 년 전 그가 이 산을 오르며 본 몽골의 초원을 나도 보려고 했다. 그러나 운동부족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아픔과 떨리는 근육에 힘을 주어 버티게 한 것은, 한라산 정상에 펼쳐질 그가 말한 초원에 대한 기대가 아니었다. 오르락내리락 완급이 있는 산의 구름 너머에 무엇이 나타날지 보고 싶어 미칠 것 같던 그 호기심, 상상력이었다. 시바로 하여금 제주와 한나라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 것도 이런 감정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