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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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책 뒷편 한 문학평론가의 추천사를 보면, 모든 작가는 노력을 하지만, 한강은 사력을 다한다는 글이 있다. 그 이상 이 작가를 더 잘 표현하는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한강은 글자 한 자 한 자에 자신의 생명력을 모두 집어넣어서 조합한 그 단어들이 심해에서 어둠을 뚫고 한참을 내려가 결국 바닥에 가 닿듯 만든다. 사람들이 논에 난 피처럼 숭덩숭덩 손 쉽게 죽어가던 한 시절에 대한 묘사는 마치 검고 끈적한 액체마냥 나를 덮쳐 명치가 저릿해지는 느낌까지 들며 읽었다. 책 읽는 중간중간,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들 때마다 제주 4·3 사건과 전국에서 일어난 보도연맹 학살 사건 등에 대해 따로 찾아 읽으며 시대적 상황에 대한 공백을 채워 넣었다. 2000년대 초반, 중학교에서 국사를 배우던 나는 왜 이런 걸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까. 외세도 아닌 동족이 민간인을 대거 학살하던 그 시절의 야만과 광기는, 왜 그렇게도 오랫동안 외면되었을까. 내가 중학교-고등학교를 다니던 그 어디쯤의 시절, 수십만명에 달하는 사망자의 유가족들은 처음으로 정부의 공식사과를 받았다고 한다, 약 60여년만이려나. 그 오랜 시절 유가족들이 가슴에 묻고 있던, 하지만 결코 희생자들과 작별할 수 없었던 그 이야기들을 한강은 검고 끈적하게 변해버린 듯한 피로 감싸고 그 위에 눈을 한겹 더 덮어 우리에게 전해준다.

열 살이 갓 넘은 아이가 자기보다 조금 더 나이 많은 언니의 손을 겨우 붙잡고 보리밭에 쌓여있던 시체들의 얼굴 위 눈을 털어 낼 때, 제 부모의 시신을 찾기 위해 더 이상 체온이 없어 얼굴에 녹지 않고 쌓인 그 눈들을 털어낼 때. 눈처럼 부서지는 파도에 갓난 아기의 시신이 떠밀려 왔는지 물을 때. 그리고 끝끝내, 오랜 시간, 떠나간 사람과 작별하지 못한 사람이 식별 불가능한 백골들이 쌓인 곳을 장화를 신고 밟을 때. 작품 속 그들이 겪던 그 고통을 나는 과연 감당할 수 있는가, 그 무게감을. 이 짓눌리는 무게감을. 눈처럼 가볍고 새처럼 가벼운 사람들의 목숨에 비해 남겨진 이들이 감당하는 무게는 너무 무거웠다.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여덣 살 여동생의 시신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포개지고 쓰러진 사람들을 확인하는데, 간밤부터 내린 눈이 얼굴마다 얇게 덮여서 얼어 있었대. 눈 때문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으니까, 이모가 차마 맨손으론 못하고 손수건으로 일일이 눈송이를 닦아내 확인을 했대. 내가 닦을 테니까 너는 잘봐, 라고 이모가 말했다고 했어. 죽은 얼굴들을 만지는 걸 동생한테 시키지 않으려고 그랬을 텐데, 잘 보라는 그 말이 이상하게 무서워서 엄마는 이모 소맷자락을 붙잡고, 질끈 눈을 감고서 매달리다시피 걸었대. 보라고, 네가 잘 보라고 얘기해주라고 이모가 말할 때마다 눈을 뜨고 억지로 봤대. 그날 똑똑히 알았다는 거야. 죽으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맨뺨에 눈이 쌓이고 피 어린 살얼음이 낀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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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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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책 뒷편 한 문학평론가의 추천사를 보면, 모든 작가는 노력을 하지만, 한강은 사력을 다한다는 글이 있다. 그 이상 이 작가를 더 잘 표현하는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한강은 글자 한 자 한 자에 자신의 생명력을 모두 집어넣어서 조합한 그 단어들이 심해에서 어둠을 뚫고 한참을 내려가 결국 바닥에 가 닿듯 만든다. 사람들이 논에 난 피처럼 숭덩숭덩 손 쉽게 죽어가던 한 시절에 대한 묘사는 마치 검고 끈적한 액체마냥 나를 덮쳐 명치가 저릿해지는 느낌까지 들며 읽었다. 책 읽는 중간중간,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들 때마다 제주 4·3 사건과 전국에서 일어난 보도연맹 학살 사건 등에 대해 따로 찾아 읽으며 시대적 상황에 대한 공백을 채워 넣었다. 2000년대 초반, 중학교에서 국사를 배우던 나는 왜 이런 걸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까. 외세도 아닌 동족이 민간인을 대거 학살하던 그 시절의 야만과 광기는, 왜 그렇게도 오랫동안 외면되었을까. 내가 중학교-고등학교를 다니던 그 어디쯤의 시절, 수십만명에 달하는 사망자의 유가족들은 처음으로 정부의 공식사과를 받았다고 한다, 약 60여년만이려나. 그 오랜 시절 유가족들이 가슴에 묻고 있던, 하지만 결코 희생자들과 작별할 수 없었던 그 이야기들을 한강은 검고 끈적하게 변해버린 듯한 피로 감싸고 그 위에 눈을 한겹 더 덮어 우리에게 전해준다.

열 살이 갓 넘은 아이가 자기보다 조금 더 나이 많은 언니의 손을 겨우 붙잡고 보리밭에 쌓여있던 시체들의 얼굴 위 눈을 털어 낼 때, 제 부모의 시신을 찾기 위해 더 이상 체온이 없어 얼굴에 녹지 않고 쌓인 그 눈들을 털어낼 때. 눈처럼 부서지는 파도에 갓난 아기의 시신이 떠밀려 왔는지 물을 때. 그리고 끝끝내, 오랜 시간, 떠나간 사람과 작별하지 못한 사람이 식별 불가능한 백골들이 쌓인 곳을 장화를 신고 밟을 때. 작품 속 그들이 겪던 그 고통을 나는 과연 감당할 수 있는가, 그 무게감을. 이 짓눌리는 무게감을. 눈처럼 가볍고 새처럼 가벼운 사람들의 목숨에 비해 남겨진 이들이 감당하는 무게는 너무 무거웠다.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여덣 살 여동생의 시신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포개지고 쓰러진 사람들을 확인하는데, 간밤부터 내린 눈이 얼굴마다 얇게 덮여서 얼어 있었대. 눈 때문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으니까, 이모가 차마 맨손으론 못하고 손수건으로 일일이 눈송이를 닦아내 확인을 했대. 내가 닦을 테니까 너는 잘봐, 라고 이모가 말했다고 했어. 죽은 얼굴들을 만지는 걸 동생한테 시키지 않으려고 그랬을 텐데, 잘 보라는 그 말이 이상하게 무서워서 엄마는 이모 소맷자락을 붙잡고, 질끈 눈을 감고서 매달리다시피 걸었대. 보라고, 네가 잘 보라고 얘기해주라고 이모가 말할 때마다 눈을 뜨고 억지로 봤대. 그날 똑똑히 알았다는 거야. 죽으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맨뺨에 눈이 쌓이고 피 어린 살얼음이 낀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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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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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움을 넘어, 두렵다. 읽으면서는 살인자의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고, 책을 덮으면 내 주변에 모든 요소들이 예민하게 느껴질 정도로 신경이 곤두섰다. 장면 장면의 묘사부터 주인공 심리상태의 격동적인 변화, 그 어느 부분에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수많은 기억과 환각사이에서 주인공의 감정 부재와 자극, 자기합리화와 혼란을 따라가며 정유정 작가가 그려내는 날 것 그대로의 악을 흐릿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은 선과 악을 다 타고 나지만 사회적으로 억누르는 채 공생해가는지, 아니면 그 어떤 조치로도 누를 수 없는 악이란 존재하는지 의문을 갖게되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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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비행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6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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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신비롭다. 어둠은 고요함과 두려움을 동시에 주고, 빛을 잡아먹으면서도 빛의 존재를 두드러지게 한다. 생텍쥐페리가 그리는 밤은 아름답고 포근한 동시에 무한한 두려움을 준다. 그 안에서 빛은 희망이 되기도 하고, 절망이 되기도 한다. 수백 킬로미터의 어둠 속 평야 한 가운데 자리한 한 농가의 불빛이 밤 안에서는 위로와 위안, 상상과 친근함을 주고,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태풍 속, 틈새로 비쳐오는 하늘 위 별빛은 바다의 세이렌처럼 조종수를 홀려 돌아오기 힘들 길로 인도한다. [야간비행]은 그 밤을 가르며 비행하는 이들과 그들을 둘러싼 미지의 밤, 그리고 ‘사람’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밤에 구름이 그렇게 눈부시게 밝을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보름달과 모든 별자리들이 구름을 찬란하게 빛나는 파도로 바꿔놓았다.”

와인 한잔을 기울이며 텅 빈 대로변을 보며 이 책을 읽고 있자면, 인기척 없는 파타고니아와 안데스 산맥의 밤이 머릿속에서 조금은 그려진다. 빛이 산재된 도시 안에서조차 고요함이 가끔 가슴이 텅 빌만큼 느껴질 때가 있는데, 밤 속 전깃불 한점 없는 곳은 어떨까. 적막과 고요함이 주는 평안. 또 그러다 가끔 보이는 불빛에 의한 위로. 그런 낭만만이 존재한다면 밤은 햇빛만큼이나 역사에서 오랫동안 찬양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밤은 종종 희망을 집어삼킨다. 이 책 속 파타고니아에서 출발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향해 야간비행을 하던 우편기는 밤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태풍 속에서 땅으로부터의 아주 작은 빛조차 없이 길을 잃고 실종되어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오롯이 낭만과 편리만을 누린다. 밤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사람들. 두려움 그 이상으로 지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내면의 무엇인가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은 밤을 건넌다. 휘어지지 않는 강인함으로.

“‘인생에 해결책이란 없어. 앞으로 나아가는 힘뿐. 그 힘을 만들어내면 해결책은 뒤따라온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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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와 박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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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속죄가 가능할까, 그 죄의 사함을 받을 수 있을까.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제법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누군가가 오인받아 대신 형을 살거나 사건이 미결되어 살인범이 법적으로 처벌을 받지 않았다면, 그런데 그 사람이 교도소에서 십몇년 복역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반성을 했다면, 그 사람은 용서받을 자격이 있는가. 또 다른 경우,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누군가를 감싸주고, 지켜주려 하는 탓에 진범이 반성 없이 그림자 뒤로 숨고, 애먼 사람이 희생을 감내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면 그 감싸주는 것은 과연 옳다고 할 수 있는가. 최근 발표되었던 다른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들은 사실 일정 부분 실망스러운 점들이 많았는데, (예상 가능한 스토리와 피로감이 느껴지는 감동 요소들) 이번 작품은 많은 생각을 이끌어내며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다. 추천할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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