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노트

세계적인 소설가이자 기호학자인 움베르토 에코의 세 번째 소설.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에 이어 에코 특유의 분석적 예리함, 경쾌한 상상력, 동서고금을 오가는 해박한 지식이 또 한번 독자들을 에코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1. 『전날의 섬』 줄거리

1643년 7월에서 8월 사이 어느 날 로베르토 델라 그리바라는 젊은이가 널빤지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해류를 따라 표류하고 있다. 그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뱃사람들이 버리고 간 것으로 보이는 배 <다프네>가 그를 맞이한다.

저마다 새로운 땅을 찾기 위하여 항해를 거듭하는 유럽 강국들. 그 사이의 첩보전에 휘말린 젊은 귀족 로베르토는 만물이 풍성하고 금은보화가 넘친다는 솔로몬 섬과 아직 아무도 정확하게 측정해 본 적이 없는 경도의 신비를 벗기라는, 프랑스의 최고 권력자 마자랭 추기경의 밀명을 받고 홀란드의 첩보선 <아마릴리스>에 승선했다가 난파당한 것이다.

<파선(破船)을 경험하고, 또다시 버려진 배에 갇혀 본 사람은 오직 나뿐일 것>이라는 기록을 통해 태연자약함을 드러내려던 로베르토는,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기 존재를 인식하기 위하여 그가 사랑했던 <여인>에게 보낼 수 없는 편지를 쓴다. 아버지와 함께 참전했던 30년 전쟁, 아버지의 죽음, 어린 시절부터 그가 만들어 내어 거의 확신하기에 이르는 동생 페란테의 존재, 냉소적이고 이단적 생각도 거리낌없이 들려주는 프랑스 귀족이자 무관인 생 사뱅,파리 사교계의 생활, 어느 살롱에서 만난 <여인> 릴리아, 자기도 모르게 첩보전에 휘말려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프랑스 국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임무를 맡고 떠나기까지 자기의 삶을 되돌아본다.

그러던 중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배에서 또 다른 조난자 카스파르 신부를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거리상으로는 얼마 떨어져 있지 않으나 그 사이를 날짜 변경선이 가로지르고 있어서 시간적으로는 24시간이 차이난다는 <전날의 섬>에 이를 방법을 강구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40일간이나 폭우가 퍼부었다는 노아의 홍수 때 어디서 그렇게 많은 물이 생겨났는지, 천동설과 지동설은 어떤 이론적인 문제 때문에 옳고 그른지, 이 세상은 무한한지 유한한지, 신의 존재는 어떻게 규명할 수 있는지 신학과 철학,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논쟁을 펼치기도 한다.

로베르토에게 수영을 가르쳐 전날의 섬에 이르게 하려던 카스파르 신부는 더 이상 오래도록 기다릴 수만은 없다는 이유로 자신이 만든 잠수종(潛水鐘)을 이용하여 바다 밑을 걸어서 섬에 가려고 한다. 그리하여 카스파르 신부는 쇠가죽으로 만든 종 모양의 기구를 뒤집어쓰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고…….

다시 혼자 남게 된 로베르토는 삶을 마무리짓기 위하여 자기가 이렇게 난파하게 된 것은 페란테의 음모였다는 상상을 시작으로 소설을 써 나간다. 페란테와 <여인> 릴리아가 함께 항해하도록 만든 로베르토는 그들이 난파하게 한다. 그리고 <다프네>를 찾아온 페란테와 목숨을 건 결투 끝에 일생의 숙적이었던 페란테를 죽인다.

소설과 현실을 혼동하게 된 로베르토는 전날의 섬 반대편에 릴리아가 떠내려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릴리아를 구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날짜 변경선을 따라 표류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리하여 영원히 오늘이 계속되고 마침내 영원 속에서 릴리아와 하나가 되도록…….


2. 『전날의 섬』을 읽고 이야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전날의 섬』에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인물과 사건과 사상과 경이로운 기계들이 끊임없이 갈마드는 한바탕의 지적 미스터리의 행렬이 펼쳐진다.

30년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다른 세계를 발견하는 일이 종교와 예술과 문학을 마구 뒤흔들던 시대를 배경으로, 요새의 포위와 공격, 간담을 서늘하게 할 만큼 첨예한 칼과 혀의 대결, 화약과 향유, 다중 구조의 첩보선, 꼭 닮았으되 음험한 인물들, 품격 높은 학식으로 빛을 발하는 예수회 수사들과 자유 사상가들, 검질기고 싸움 잘하는 시골 아낙네들, 돌림병, 사랑과 권력을 둘러싼 음모가 얽히고설킨 파리의 살롱들, 그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지며 숨가쁜 이야기가 진행된다.

중세의 음유시로 우리를 홀리는 마법사 움베르토 에코는 마술 같은 거울 놀이를 통해, 갈릴레오, 몬테베르디, 카라바지오, 세르반테스, 루벤스, 베르니니, 셰익스피어, 베르메르, 캄파넬라, 렘브란트, 마리노, 몰리에르, 그라시안, 시라노, 스피노자, 벨라스케스, 데카르트, 보로미니, 푸생, 가상디, 바질, 밀턴, 라신, 파스칼의 세기에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가운데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미묘하게 자전적인 이 『전날의 섬』은 끊임없이 변모하는 우리 언어에 대한 이야기이자, 특별한 공간에서 전개되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이다. 그 공간에는 오늘날의 바로크 인이 가상의 바벨 탑에 갇혀 있다. 『전날의 섬』은 백과사전 소설이자 성장 소설이며, 첩보 소설이자 연애 소설이고, 마감을 눈앞에 두고 있는 우리 1천 년 역사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할 소설이다.


3. 서평과 기사

3.1.언어의 갈릴레오가 진짜 갈릴레오를 찾아낸다

스텔라 틸리야드(1995. 10. 15 『더 타임스』)

영화 「에일리언」에 나오는 리들리 스코트의 우주선이 <아마릴리스>로 변했다고 생각해 보자. 내가 말하는 <아마릴리스>란, 과학 실험과 식민지 탐색을 목적으로 1640년 암스테르담을 출항한 쌍돛대 목선이다. 시거니 위버가 그 지긋지긋한 괴물들과 함께 우주선을 탈출하여 로베르토 델라 그리바가 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로베르토 델라 그리바는 <아마릴리스>에서 조난하고, 인적 끊긴 난파선으로 보이는 <다프네>로 옮겨 탄 이탈리아의 귀족 청년이다. (여러분이 만일에 역사물의 애독자라면) 『치즈와 벌레』를 생각해 보라. 『치즈와 벌레』는 움베르토 에코 교수의 볼로냐 대학 동료이기도 한 카를로 긴스부르그가 중세의 필사 원고를 이용하여 천국과 지상에 대한 한 인간의 상상력, 곧 한 인간의 우주론을 펼친 책이다. (여러분이 만일 문학 비평가라면) 원문 분석의 근본 원칙을 상기해 보자. 이 근본 원칙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가 아닌, 외관으로 나타난 것을 통해서만 사물과 우리들 자신을 정의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고 보면 이 <다른 것>, 우리와 반대되는 것은 우리와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고 결국 우리들 자신은 그 <다른 것>의 일부를 이루고 그 <다른 것>은 곧 우리의 일부가 되고 만다. 이 세 가지 가정을 종합하면 움베르토 에코 소설의 요리 비법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요리 비법의 일부는 알게 된 셈이라고 해야겠다. 요리가 제대로 되게 하자면 17세기의 신학문, 르네상스 시대의 의학, 조선술, 지도 작성법, 탐험, 살롱 문화, 서정시에 관한 정보를 다량 쏟아 넣고, 여기에다 에코 특유의 양념을 넣어야 한다. 양념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독자의 뇌리에다 생생한 영상을 창조해 넣는 신비한 언어의 무더기인 것이다.

「살아남으려면 이야기를 해야한다.」

『전날의 섬』에 등장하는 화자(話者)의 말이다. 어떤 사물을 서술할 때만 사물 역시 서술하는데, 우리가 존재하는 것을 바로 이 메커니즘을 통해서다. 그래서 로베르토는 경도 1백 80도에 난파한 채 정박해 있는 <다프네>에 올라 상상력의 배를 띄우고, 거기에 이르기까지 경험했던 뜬 세상과 갖가지 사건을 서술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쓰면서 이야기의 곁가지를 지어내기도 하는데, 이 지어낸 이야기가 현실이 되어 그가 살고 있는 <다프네> 선상의 현실과 뒤섞인다. 그가 살아온 삶과 탐색의 초점을 이루는 것은 <타자(他者)>의 존재이다. 그가 살아온 삶에서 <타자>의 존재는 다름아닌, 자신이 지어낸 아우 페란테이다. 배 위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있는데, 이 보이지 않는 존재는 로베르토와 똑같은 동선으로 움직이면서 로베르토의 움직임을 그대로 흉내낸다. 그러므로 로베르토는, 자기 자신을 찾아나선 오디세우스, 영혼의 나그네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타자의 존재를 이해하고 만남으로써, 그리고 페란테를 창조하고 정의함으로써 로베르토는 자기 자신을 정의하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로베르토는 신학문(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발견에서부터 시간과 사물과 우주의 기원, 세계 지도 제작에 관한 갖가지 학설에 이르기까지)을 이용해서 자신이 발견한 것을 이해하려고 하는 르네상스 시대의 조신(朝臣)이다. 에코가 『장미의 이름』에서 중세 스콜라 철학을 소설적 장치로 삼았다면 이 책에서는 르네상스와 과학이 그 장치 노릇을 한다.

로베르토의 현실적인 여행이 겨냥하는 것은 전날의 섬(경도 1백 80도 너머에 존재하는 섬, 따라서 <어제>에 존재하는 섬)을 찾는 일인데 이 전날의 섬은 그 자신의 근원에 존재하는 것이자 근원 자체의 본질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여행은 현실적인 여행인 동시에 정신의 여행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여행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수 없다. 로베르토는 <타자>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 그 자신이 바로 타자가 된다. 말하자면 자신을 구성하는 일부이자 자신의 근원이기도 한 그 타자성과 하나가 되면서, 그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섬으로, 자신이 써 나가고 있던 이야기의 대단원으로 접근한다.

일련의 이러한 수수께끼와 이 수수께끼를 설명하는 능력, 무진장에 가까운 유심적(唯心的) 언어를 통해 유물적 세상을 역설적으로 창조하는 능력과 함께 에코의 장기라고 할 수 있다. 원작이 지닌 언어의 현란한 곡예에 영역자인 윌리엄 위버의 탁월한 번역이 돋보이는 『전날의 섬』은 재미있는 우화인 동시에 최근의 문학 이론과 과학사의 현란한 전시회를 방불케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이 창조해 내는 것은 가슴이라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마음이다. 주인공과 더불어 당시 세상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과 함께 느끼고자 한다면 독자는 주인공에게 감탄하게 될 것이지만, 사랑하게 되지는 ?을 것이다. 에코는 사랑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다.

3.2.움베르토 에코의 머릿속

자일즈 코렌: 세상에서 가장 머리 좋은 사나이를 인터뷰하는 어려움(1995. 10. 4 『더 타임스』)

아무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한들 기호학자가 사람들이 한눈에 알아보고 몰려든다는 이유로 슈퍼마켓에 출입하기를 꺼리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두 권의 소설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가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이후 움베르토 에코는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가 되었고, 유럽의 많은 도시에서는 실제로 그의 일상사를 화제로 삼는 일이 많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를 마이클 잭슨이나 아놀드 슈왈츠네거와 묶어서 연상하기도 한다.

근작 소설 『전날의 섬』을 홍보하는 자리에서 그는 나에게 말했다.

「볼로냐에서 어느 날 밤 내가 겪은 이야기 한 토막을 들어 보시오. 마침 세미나가 끝나서 나는 학생들 몇을 데리고 술집에 갔어요. 술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극장 앞은 지났는데 마침 그 극장에서 2류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고 있더군요. 나는 궁금해서 길을 건너 가서 이리저리 둘러보고는 학생들과 합류했어요. 그것뿐이에요. 그런데 그 다음날 신문의 헤드라인 좀 보세요.」

<움베르토 에코는 오페라 리셉션에 참석하지 않았다>

움베르토 에코인들 자기 체구가 작달막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까? 나이츠브리지 호텔 라운지의 비로드 의자에 푹 파묻혀 있는 그를 <마에스트로(거장)>로 알아보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깨끗한 감색 양복, 앞 머리카락이 많이 빠져 유난히 넓어 보이는 이마, 평퍼짐한 몸통, 담배에 물을 붙여 무는 느릿한 손 동작이 그랬고, 영어 발음 상의 면책 특권 같은 것은 받지 않아도 되는 다국어(多國語) 상용자의 놀라운 말재주가 특히 그랬다.

여기서 덧붙여 세계에서 가장 머리 좋은 사나이라는 명성은 이미 기정 사실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나이를 만나는데도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좋다. 세계 지성계의 잔챙이들 이야기가 당연히 나올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의 말을 들어 보자.

「인터뷰는 질색이에요. 인터뷰는 현대 저널리즘의 질병 같은 겁니다. 인터뷰라고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사람, 인터뷰라는 것을 잘 하지 않는 사람, 매주 중요한 할 말이 아주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해야하는 겁니다. 작가를 인터뷰하면서 작가에게 근작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정직한 비평적 해석을 바라는 독자에게는 사기와 같은 거죠. 자기 책을 두고, <내 책, 그거 아주 웃겨요. 나는 아무래도 깡통인가봐요.> 이렇게 말하는 저자는 매우 드물답니다.」

내가 제대로 물었다면 에코는 아마도 그렇게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말은 이렇게 계속된다.

「지난 달 스페인에서 공동 기자 회견을 했어요. 기자들은 무지하게 많은 걸 물어 왔고, 나는 거기에 일일이 대답했어요. 그런데 이 기자 회견이 끝난 뒤 많은 저널리스트들이 나와 개인 인터뷰를 하자는 거예요. 했지요. 그랬더니 몇 분 전 기자 회견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끝도 없이 하는 겁니다. 내 시간의 낭비, 기자들 시간의 낭비인 것이지요.」

나로서는 진퇴 양난이었다. 어떻게 해야 이 훌륭한 양반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양반은 벌써 시간의 낭비인줄 알고 있는 판인데?

그는 모르는 것이 없다. 그는 볼로냐 대학 교수다. 그는 여기에서 강의도 하고 기호학에 대한 논문도 쓴다. 그는 대중 문화의 다양한 측면을 학문적으로 정리하는가 하면 신문에다 축구, 택시 기사, 포르노 영화, 커피 잔을 다루는 칼럼을 쓰기도 한다. 소설에는 심오한 지식을 풀어 놓는가 하면, 행간을 철학, 신학은 물론이고, 비학(秘學), 성서 주해, 암호 해독술, 중세 언어, 천문학, 점성학 등에 대한 정교하기 짝이 없는 지식을 펼쳐 보이기도 한다. 그는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인 모양이다.

「내 소설이 이 모양인 것은 말이지요, 내가 소설을 쓰는 까닭과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에요. 무슨 소리냐 하면, 뭔가 새로운 것을 알아내면 나는 이걸 독자들에게도 알려 주고 싶어진답니다. 사랑에 빠지면 어때요? 세상에 공표하고 싶어지는 건 당연하죠. 나는 내 생각을 내 가슴에다만 묻어 두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해요.」

그러나 독자관을 이렇게 피력하는 에코도 한때는 어려운 문제와 만난 일이 있었다. 그는 하버드에서 열린 특강 시리즈에서 작가와 독자 간의 상호 이해에 필요한 밀약에 관하여 폭넓은 의견을 나누었다. 그의 말을 더 들어 보자.

「두어 권의 소설을 쓰고 수백만 독자들에게 이 책을 읽히는 경험을 통해서 나는 어느 새 아주 특이한 현상과 가까워지고 있더라고요. 수만 권의 책이 팔려 나갈 즈음이면 독자들은 이미 밀약을 완벽하게 꿰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그 뒤 백만 권쯤 팔려 나가면, 독자들이 정말 이 밀약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판단할 수 없는, 전인미답의 땅덩어리에 발을 들여놓는 느낌이 들지요.」

다른 말로 하자면 그는, 자기가 말하고 있는 독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게 된다는 말이다.

「일부 독자들에게 내 책은 커피 테이블의 장식품이 되는 것도 사실이에요. 서점 앞에 수북이 쌓인 것에 기가 질려 내 책을 샀을 뿐,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가 있다고 해도 그건 내 잘못이 아닙니다. 나는 적십자사가 아니니까요. 허영 때문에 내 책을 사는 수도 있을 겁니다. 나는 이걸 바보에게 매기는 세금 정도로 이해한답니다.」

<스타일>의 수출국인 조국 이탈리아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는 의미에서 그는 종종 <문학의 아르마니>라커니 <기호학의 파바로티>로 불리기도 한다. 그 역시 이탈리아 상품의 일종이 된 것이다.

「마음대로 부르라죠. 상투적인 표현? 이것은 장악할 수도, 여기에서 도망칠 수도 없는 거예요. 하지만 나 자신은 유럽의 작가라고 생각해요. 무슨 소리냐 하면 영국에서는 이게 안 되고 유럽에서는 되는 것은 지적인 활동 무대와의 물리적인 거리감 때문에 오는 거지요. 중세 이래 지식 사회는 옥스포드나 케임브리지에 위치하고 있지 않았나요? 런던에서는 먼곳이지요. 하지만 소르본느는 빠리 한 복판에 있지 않았어요? 볼로냐 대학도 마찬가집니다. 타운(도시)과 가운(교수복) 사이가 벌어지지 않았던 거죠.」

몇 달쯤 지나자 소설 팽개치고 범죄 소설을 쓰고 싶었단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늦었어요. 그것보다 나은 것은, 오스카 레반트 같은, 나이트 클럽의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어요. 담배를 피우면서 밤 늦도록 피아노를 치는……. 하지만 인생의 행로를 바꾸는 거, 쉽게 안되는 거죠.」

자기 책을 들고 온 유럽을 여행하는 에코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그토록 싫어하는 인터뷰이다. 바로 그런 미궁애 자신을 가둔 채 그는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자기 나름의 수도원 미궁을 만든 셈이다.

내가 인터뷰를 빨리 끝내자 기분이 좋았던지 그는 또 한 개비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런데 필터가 밖으로 나오고 담배 끝이 입술 사이로 들어갔다. 거꾸로 문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그는 담배를 고쳐 물었다. 에코도 모르는 에코를 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3.3.풍자와 암시가 어우러지는 한 마당

페터 애스프덴(1995. 10. 7 『파이넨셜 타임스』)

움베르토 에코의 독자층은 지식 계층 전반에 걸친다. 그는 그들과 농담을 한다.

소설가, 학자, 문화 비평가, 상습적인 풍자가 움베르토 에코에게는 매력적인 버릇이 하나 있다. 그 자신이 쓴 소설의 주인공처럼, 행복한 우연의 일치를 통해서 그러듯이 사물을 아주 명료하게 설명하는 버릇이 그것이다. 이럴 때는 별로 작가인 척하지도 않는다. 새 주간지 『레스프레소』에 그가 연재하고 있는 칼럼 <라 부스티나 디 미네르바> 얘기를 하던 중에, 칼럼 책이름: 을 영어로는 어떻게 번역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웃옷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는 <부스티나>라는 것을 내게 보여 주었다.

「<부스티나>라는 것은 성냥 수집가들을 위한 포켓북이에요. 요 몇 년 동안 이탈리아의 성냥 상표 중에서 가장 유명한 상표는 <미네르바>예요. 그래서 가게에 가면 꼭 부스티나 디 미네르바를 달라고 하지요. 재미있는 농담이잖아요? 미네르바는 바로 에술의 여신 미네르바니까……. 파이프 담배를 피울 당시에는 성냥 안에다 뭘 끄적거리고는 했어요. 그래서 나는 독자들에게, 성냥에다 소설을 써왔다고 말하고는 하지요.」

이중 의미를 지닌 모호한 단어와 축자적 진실을 교묘하게 혼합하는 장기야, 이미지와 상징의 까다로운 의미를 연구해서 학문적인 명성을 얻은 학자인데다, 문서 관리인처럼 방대한 중세 세계를 원자재로 이용해서 희한한 베스트 셀러를 써낸 작가이니 놀랄 것이 없다.

『장미의 이름』은, 무수한 암시와 중층적인 의미의 켜를 통해 각 모든 지식 계층의 독자를 광범위하게 확보한 바 있는 추리 기법의 탐정 소설이다. 매력적인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가령, 젊은 수련사 아드소가 낯선 처녀와 사랑을 나누는 대목이 힐데가르트 성인 같은 신비로운 인물 이야기에 등장하는 종교적인 인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장미의 이름』을 두고 에코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즉, 범죄 소설 같은 <저급한 문화> 장르에 고답적인 철학이나 신학적 논의를 섞어 놓으면 독자들은 그걸 수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처방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그는 졸지에 전방위 유럽 지성계의 미디어 스타가 되었다.

두 번재 소설 『푸코의 진자』는 평론가들의 몰매를 맞았다. 평론가들은 스릴러 소설에 대한 접근법도 모르면서 고의적으로 난해한 완곡 어법을 쓴, 어렵게 쓰기로 작정하고 쓴 소설이라고 그를 비판했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새 소설 『전날의 섬』 역시 대중을 끌어들이기 위한 절충과는 거리가 멀다.

그전의 베스트 셀러가 그랬듯이 이 책 역시 장난기가 다분한, 출처가 불분명한 지적 요소가 차고 넘친다. 이 책의 경우 무대가 17세기라는 것만 다를 뿐이다. 『전날의 섬』은 귀족 청년 로베르토 델라 그리바 이야기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로베르토는 열대의 섬 앞에 좌초한 배에 갇혀 있다.

그는 배와 섬 사이로 날짜 변경선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따라서 배와 섬 사이의 공간적인 거리는 시간적인 거리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의 회상이 시작된다. 연애 편지가 등장하고, 철학적, 종교적 논쟁이 등장하는가 하면 무의미할 수도 있고 의미심장할 수도 있는 역사적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댄다.

그러나 에코를 이런 일에다 붙들어 두기는 난감한 노릇이다. 한 장면에는, 추상적인 대화를 종결시키는 데 필요한 수학적인 기게의 발명에 온통 정신이 팔린 소년이 하나 등장한다. 나는 에코에게 이 소년이 과학적 확실성의 상징이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대답했다.

「천만에. 어린 파스칼이었어요. 이 장면에 등장하는 누군가가 그 아이를 두고 예수회에서 살다가 에수회에서 죽을 팔자라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지요. 말하자면 나는 특정 그룹에서만 쓰는 농담을 내것인양 한 번 써본 거랍니다.」

그러면, 기지 투성이에 대목마다 톡톡 튀는 생 사뱅이라는 인물은 어떠냐고 물어 보았다. 생 사뱅은 탁월한 통찰을 자랑하는 청년인데 모르기는 하지만 에코가 자신의 자유로운 시니시즘을 이 청년의 시니시즘과 동일시했기 때문인 듯하다.

「천만에. 생 사뱅은 부분적으로 시라노 드 베르지락에서 따온 거예요. 코가 크고 센티멘탈하고, 성질이 느긋한 로스땅의 시라노가 아니고 진짜 시라노 말이오. 진자 시라노는 매부리 코에 동성연애꾼이었어요. 굉장히 시니컬했던 시라노는 아버지를 등친 적도 있어요 대중적인 이미지와는 정반대였던 것이죠.」

에코는 이 농담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큰 덩치에 근엄해 보이는 그의 사진의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싹싹하고 생기가 있었다. 그는 강조하고 싶은 대목을 강조할 때마다 담배 연기 속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는 했다. 하지만 그의 책에 관한 한 많은 사람들은 (나 역시 예외는 아니겠지만) 장난기 어린 그의 암시적인 농담을 다 알아먹을 것 같지 않았다. 다 알아먹어야 하는 것일까?

「그럴 필요 전혀 없어요. 꼭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에요. 독자 중에 그 암시를 알아먹는 독자가 있으면 그걸로 오케이랍니다. 나와 독자가 벌이는 게임이니까. 하지만 암시적인 농담이 좀 섞여 있어야 권위가 있어 보이지 않겠어요? 물론 내 소설 등장 인물 중에는 실존 인물도 있지요. 파스칼만 해도 그래요. 나는 파스칼을 빠리에 등장시켰지만 사실 파스칼이 빠리에 온 적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은 확실하지 않아요. 독자들에게도 그건 문제가 안 돼요. 하지만 내게는, 파스칼이 빠리에 온 적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은 중요하지요.」

그렇다면 그런 불분명한 자료가 독자를 오도할 가능성은 없을까?

「나는 아직도 제임스 조이스와, 암시를 가지고 조이스가 벌이는 장난의 영향을 못 벗어나고 있어요. 아직까지도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가 지니고 있는 의미론적 고리를 다 풀어낸 사람이 없잖아요?」

그는 무엇 때문에 17세기를 이 소설의 무대로 했을까?

「17세기는, 사람들이, 세계의 중심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불확실성과 단절을 느끼기 시작한, 첫 근대적인 세기랍니다. 갖가지의 새로운 전망이 대두되던 시대, 현미경에서 망원경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발명품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시대입니다. 사회적인 동요도 심했지요. 흥분의 도가니 같은 시대인 동시에 매우 불안했던 시대이기도 했지요.」

우리 시대와 관련이 있을까요? 그런 시대는, 슬퍼해야 할 시대인가요, 축복해야 할 시대인가요?

「세계의 중심이라는 관념의 상실은 17세기부터 계속된 아주 정상적인 사고 조건이지요. 긍정적인 현상도 부정적인 현상도 아닙니다. 역사적 실재일 뿐이지요. 우리는 그 안에 살고 있고 또 살아야 해요. 세계의 중심이라는 관념이 되살아날 거라고 믿으면 안 되지요.」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전인 1960년대 에코는 고급 문화에서 대중 문화에 이르는 다양한 문화를 다룬 에세이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 입에 고급이니 저급이니 하는 말들이 오르내리고 있는 현상에 놀라고 있는 것일까?

「많은 것들이 엄청나게 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여전히 그런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요. 두 부류를 가르는 경계는 모호해졌어요. 우리에게는, 쓸만한 것과 쓰레기를 골라 주는 컴퓨터가 있잖아요? 하지만 이것을 구분하는 다른 경계가 있어요.

만일에 미래학자가 되었다면 나는 사람들을 세 계층으로 나누었을 겁니다. 고급이니 저급이니 하는 것과는 상관 없는 계층이죠. 말하자면 이 세 계층은, 컴퓨터 문화에서 소외되고 수동적으로 시각 이미지를 흡수하는 프롤레탈리아 계층, 수동적으로 컴퓨터를 이용하는 쁘띠 부르주아 계층, 그리고 컴퓨터와 대화할 수 있는 <노멘클라투라>가 될 테지요.」

하지만 대중은 여전히 베토벤을 팝뮤직보다 우월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요?

「그러나 베토벤을 무슨 배경 음악처럼 들을 수도 있는 거고, 팝뮤직을 고답적인 문화 센스로 들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뉴욕의 젊은 택시 운전사들은 록 음악에서 좀 쉬고 싶어서 그러겠지만 클래식도 자주 듣습니다. 단지 휴식을 위해서 골드베르그의 변주곡을 듣는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지요. 그런 음악이 작곡될 당시에도 아마 휴식용이었는지도 모르지요. 바흐를 유행가로 만들 수도 있는 겁니다.」

그는 대중 문화의 소비자일가?

「아뇨. 시간이 없어서 영화나 텔레비전은 잘 못 봅니다. 하지만 호기심으로 좇고는 있어요. 나는 만화책이 없으면 잠을 이루지 못해요. 내 경우 만화는 의학적인 목적에 쓰여지는 것이지요.」

3.4.에코가 지는 생각의 진자

니콜라스 프레이저(1995. 10. 1 『더 선데이 타임스』)

『장미의 이름』은 움베르토 에코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기호학 교수로 만들었다. 그는 지금 파시즘과 수영과 그의 최근작 『전날의 섬』 생각에 여념이 없다.

당당한 체구에, 수염을 기른 대머리 신사인데다, 대서양을 자유자재로 오고가겠다는 오랜 희망의 산물인 유창한 영어……. 파란 체크 양복 차림의 이 기호학 교수는 어디서든 눈에 잘 띈다. 움베르토 에코는 유럽 어를 전방위적으로 구사하는 유일한 유럽의 지성인이다. 가벼운 차림으로 언제든 여로에 오를 수 있는 사람, 플라스틱 포크로 비행기 안에서 콩을 찍어 먹으면서 1990년대 들어 발호하는 파시즘을 심각하게 걱정하고, 이 딜레마를 재치있게 소설로 써내는 사람이기도 하다.

「수도승 하나를 독살하고 싶었지요.」

1980년, 최초의 소설 『장미의 이름』이 태어나게 된 동기를 밝히면서 그가 한 말이다. 이 소설은 세계적으로 천만 부가 팔려 나가면서, 가발을 쓰지 않아도 풍채가 그럴 듯한 숀 코너리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는 나이 마흔 여덟에 별처럼 소설계에 데뷔하고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두 번째 소설 『푸코의 진자』는 그로부터 9년 뒤인 1989년에 등장했다. 그로부터 겨우 6년, 이제 그의 소설 『전날의 섬』이 우리 손에 들어온다.

「이 소설 말인데, 동기가 엉뚱해요. 나는 자연에 대해서 쓰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미지가 있어야지요? 학문적인 텍스트와는 구분되는, 소설가로서의 작품을 써야 하는데……. 그런데 문득 경도 1백 80도 선, 오늘날 우리가 날짜 변경선이라고 부른 것에 흥미를 느꼈지요. 나는 피지 섬으로 날아가 수영도 하고 잠수도 좀 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수영할 줄 모르는 주인공을 설정했어요. 사실 19세기까지는 수영할 줄 아는 사람이 얼마 없었어요. 심지어는 뱃사람들까지도……. 이때부터 4년 동안 나는 수영을 다시 배우게 되었지요. 그 동안 1697년에 쓰여진 영법(泳法)을 해설한 삽화까지 곁들여진 수영 교본을 발견할 수 있었고요.」

『전날의 섬』에 나오는, 깡디드 같은 주인공 로베르토 델라 그리바는 17세기 남태평양에서 조난한다. 로빈슨 크루소와는 다르다. 로빈슨 크루소는 섬에 표류하지만 로베르토는 버려진 난파선에 표류하게 되니까. 이 배에는 식물 표본, 야채, 시계, 포도주통, 식수통 아름다운 새들도 있다. 빵그로스 비슷한 난파자인 예수회 신부 카스파르 신부도 이 배에서 만난다. 신부는 자연 속에서 하느님의 천지 창조의 의미를 밝히려는 사람이다. 그런데 둘 다 수영을 못해서, 눈앞에 섬이 있는데도 거기에 오르지 못한다. 그러니까 소설의 중요한 부분은, 에코 식으로 펼쳐지는 자연과 현실에 대한 두 사람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장미의 이름』에는, 중세의 신화와 요리법에 대한 현학적인 에코 식 장기 자랑과 함께 다분히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아서 코난 도일을 연상시키는 인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새 소설에서는 바로크 스타일의 괴팍한 존 던의 분위기와, 교양인의 눈으로 신세계의 새로운 자연을 바라보면서 유럽 인들 사이에 제기된 인식론적 오류가 유난히 강조된다.

에코에 따르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세계의 신비는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미혹과 허구성의 켜 사이에 존재한다. 그의 말을 들어 본다.

「17세기에 갈릴레오는, 오늘날의 아인슈타인만큼이나 중요한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바로크 역시 문명 과잉의 현상이라는 의미에서 역시 중요한 현상이예요. 오늘날의 광고에 바로크 시대와 유사한 현상을 찾아낼 수 있어요. 베네똥의 광고를 보세요. 그건 현실이 아니라 입체화와 거룹과 분홍빛 구름을 올라탄 바로크 이미지이지요. 탐험가들은 자연을 이렇게 체험하고는 저렇게 쓰기도 했어요. 그래서 나는 내 주인공이 산호나 망그로브(홍수림)를 어떤 눈으로 보게 할 것인지 곰곰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망그로브란 말은 당시에는 있지도 않았어요. 플로리다에서는 이 망그로브가 거미나무라고 불리고 있었답니다. 엉금엉금 기고 있는 거미 같다……. 그래서 내 주인공 로베르토도 이 망그로브를 그렇게 보고 있는 겁니다.」

나는 볼로냐 대학의, 비좁고 담뱃재로 지저분한 연구실에서 에코와 마주 앉았다. 그는 지난 20년 동안이나, 소설과 저널리즘을 오가면서 이 대학에서 기호학을 가르치고 있다. 기호란 곧 <기미> 같은 것이다.

석 달 전 오클라호마 폭발물 사고 직후 에코는 섬?한 자전적 에세이를 발표한 적이 있다. 그 자신이 어린 시절에는 무솔리니 소년 단원이었다고 고백하면서 공산주의자 잔당들과의 폭력에 매료되어 있었노라고 밝힌 것이다. 그의 지적에 따르면 표면적인 현상은 바뀌지만 그 기본적인 태도는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함께 파시즘도 죽었다고는 믿지 않는다. 에코는 설명한다.

「파시즘은 가죽 옷에 집착하는 부랑자 풍속과 동의어가 되었어요. 이 사회에도 파시즘을 잉태한 것과 똑같은 태도가 팽배해 있지요. 외국인 혐오, 폭력의 세뇌, 개인 권리의 침해 같은 것이 바로 그런 것이지요.」

에코는 테크놀로지의 주장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는, 전자 계몽 시대가 도래했다고 믿는 마셜 맥루한 같은 우리 시대의 구루의 의견은 좇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 인터넷을 즐기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 역시 유토피아의 도래를 믿는 것일까?

「한 주일에 몇 시간씩만 매달려요. 문제는, 즐거운 문제이기도 합니다만, 이걸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가 도대체 무엇인지 다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도대체 너무 많아요. 과도한 음식이 그렇고 잠이 그렇고 사랑이 그렇듯이 결국은 정보의 폭주가 정보를 마비시키지요. 한 미국인이 자기의 결장의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렸어요. 이거 예삿일이 아니에요. 사이버스페이스를 이용해서 자기 내부를 대중에게 내보이는 걸 상상해 보시라고요. 앞으로의 교육은 정보를 취사 선택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할 겁니다. 나도 학생들에게 정보 취사 선택법을 가르칩니다. 필요한 정보를 어떻게 알아보느냐? 어떻게 하면 필요한 정보만 넉넉하게 입수할 수 있느냐? 세뇌가 되었든 안 되었든, 공산주의 치하의 빅 브라더 문제보다야 낫겠지요만, 이 역시 굉장히 심각한 것이지요.」

『전날의 섬』 마지막 부분에서 에코의 주인공은 여전히 신통치 못한 수영 실력으로, 날짜 변경선 저쪽, 따라서 과거도 현재도 아닌 것에 이름으로써 시간을 정복한다는 헛된 희망에 사로잡힌 채 바다에 뛰어든다. 거기에 이르기만 하면 그는 과거에서도 현재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20세기 말의 이 세상에서 우리는 정의할 수 없는 것, 성취할 수 없는 것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우리가 도달하지 못할 곳도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움베르토 에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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