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개념에 관한 새로운 이해의 가능성

-과학혁명의 구조를 중심으로

 


 

1.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연구활동 자체의 역사적 기록으로부터 드러날 수 있는 전혀 다른 과학의 개념(the concept of science)을 그리는 것”(21p)을 목표로 하고 있다. 토마스 쿤의 주된 비판 대상은 과학을 축적에 의한 발전이라는 개념”(22p)을 가지고 이해하는 과학사학자들의 작업이다. 쿤은 축적성을 떠난 발전의 노선을 추적하여 새로운 과학사 서술을 시도한다. 그의 작업에서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과학의 발전에서 역사적인 요소들이 차지하는 의미라고 재정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따르면 “[과학적 탐구의 기초가 된다고 믿어지는]관찰과 경험만으로는 [과학적]믿음의 특정한 무리를 결정할 수가 없다. 개인적 그리고 역사적 사건으로 이루어진, 겉보기로는 임의적인 요소가 항상 주어진 시대의 어느 과학자 사회에 의해서 신봉되는 믿음 가운데 그 구성성분으로 끼어든다”(25p,[]는 인용자 첨가)는 것이다. 이러한 쿤의 작업은 축적에 의한 과학의 발전이라는 기존의 믿음과 앞으로의 발전의 가능성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의도하고 있다. 오히려 무균상태의 실험실은 가치중립적인 지식의 생산이 가능한 장소가 아니라 이미 항상 주어진 패러다임의 제약 속에서 실험의 목표와 방법 등이 미리부터 설정되어있는 곳이다. 이렇게 과학의 발전에서 역사적인 요소가 차지하는 의미들을 부각시킴으로써 일련의 새로운 개념들이 제시되는 데, 패러다임(paradigm), 정상과학(normal science), 비상과학(extraordinary science) 그리고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 등이 주요한 개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쿤의 새로운 과학적 지식의 발전에 관한 하나의 이론을 요약·정리하고 이에 관한 비판적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이 비판적 의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지식이 형성됨에 있어서 역사가 차지하는 의미와 역사적인 것들 속에서 제약된 구체적인 개별자들이 어떻게 반응할 수 있는지에 관한 보다 예리한 이해가 가능해지기를 희망한다.

 

2.

 쿤에 따르면, “정상과학은 과거의 하나 이상의 과학적 성취에 확고히 기반을 둔 연구활동을 뜻하고 그 성취란 몇몇 특정한 과학자 사회가 일정 기간 동안 과학의 한 걸음 나아간 활동을 위해 기초를 제공하는 것으로 인정한 것을 말한다.”(33p)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 뉴턴의 프린키피아등이 그러한 성취에 해당한다. 이러한 저술들이 이루어낸 성취는 다른 여타의 경쟁 이론들의 옹호자들을 완벽하게 제거했다는 점에서 전대미문의 것이었고 동시에 모든 유형의 문제들을 연구자들의 재편된 그룹이 해결하도록 남겨놓을 만큼 열려진(open-ended)것이 있었다.”(34p) 쿤은 이러한 두 가지 특성- 다른 경쟁 그룹을 제압할 수 있는 능력, 후속 연구자들이 달려들어 풀 수 있는 열려진 문제들의 존재-을 띠는 성취를 패러다임이라고 부르고 이 패러다임은 정상과학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패러다임이라는]이 용어를 선택함으로써 나는 실제 과학 활동의 몇몇 인정된 실례들-법칙, 이론, 응용, 기기법 등을 모두 포함하는 사례들-이 그로부터 과학 연구의 특정한 정합성의 전통이 나타나는 모델을 제공한다는 점을 시사하고자 한다.”(ibid.) 이로써 쿤은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기존의 선형적 발전 모델에 관한 비판적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쿤은 패러다임의 개념을 보다 적절히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정상과학이 굳건히 건립되기 이전을 고찰한다. 과학의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는 여러 특징적인 학파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는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현상들을 기술하고 해석”(41p)한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의 분기 현상은 점차로 가라져 간다. 이 분기 현상의 사라짐이 곧 정상과학에로의 길(the route to normal science)이다. 이 차이의 사라짐은 그 학파 고유의 특성적 신념과 선입견 때문에 지극히 방대하고 미완성인 정보 더미의 어느 특수 부분만을 강조했던 패러다임 이전 학파들 가운데 하나의 학파의 승리에 기인한다.”(ibid.) 이렇게 하나의 학파가 승리를 거두면, 이전의 경쟁하던 학파들은 점진적으로 사라져가고 경쟁하던 학파에 속하던 연구자들은 승리한 학파로 전향하기도 한다. 이 정상과학에로의 길은 패러다임이 가지는 일종의 배타성을 적절히 보여준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 분야의 새롭고 보다 확고한 정의를 내포한다. 자기들의 연구를 새로운 패러다임에 적응시키는 것을 원치 않거나 또는 적응시킬 수 없는 사람들은 고립된 채로 계속해야 하든가 아니면 스스로를 어느 다른 그룹에 소속시켜야 한다.”(43p)

 “그렇다면 한 그룹의 단일한 패러다임의 수용이 허용하는 보다 전문화되고 심오한 연구의 성격은 무엇인가? 만일 그 패러다임이 일단 완전히 수행된 연구를 대표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통합된 그룹에게 어떤 문제들을 해결 과제로 남겨놓는가?”(49p) 이와 같은 질문을 통해 우리는 정상과학의 본성(the nature of normal science)를 이해할 수 있다. 하나의 패러다임은 주어진 문제들을 푸는데 있어서 여타의 경쟁 상대들보다 훨씬 성공적이라는 이유에서 전문가들 사이에서 그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정상과학은 주어진 문제들을 더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약속이며 그 약속의 실제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의 패러다임 안에서 연구자들은 사실들에 대한 지식을 확장시키고 사실들과 패러다임의 예측 사이에 일치 정도를 증진시키면서 그리고 패러다임 자체를 더욱 명료화”(50p)시키면서 정상과학을 유지해나간다. 정상과학은 세 가지 핵심적인 속성들을 갖는데, 1) “패러다임은 사물의 본질에 대해서 특히 뚜렷하게 드러내 보여준 것으로 밝혀진 사실들의 부류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그 사실들을 적용함으로써 패러다임은 그 사실들을 보다 정확하게 그리고 보다 다양한 상황에서 결정한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52p) 2) “패러다임의 존재는 풀어야 할 문제를 설정해준다.”(53p) 3) “패러다임은 모호한 이론의 일부를 해결하고 이전에는 단지 관심에 그쳤던 문제들에 대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준다.”(54p) 이러한 정상과학의 본성을 정리하면, “의미 있는 사실의 결정, 사실의 이론에의 일치 그리고 이론의 명료화”(61p)라고 요약할 수 있다.

 정상과학 내에서, 즉 하나의 패러다임 내에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일종의 퍼즐풀이와 같은 것이다. 쿤은 그것을 퍼즐풀이로서 정상과학(normal science as puzzle-solving)이라고 표현한다. 패러다임은 문제를 설정하고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도 제공한다. 따라서 여기서 제공되는 문제들은 과학자 사회가 과학적이라고 인정하거나 또는 그 구성원들에게 참여하라고 권장하게 될 유일한 문제들이 된다.”(68p) 정상과학이 하나의 퍼즐풀이라면, 거기에는 분명한 해답도 있고 또 그 풀이에 관한 일정한 규칙도 존재한다. 패러다임이 바로 그 해답이 확실히 있다는 것과 풀이의 규칙을 제공한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패러다임 내에서 주어진 규칙에 입각하여 해답이 있다는 확신으로부터 추동되어 문제에 집중할 수 있다. 그 다음 단계로 과학자 개인이 도전하는 것은 나머지 퍼즐들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 점이며, 그 규칙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이러한 규칙을 부여하는 것은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과학적 작업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는 이러한 패러다임의 실재(reality)여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모든 과학자들이 자신의 문제풀이가 어떤 규칙에 의해서, 또 문제 자체가 어떻게 주어졌는지를 알고서 푸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패러다임은 우선성(the priority of paradigms)는 분명한 것이다. 실제적인 과학적 작업들이 패러다임의 우선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일반적인 교과과정에서 원리 자체를 배우기 보다는 그것의 응용과 실제적인 풀이를 통해서 원리를 간접적으로 체득하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의 우선성이 더 중요한 이유는 정상과학이 무리없이 잘 수행될 때가 아니라 정상과학이 위기에 닥쳤을 때이다. 정상과학에서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이에 대한 설명을 해보려고 시도할 때, 과학자들은 자신이 지금까지 풀어왔던 문제 설정, 문제 풀이의 규칙 자체를 의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anomaly)의 지각이 곧 새로운 발견이다. 즉 발견은 자연이 정상과학을 다스리는 패러다임-유도의 예상들을 어떤 식으로든 위배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그것은 다음 단계로 이상 현상의 범위를 다소 확장시켜 탐사하는 것과 더불어 지속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상이 기대치가 되도록 패러다임 이론이 조정되는 경우에만 종결된다.”(90p) 우리가 과학적 발견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례들, 예를 들어 산소의 발견, X선의 발견 그리고 라이덴 병의 발견은 모두 공통적인 특징들을 갖고 있다. 그 특성이란 이상 현상에 대한 사전 인지, 관찰적 및 이론적 인식의 점진적 및 동시적 출현 그리고 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흔히, 저항을 수반하는 패러다임 범주와 과정의 변화를 포함한다.”(101p) 일반적으로 하나의 패러다임은 그것이 여러 문제들을 해결함에 있어서 상당히 성공적이란 이유에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그 아래서 수행된 관찰과 실험은 대부분은 주어진 문제들을 잘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후에 정교한 장치들이 제작되고 이론이 더욱 명료화된다. 이런 전문화는 문제들을 푸는 데 더욱 유용한 도구가 되지만 과학자들의 시야를 크게 좁히는 결과도 초래한다. 따라서 과학은 점점 더 경직화된다. 이런 상황에서 이상이 발견된다. , “이상은 패러다임에 의해서 제공되는 배경에서만 나타난다. 패러다임이 정확하고 영향력이 클수록 그것은 이상 현상에 대하여, 따라서 패러다임 변화의 가능성에 대하여 보다 예민한 지표를 제공한다.”(104p)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문제와 그 문제의 규칙들로 설명될 수 없는 여러 현상들이 발견됨에 따라 패러다임은 위기를 겪는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이루어졌을 때, 기존의 플로지스톤 이론에서 라부아지에의 산소에 대한 발견이 제시되었을 때 그리고 뉴턴 역학의 절대 공간 개념에서 아인슈타인의 공간개념이 제시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 가지 실례는 전형적인 사례들이라고 볼 수 있는데, “각 경우 새로운 이론은 정상적 문제 풀이 활동에서의 현저한 실패를 본 후에야 비로소 출현했다.”(117p) , 하나의 패러다임이 위기(crisis)를 겪게 되면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과학적 이론이 발생(emergence of scientific theories)한다.

 위기가 새로운 이론의 출현에 필수적인 선행조건이라면, 과학자들은 위기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 먼저 정상과학은 이론과 사실이 보다 가깝게 일치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것은 패러다임 내에서 확증 또는 반증에 대한 시험이나 조사들이 그러한 노력의 증거임을 보여준다. 만약 이상 현상이 위기를 유발시킨다면, 그것은 단순히 변칙 이상의 것일 수밖에 없다. 만약 변칙적인 것이나 단순히 풀리지 않은 문제라면 그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 곧 설명가능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상현상이 그 이상의 것이라면, 하나의 이상 현상이 정상과학의 또다른 퍼즐 이상의 것으로 보이게 되는 때에, 위기로 그리고 비상과학으로의 이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상 현상은 그 자체로서 이제 전문 분야에 의해서 점점 일반적으로 수용되기에 이른다. 그 분야의 가장 탁월한 많은 학자들이 그것에 차츰 더 많은 주의를 쏟게 된다.”(128p)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패러다임이 제공한 규칙들과 문제 설정 자체에 대한 의문이 쏟아지게 된다. 일부는 한 패러다임 내에서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시도할 것이고 패러다임을 명료화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럼에도 이상현상이 설명되지 않는다면, “정상과학의 규칙들은 점증적으로 모호해진다. 패러다임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실제로 연구에 종사하는 이들 가운데 그것에 관하여 전적으로 합의하는 사람은 극소수인 것으로 들어나게 된다. 이미 풀린 문제들의 표준 풀이조차도 의문의 대상이 되고 만다.”(ibid.) 결국 모든 위기는 하나의 패러다임이 모호해짐과 더불어 그리고 정상과학이 제공하는 규칙들이 느슨해지면서 시작된다. 이상 현상이나 위기에 직면하면, 과학자들은 현존하는 패러다임에 대하여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고 그들의 연구의 목표나 성격도 달라지게 된다. 이로부터 여러 경쟁적인 이론들이 쏟아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쿤은 비상적 연구라고 부르며 정상과학, 위기, 비상적 연구/비상과학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은 축적적 과정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이러한 위기의 급증, 비상적 연구는 과학학명을 야기시킨다. 그렇다면 과학혁명은 무엇이고 그리고 그것은 과학의 발전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141p) 쿤에 따르면 여기서 과학학명이란, 옛 패러다임과 양립되지 않는 새 것에 의해서 전반적이거나 부분적으로 대치되는 비축적적인 발전에서의 에피소드들”(ibid.)이다. 그렇다면 왜 혁명인가? 정치적·사회적 영역에서 사용되는 혁명이라는 개념을 과학적 탐구의 영역에 사용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과학혁명이란, 기존 패러다임이 자연 현상에 대한 다각적인 탐사에서 이전에는 그 방법을 주도했으나 이제 더 이상 적절하게 구실하지 못한다는 의식이 과학자 사회의 좁은 분야에 국한되다가 점차로 증대되면서 시작된다. 정치적, 과학적 발전의 양쪽에서 위기로 몰고 갈 수 있는 기능적 결함을 깨닫는 것은 혁명의 선행조건이다.”(142p) 위기를 태동시킨 정치적 시스템 혹은 정상과학의 패러다임을 깨닫는 것은 양자에게 동일한 것이며 정치에서 기존 체제와 새로운 체제를 세우려는 편으로 양극화되면 정치에의 의존이 무너져버리듯, 과학에서도 기존의 패러다임을 고수하려는 측면과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려는 측이 대립할 경우 그것은 양립할 수 없는 선택의 문제가 되고 이는 기존 패러다임에의 의존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각 측의 주장은 전혀 다른 패러다임에 기초해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혁명이라 불리는 사태, 새로운 종류의 현상이나 새로운 과학 이론의 동화가 그것들보다 구식인 패러다임의 폐기를 강요해야만 하는 본연적인 이유가 존재하는가?”(144p) 이는 과학이론의 본성을 탐구함으로써, 과학혁명의 필연성(necessity of sciectific revolutions)을 설명할 수 있다. 쿤에 따르면 새로운 과학적 이론이 제시될 수 있는 상황은 오직 한 가지 뿐이다. “이것들은 인식된 이상 현상들로서 그 특성적 성격(characteristic feature)은 기존 패러다임에 동화되기를 강경히 거부한다는 점이다. 이 현상만이 새로운 이론들의 작인이 된다.”(148p) 이러한 상황에서 탄생한 이론들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이론, 코페르니쿠스 그리고 라부아지에의 이론들이다. 이러한 이론의 탄생은 기존의 패러다임과 양립할 수 없는 개념적 변환을 몰고오며 이는 결정적인 파괴력을 갖는다. 쿤은 그러한 개념적 변환 자체를 과학에서의 혁명적 재배치의 원형으로 보아도 좋을 것”(154p)라고 주장하며, 낡은 이론에서 새로운 이론으로의 전환을 과학혁명이라고 명명한다. 이렇게 패러다임의 전환 혹은 과학혁명이 발생하면, 이전의 패러다임 내에서 과학적 작업과 현존하는 패러다임 내에서의 과학적 작업은 전적으로 양립되지 않은 것(incompatible)일 뿐만 아니라 비교 불가능한(incommensurable)것이 된다. 왜냐하면 제시되는 문제 자체가 다를 뿐만 아니라 하나의 패러다임 내에서 퍼즐풀이는 전적으로 다른 규칙들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패러다임은 단순히 인식적 측면에서 기능할 뿐만 아니라 규범적 측면에서도 기능한다.

 이러한 과학혁명 혹은 패러다임의 전환은 세계관의 변화(changes of world view)이다. 물론 이전 패러다임 속에서의 과학자와 현존하는 패러다임 속에서의 과학자가 전혀 다른 세계를 살고 다른 것을 관찰한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릴레이는 똑같이 떨어지는 돌을 관찰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떨어지는 것을 돌의 본성(, 상태의 변화에 주목)으로 설명하였고 갈릴레이는 임페투스 이론의 영향을 받아 운동, 즉 하나의 과정에 주목하였다. 이는 직접적 경험이 가치 중립적이라는 기존의 상식을 뒤엎는 것이며, 어떤 사태에 대한 관찰이나 실험이 전적으로 패러다임이라는 제약 속에서(이를 적극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면 조건속에서) 이루어지고 해석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뚜렷한 세계관의 변화를 야기시키는 과학 혁명은 실제로 비가시적인 성격(invisibility)을 갖는다. 이는 일반적인 과학 교육 방법 때문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과학 교과서를 배우고 그 권위를 의심하지 않는다. 과학교과서는 이미 명료화된 일단의 문제들, 데이터, 이론 그리고 가장 빈번한 경우로는 그것들이 쓰인 시기의 과학자 사회에 공양되어 있는 일련의 특정 패러다임에 관해서 논의하게 된다. 교과서들 자체는 당대의 과학적 언어의 어휘와 구문을 전달하는 것을 겨냥한다[...]그러나 교과서는 정상과학의 영속을 위한 교육적 수단으로서 언어, 문제 구조 또는 정상과학의 기준 등이 바뀔 때마다 그에 따라서 전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다시 쓰여야 한다. 요컨대 교과서들은 매 과학혁명을 거칠 때마다 바뀌는 것이며, 이렇게 새롭게 쓰인 교과서들은 필연적으로 그것들을 생산했던 혁명의 역할뿐만 아니라 혁명의 존재 자체까지도 가려버리고 만다.”(198-199p)

 그렇다면 과학혁명은 어떻게 해결되는가? 앞서 논의에 따르면 기존 패러다임과 현존 패러다임은 비교불가능한 것이며 양립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각 과학자들은 어떤 영역에서는 서로 다른 것들을 보며, 또 서로 다른 관계에서 그것들을 본다.”(215p) 그것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혁명적이며 동시에 하나로부터 다른 것의 이행(transition)’ 혹은 개종(conversion)’을 거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이행 혹은 개종이 가능한 것은 옛 패러다임을 위기로 끌고 간 문제들을새로운 패러다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해결할 수 있다는 점”(218p)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두 패러다임을 날카롭게 구분시켜줄 수 있는 결정적인 실험들이 새롭게 해석되고 실증적인 증거까지 확보된다면 이행이나 개종이 더 쉽게 가능해진다.

 우리는 이러한 패러다임의 이행을 하나의 발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양립 불가능하며 비교 불가능한 것 아닌가? 분명한 것은 과학혁명은 대립되는 두 진영의 어느 한쪽이 전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종식된다.”(235p)라는 것이다. 이 승리에 발전이라는 개념을 쓸 수 있는가? 이는 과학자 사회의 본성을 설명함으로써 답을 얻을 수 있다. 과학자 사회는 세부적인 문제들에 집중하고 있으며 그들이 제시하는 해법은 많은 사람들에게 풀이로서 수용되어야 한다. 그들은 이미 게임의 규칙을 공유하고 있고 과학자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주어진 규칙을 학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과학자 사회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통해서 해결되는 문제의 수요와 정확도를 극대화하는 고도의 효율적인 매커니즘”(237p)에 의해 작동한다. 그러므로 패러다임의 변화는 과연 주어진 문제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그리고 정확하게 풀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과학자 집단의 결정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다. “이 방향은 과학적 진보라는 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 온 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한 유형의 발전이 그러한 활동이 존속하는 한 필연적으로 과학 활동을 특징지을 것임도 동시에 보여준다. 과학에는 다른 유형의 발전이 있을 필요가 없다. 보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우리는 패러다임의 변화들이 과학자와 과학도들을 점점 더 진리에 가깝게 인도하고 있다는 관념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239p)

 

3.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를 통해 기존의 축적적 발전이라는 과학적 지식의 생성과 진보에 대한 통념을 비판하고 그것을 패러다임의 전환이란 개념을 통해 다시 서술하고 있다. 쿤의 관점을 우리가 수용한다면, 패러다임이라는 일종의 제약혹은 조건아래서만 우리는 지식을 확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의 확장이 보편적이면서 필연적인 진리로 다가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탐구는 이미 패러다임에 의해서 방향지워져 있고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것 역시 패러다임이라는 색안경에 의해서 조정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식을 생산하고 보존하는 모든 활동은 이와 같이 미리 방향 잡혀져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는 특수한 영역, 즉 과학이라는 영역에만 국한된 것인가? 쿤의 논의에서 나는 패러다임이 일정한 물질적 성격 혹은 규범적 기능까지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이데올로기와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패러다임을 하나의 이데올로기’(여기서 이데올로기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을 미리 방향잡고 있는 어떤 것으로서 의미를 갖는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면, 이데올로기 비판은 어떻게 가능한가? (쿤에 의해서 그러한 가능성은 이미 차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패러다임은 양립 불가능하고 비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더 나아가서 우리가 앞서 보았던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과 같은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형태의 이념형을 제시하는 것도 일종의 패러다임이라고 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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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학기가 마무리 된다. 내일이면 모든 강의가 종강이고 다음주면 성적처리도 끝난다. 강의를 하기 시작한지 두 번째 학기인데, 아직 나에게는 꽤 벅찬 일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나름 크리스마스 이후부터 신년까지 꽤 긴 연휴를 가져볼까 생각중이다. 그 때 소소하게 읽어볼 책들을 골라본다. 먼저 예전부터 권유받았던 <눈부시도록>을 읽을 생각이다. 만화책이니까 편하게 읽으면 되는데, 생각보다 잘 안 읽혀서 1권에서 늘 막히곤 했다. 이번 연휴 때는 뜨뜻한 집안에 누워서 과자 먹으면서 볼 생각이다. 


또 다른 책으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지만, 너무나 유명한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을 읽어볼 생각이다. 사람들이 왜 무라카미 하루키에 열광하는지 궁금해서 읽는 책이기도 하다. 아무튼 연휴는 이렇게 두 권(?)의 책과 보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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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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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운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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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이란 누구인가?

-『지식인이란 누구인가- 프랑스 지식인들의 상상력과 도전』


1.

『지식인이란 누구인가』는 프랑스 지식인들의 사례를 통해 “지식인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있는 책이다. 저자가 지적하다시피 “20세기 프랑스 지식인들은 이념적 독재도 모르고 식민지 경험도 없고 외국의 영향력 아래 핍박받지도 않았다.(8p) 따라서 만약 우리가 지식인이 그가 맺고 있는 사회적 맥락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한국에서의 지식인은 프랑스의 지식인과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지식인은 누구인가?” 아니 도대체 “한국에 지식인은 있었는가?” 이런 특수성에 국한된 질문의 한계를 넘어 진정 “지식인은 누구인가?” “프랑스 지식인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그 지식인의 전형을 밝혀낼 수 있는가?

 이 글을 통해서 위의 질문에 답을 해보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지만, 그 전망은 불투명한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다만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지식인들의 활동들을 정리하면서 그에 관한 답을 간접적으로나마 찾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2.

1) 19세기 말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을 거치며 자유의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의 삶은 여전히 열악한 저지에 놓여있었다. 그들은 결사의 자유를 비롯한 노조 설립을 위한 자유를 확보하기까지 더 오랜 시간 투쟁 했어야 했다. 페르낭 펠루티에는 노조 운동을 펼치며 노동자의 권익을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한 지식인이었다. 펠루티에가 활약하던 시기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노동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펠루티에의 노조 운동(부루스 운동)이 다른 운동들과 구별될 수 있었던 것은 펠루티에의 원칙 때문이었다. “그의 정신은 집약하면, 혁명은 노동자의 손으로, 노동자의 의식으로 해나가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노동자의 독자성이었다.(17p)

 펠루티에는 당대의 노동문제에 관하여 감정적인 접근보다는 과학적 인식을 추구했다. 당대의 계급적 격차는 분명했고 펠루티에는 이 중 가장 심각한 문제로서 ‘교육의 불평등’ 문제를 고민했다. 당대 노동자 계층의 아이들은 정상적인 교육을 받기 어려웠고 공교육에서 배제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펠루티에는 이 문제를 고민했고 노동자들이 과학적 지식을 습득하고 이를 통해 “노동운동이 과학적 지식을 장전해야 사회에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21p)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펠루티에는 부르스를 만들었다. 부르스는 일종의 지역별 노조였다. 부르스는 취업 서비스를 제공했고 특히 강좌와 도서실을 열어 위에서 언급한 교육의 격차 및 노동자 계급의 독자적인 운동을 위한 지적인 토대를 만들고자 했다. 당대 노동자들은 “직업 강좌에 관심이 많았고 일요일 저녁의 시 낭독회에도 많이 모였다. 그들은 또 산업재해 사고에 대한 구체적 절차, 구식과 신식의 노동 방식이 자신들에게 미치는 영향 등에 관해 지식을 수집하고 강론을 듣기를 원했다.(29p)

 펠루티에는 부르스를 설립하고 다양한 기고글을 쓰면서 자신의 생활을 영위했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혁명의 방법에 대해 고민하였고 그 산물이 ‘총파업론’이었다. 펠루티에는 총파업을 “전반적인 파업이 아닌, 인력과 물자의 유통을 와해시키고 그로써 식량 부족과 억압적 기구의 마비를 도발하도록 하는 몇몇 전략 산업 부분에 국한될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낭만적 봉기가 아닌 폭력을 포함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국가를 타도하고 경제적 권력을 근로자들에게 주는 혁명이었다.(34p)

 펠루티에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활동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노동자의 독자성에 대한 강조와 이를 돕기 위한 교육 문제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 불평등에 의한 지식의 불평등은 곧 경제적 불평등으로 연결되기에 펠루티에의 문제의식은 의미 있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2) 두 번째 지식인의 사례로 소개되는 것은 장 조레스이다. 조레스가 활동하던 당시 유럽은 전쟁의 위협에 휩싸이고 있었다. 전쟁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지만 “위기의 상황에서 반전주의자들이 우세한 고지를 차지하기는 어려웠다.(46p) 반전 문제에 먼저 대비한 측은 노동운동 측이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사회당의 조레스가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조레스는 하원의원 이었고 사회주의가 프랑스에 뿌리 내리도록 노력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다양한 매체와 연설을 통해 전쟁을 반대했다. 그는 단순히 자본주의 자체에 반대하기 위해서 전쟁을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반전 활동과 사상을 통해 사회주의가 민족과 문명을 수호를 위하려는 것이었다.(51p) 조레스가 생각하기에 자본주의 세계에세 전쟁은 영구적이고 보편적이었다. 전쟁의 배후에는 무기 상인들이 있고 절대주의 체제가 그것을 후원한다. 조레스의 특이점은 “전쟁의 원인과 책임을 자본주의에서 찾았지만 전쟁을 인류의 문제로 확대”(54p)한 것이다. “전쟁은 그에게 모든 인간에 대한 모든 인간의 전쟁이었다. 전쟁은 한 계급 내에서 개인들에 대한 개인들의 전쟁이며, 한 나라 안에서 계급들에 대한 계급들의 전쟁이고, 인류 안에서 인종에 대한 인종의 전쟁이고, 민족에 대한 민족의 전쟁이었다.(ibid.)

 당대는 민족주의가 강성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대의 민족주의는 주로 우익 민족주의였다. 예를 들어, “독일의 병력이 자국에 비해 강하고 프랑스는 이에 대배해야 한다는 식의 논조”(57p)는 우익 민족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많은 호응을 얻었다. 조레스는 이러한 민족주의에 대항에 지속적으로 반전을 주장했다. 그는 의회 연설을 통해 반전을 주장했으며 2차 인터네셔널에서 그 희망의 불씨를 찾고 있었다. 2차 인터네셔널의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민족의 불가침성과 불접촉성, 그리고 평화의 유지를 위해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들이 조직될 의무가 있음을 확인했다.(65p)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레스에게 민족과 계급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는 커다란 숙제로 남아이었었다. “조레스가 추구하는 민족은 혁명 후의 나라와 동일한 상이었다. 민족의 독립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자라날 수 없었다[...]그는 어떠한 군국주의 국가라도 그 안에서 자유라는 혁명적 힘에 호소하지 않고서는 민족이 성립되거나 구출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옛 조국은 편협하고 이기적인 집단에 의해 착취당했다. 그 조국은 새롭고 우월한 조국으로 바뀌어야 했다. 국제주의는 그러한 각 민족의 독립을 보장하는 것이었다.(67p)

 그러나 결국 독일에 의해 전쟁이 선포되었고 독일의 사회주의는 전쟁에 반대하지 못했다. 조레스는 반전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역량을 믿었다. 따라서 민족문제로 인한 대립과 적의에 대한 대중적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중적 감정은 쉽게 반전을 위한 결의로 모아지기 보다는 타자에 대한 적의와 대립의 감정으로 깊어지기 쉬웠다. 조레스의 사례는 이러한 점에서 많은 교훈을 주고 있고 곱씹어 봐야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3) 세 번째 사례는 파시즘에 대항하는 작가들이다. 그 중 앙드레 지드가 소개되고 있다. 1차 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이탈리아, 독일 등에서 파시즘이 득세하고 있었다. 이에 대항해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반파시스트 감시위원회를 만들고 활동하였다. 여기에는 많은 작가들이 참여하였다. 앙드레 지드는 본래 정치적 활동을 활발히 하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파시즘의 위협이 대두하자 정치의 세계에 들어섰다. 지드는 먼저 식민지 지배에 대한 통렬한 고발과 반성에 대한 글을 썼다. 그는 아프리카 여행을 하면서 본 참상을 적었고 당대 식민지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통념의 장벽을 넘어서려고 했다. 또한 반파시즘 운동에 열성을 보였는데, 그는 독일 반파시스트들을 위한 협회의 수장을 맡으면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지드 뿐만 아니라 많은 문인들과 예술가들은 감시위원회 활동을 통해 문화를 지키려는 의지와 의식을 보였다. “문화의 정의는 전쟁과 파시즘에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것이었다. 문명을 침해하는 모든 위협에 맞서 자신의 영역에서 싸우는 것이었다. 작가들이 수호하려는 문화는, 쇄신된 계몽의 문화였다. 권력에 대한 비판, 분명한 사고와 참여, 대중의 교육과 지적이고 도덕적인 행동, 사회구조를 훨씬 큰 개인의 자유와 정의를 향해 진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이었다.(96p)

 지드를 비롯한 프랑스의 작가와 예술가들은 파시즘에 대항했다. 그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책자를 발간하는 일과 같은 것들이었지만, 이는 앞서 제시한 문화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노력들이었다. 이러한 노력이 얼마나 많은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숙고해 보아야할 문제이지만, “파시즘이라는 전체주의적 체제를 저지할 수 있는 길은 또 다른 전체가 아니라 명료한 의식과 행동양식을 가진 개인들의 구성체”(98p)라는 생각을 확고히 견지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을 것이며, 전체와 개인 사이에서 작가나 예술가들의 위치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하는 길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4) 마지막으로 제시된 사례는 알제리 전쟁기의 청년 지식인들이다. 당대 프랑스인들은 알제리를 프랑스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알제리는 프랑스와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 지배에 들어간 것도 오래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부분 알제리를 여타의 식민지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2차 대전 후 많은 식민지들이 독립을 쟁취하였고 알제리에서도 민족해방 운동이 일기 시작했다. 민족해방운동의 불길은 점점 거세졌고 이에 대항하여 알제리 내의 프랑스 군부는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 중 핵심적인 것은 ‘고문’에 관한 문제였다.

 프랑수아 모리악은 고문 제도에 대해 최초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었다. 고문과 폭력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지만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프랑스인들에게서 알제리인들의 저항은 정당하게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제리는 프랑스 국토라는 관념이 버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리악은 이러한 상황에서 고문에 대한 비판과 반대의 논쟁을 계속하였다.

 그 후에 오댕 사건이 벌어졌다. 오댕은 알제 과학대학의 조교였으며 공산당원이었다. 그는 고문을 받고 살해되었는데, 그의 부인이 이 사실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오댕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오댕 사건의 진상조사와 고문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다. 그 후 오댕 위원회에는 천 여명의 교사들이 가입하였고 오댕 사건에 관한 진실이 밝혀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주요 프랑스 일간지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기에 오댕 위원회는 이 사건을 알리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그 결과 <신문(訊問)>이 발간되었고 많은 지식인들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부는 이 책에 대하여 입수 조치를 취하였으나 지식인들의 반대 서명이 이어졌고 이 책의 인기는 더욱 높아져 다른 나라에 까지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이러한 고문과 폭력에 대한 고발이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고문은 여전히 합법적인 범죄로 남아있었다. 오댕 사건 이후 자밀라 부파차 사건이 일어났다. 대학생이고 공산당원이었던 오댕과 달리 자밀라는 평범한 알제리 여성이었다. 그는 테러범으로 지목 받고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이에 대해 보부아르는 자밀라의 변호인을 만났고 이 사건을 알렸다. 보부아르의 글은 고문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는데 기여했다.

 그 후 알제리에서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프랑스 본토에서도 정치적인 국면 변화가 있었다. 특히 알제리 독립 문제에 관하여 “정치적 해법뿐 아니라 사회적인 도덕성이 일부에서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민족자결권을 향한 열망에 대해 고문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여 지식인과 교회 지도자들, 청년과 학생들이 평화를 요구했다.(125p)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것이 곧 ‘121인 성명서’이다. 121인은 이 전쟁이 정복 전쟁도 아니며 국방 전쟁도 아니며 내전도 아니며 점점 더 군부 자체와, 봉기 앞에서 양보하지 않으려는 일단의 특수계층이 주도하는 전쟁이라고 규정했다. 그들은 알제리 인민에 반대하여 무기를 들기를 거부하며, 프랑스 인민의 이름으로 억압받고 있는 알제리인들을 지원하고 보호하는 것을 의무로 삼는 프랑스인들의 행위는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성명서는, 결정적인 방식으로 식민체계의 붕괴에 기여하고 있는 알제리 인민의 대의는 모든 자유인의 대의라고 못 박았다.(ibid.) 서명을 한 121인은 정치적 계파와 상관 없이 많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좌파와 우파 지식인들은 각론에 있어서 입장은 달랐지만, 좌우에 관계 없이 모두 고문에 반대하였고 알제리 인민의 독립이라는 대의에 찬성하였다.

 전쟁 이후에도 프랑스의 언론은 고문과 고문 피해자들에 대한 보도를 하면서 이러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이러한 언론의 노력은 “언제 어느 순간에라도 재생될 수 있는 고문과 같은 민감한 매커니즘을 새 세대에게 제시하여 과거를 모르는 세대에게 공공의식을 심어주려는 것”(131p)이었다.


3.

 프랑스의 지식인들의 사례로 보건대, 저자가 생각하는 ‘지식인’이란 당대의 민감한 이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사람을 의미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참여’의 지평이 무제한적으로 ‘개방’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시간이 흐른 뒤, 그들의 ‘참여’가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목적’을 갖고 있을 때, 그들은 ‘지식인’으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나치의 인종차별에 기여한 우생학자를 지식인이라고 평가했을까? 물론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지식인은 누구인가?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라는 이념은 누구에게나 몫을 내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앞서 말했던 ‘참여’가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목적’은 늘 역사적인 평가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인가? 여전히 많은 질문들이 이어지지만, 앞으로의 논의를 통해 보다 정교한 질문들이 던져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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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형성과 형성의 물질적 조건들에 관하여

-『지식의 재탄생』에 관한 소고

 

 

 

1.

『지식의 재탄생』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서구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지식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의 생산, 보존, 전달의 과정을 추적”(9p)하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 책은 지식을 관장했던 기관들의 역사”이다. “이 책은 고대 이후 서양의 지적 생활을 지배해 온 여섯 종류의 기관, 즉 도서관, 수도원, 대학, 서신 공화국, 전문학교, 연구소에 대한 상세한 기술이다.(10-11p) 나는 이 책의 저자들이 가지고 있는 서술 의도와 일정 부분은 유사하게 또 일정 부분은 엇나가는 방식으로 ‘지식의 형성과 그 형성의 물질적 조건들’에 관하여 이 책을 읽었다. ,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어떤 지식의 형성은 “그것을 체계화하는 기관을 통해서만 그 효과를 전달할 수 있다”(12p)는 저자들의 주장이고 이러한 주장을 보다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파악함으로써 지식의 형성과 그 형성의 물질적 조건들에 관한 보편적인 형태를 파악하고자 했다. 물론 이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마다 다른 형태를 보이지만, 상이한 차이들을 포괄할 수 있는 메타적 수준에서의 논의 가능성이 그 차이로 인해 차단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2.

1) 가장 먼저 등장하는 지식형성의 기관은 도서관이다.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은 헬레니즘 제국의 ‘정치적 후원’을 바탕으로 데메트리오스라는 인물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발제자가 주목하는 바는 “왜 지배자들은 ‘지식’에 주목하였으며, ‘지식의 생산, 보존’을 위하여 도서관을 짓고 이를 후원하였는가?”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대규모로 계획된 호화스러운 기관으로서 도서관은 그리스의 학문의 패권을 당당하게 주장한 헬레니즘 제국 창건자들의 부와 야망을 반영”(21p)하고 있다.

도서관이라는 제도를 바탕으로 하는 지식은 폴리스라는 도시국가에서 형성된 지식과는 그 형태가 달랐다. 일반적으로 폴리스를 바탕으로 한 지식은 ‘구술’에 의해 형성되었고 ‘글쓰기’는 다른 육체 노동과 마찬가지로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 폴리스를 기반으로 한 사회 체계가 붕괴되면서 보다 큰 규모의 정치적 조직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따라서 “폴리스를 대체한 이 새로운 국가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리스 언어와 문화의 중요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문화적 경쟁의 수준을 개인의 차원에서 왕조의 차원으로 높였다. 이러한 왕조들은 처음으로 그 설립자보다 오래 존속하는 기관들을 세우기 위해 자원을 운용했으며, 그 기관들을 후원하는 보다 장기적인 국운에 큰 관심을 두었다.(29p) 그 중 돋보이는 것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였으며 이들은 “그리스의 최고의 학자들을 수도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고, 그들에게 상당한 보수를 지급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30p) 통치자들은 자신의 명성을 높임과 동시에 경쟁자들을 호전적인 인물로 묘사하기 위해서 문화자본 - 그 중 대표적인 것인 지식 -에 투자를 했다. 또한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즉 “권력 언어와 교역 언어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학자들이 특별한 역할”(37p)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다고도 설명할 수 있다.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도서관’이라는 성문 중심의 지식을 형성하고 보관하며 전달할 수 있는 기관은 ‘정치적 후원’, 즉 당대의 통치자의 후원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2) 수도원은 6세기에 새롭게 생겨난 기관도, 로마의 붕괴에서 기원한 기관도 아니었다. 따라서 수도원을 하나의 주도적인 지식의 생산, 보관, 유통으로 이해할 때, 정치적인 고려보다는 다른 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수도원은 특히 문명이 부재했던 미개 상태의 최초의 학문 기관”(61p)이었다는 점이다. 수도원에서 생산된 지식은 주로 “수도 공동체에서의 삶을 정교하게 다듬는데 기여”하는 것들이었다. 다양한 규율들이나 제도집들이 문서화되고 유통되었고 예배에 필요한 다양한 의식들에도 정확한 체계를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수도원의 건립은 “유럽의 되살아난 경제”(72p)적 여건과 맞물려 있다. 수도원의 운영은 “세상으로부터의 기부-노동 수사, 토지와 자원, 정치적 군사적 보호-에 의존하는 방식”(74p)이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지식의 생산은 그 생산을 가능한 일정한 물적 토대에 기인하고 있다. 수도원이 도서관과 다른 점은 -이 책의 범위 내에서만 판단하자면- 도서관은 통치자의 정치적 후원에 기대고 있고 이를 통해 정치적 효과를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기대 받았지만, 수도원은 그와는 달리 상당히 개별화된 형태의 사회적 후원을 받았다는 것 -각 지역의 수도원들은 각 지역으로부터 자신들의 지식의 재생산이 가능한 체계를 구축했을 것이다-이다.

 

3) 중세의 대학은 현대의 대학과는 구분된다. 그것은 첫째, 중세의 대학은 의도적으로 설립된 것이 아니라 학생과 선생의 조직들이 가장 밀집한 지역을 중심점 삼아 자연스럽게 합쳐진 것에 불과했다는 점, 첫째로부터 기인한 두 번째 사항은 도시적 현상이라는 것, 마지막으로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는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이었고 종종 길드와 같은 의미로 이해되기도 했었다. 길드처럼 우니베르시타스에도 명장(교수), 장인(학사), 도제(학생)이 있었고 직업 교육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따라서 “사리사욕 없는 학문, 학구적 자유, 인성 교육, 비실용적 이상주의는 학자들이 무리를 이룬 모임의 의도하지 않은 부산물”(87p)에 불과하다.

중세의 대학 역시 회복한 유럽의 경제적 조건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유럽의 경제는 11세기를 거치면서 급격하게 되살아나 12세기에 절정에 이르렀다. 농업 생산성이 향상되고, 인구가 급증하고, 상업과 무역이 번창하고, 도시가 형태를 갖추고, 교화와 국가의 관료 체제가 전 사회를 촉수를 뻗치면서 돈과 계약을 통한 교류가 늘고[...]사람들은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많은 청년들이 새로운 번영기를 누리며 지식을 좇아 여행을 떠났다.(88p) 이러한 경제적 번영과 더불어 파리의 신학, 볼로냐의 법학, 살레르노의 의학 그리고 프라하의 인문학이 대표적인 대학으로 자리를 잡았다. 신학, 법학, 의학은 당대의 사회적 여견 속에서 현실적인 효과-직업교육의 현장으로서 대학, 즉 신학자, 목회자, 법률가 그리고 의사-를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고 사회로부터 적절한 보호와 지원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신학과 법학처럼 의학도 사회적 유용성이 지적 탐구를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모든 종류의 대학 학부는 사회 내의 고립된 섬으로서 자치권을 누렸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궁극적으로 그들을 둘러싼 세계에 이바지했기 때문이다.(109p)

그렇다면 프라하의 인문학은 어떠했는가? 여기에 대한 저자들의 설명은 충실하지 못하다. 부분적인 서술에 의해 추론해본다면, 인문학 중심지로서 프라하 대학은 카를 4세에 의해 주도되었다. 카를 4세는 대학을 설립하였고 새로운 커리큘럼 없이 전통적인 커리큘럼을 모방했다. 직업교육과 상관없는 하위학부로서 인문학 교육이 이루어졌다. , 인문학이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대학을 설립에 있어서 당대의 통치자였던 왕의 정치적 후원과 대학의 전체체계 내에서 하위학부로 자리매김 했기 때문이다. (아마 이것은 당시 모든 유럽의 대학과 동일한 커리큘럼일 것이다) , 대학의 설립에 있어서는 정치적 후원이 그리고 대학이 여타의 사회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은 상급학부의 유용성 때문이었다. 그리고 인문학은 고급 직업 교육을 위한 일반적인 준비과정으로서 충실한 역할을 담당했다.


4) 도서관, 수도원 그리고 대학에 이어 새로운 형태의 지식생산의 기관이라고 불림직 한 것이 생겨났는데, 이는 서신 공화국이다. 서신공화국은 “전례 없는 규모의 파괴적인 변화에 완벽하게 적응한 기관이었다. 서신 공화국의 역사는 분열이 당연히 학문의 진보에 타격을 주었을 시기에 어떻게 유럽의 다양성이 학문의 진보를 가져왔는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 답은 급진적인 만큼 간단하다. 위기 혹은 붕괴의 위험에 처한 기존의 학문 기관들에 비하여, 서신 공화국은 새로운 지식의 생산을 합법성의 근거로 삼았다. 구체적인 형체를 갖춘 기관들 -인쇄소, 박물관, 학술원-이 그 새로운 지식을 실체적으로 제공했다. 서신 공화국은 다른 기관 모두를 포괄하는 역할을 했다. 그 덕분에 국제 협력은 오늘날까지도 서양 학문의 특징으로 남아있다.(126p)

종교 개혁과 정치적 분쟁의 결합으로 1500년에서 1700년 사이의 유럽은 혼란에 휩싸였다. 각 종교적 분파, 정치적 입장에 따라 학문 문화는 분열을 경험했다. 그러나 이 분열 속에서 서신 공화국은 “출신이나 사회적 지위, 성별 학위에 구별을 두지 않았고 언어와 종교의 차이를 초월했다.(127p) 이러한 개방성을 장점으로 주고받은 서신들은 “거의 항상 공개적인 회람 혹은 출판 아니면 친구들과의 공유를 염두”(133p)에 둔 형태로 쓰여졌다.

서신공화국은 하나의 기관이나 제도라고 말하긴 어렵다. 그것은 일종의 지적인 교류와 네트워크이다. 개방성이 주요한 특징이라고 지적하지만, 실제로 담론에 참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극히 제한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어떤 정보들이 유통된다는 것만으로 하나의 지식체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대에 “왕궁과 서신 공화국 사이 중간지점”(153p)에 존재했던 학회와 같은 조직들이 일정한 정보들에 권위를 부여하였을 것이다. 권위를 갖는 정보는 여타의 정보들과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쉬울 것이고 이러한 과정이 하나의 유의미한 지식을 형성해낸다. 그럼에도 학회는 독자적으로 자신의 영역을 세웠다기 보다는 “항상 권력가들과 세력가들을 교육함과 동시게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자”(154p)했기 때문에 지식의 형성과 그 물적토대의 관계는 여전히 명증하게 제시될 수 있다.

 

5)전문학교는 서신공화국을 대체한 기관이다. 전문학교의 출발점은 독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폴레옹에게 패배한 시기의 낙후된 가난한 독일은 세계 최초로 보편적인 공공 의무 교육의 종합 체계 위에 전문학교를 올려놓았다.(164p) 독일에서 이러한 전문학교가 출발한 것은 ‘민족주의적 감정’로부터 출발하여 “공공 교육을 이용하여 종교, 민족, 계급으로 분열돼 있던 사회를 통일”(164p)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적 감정이 전문학교를 태동시킨 심리적 요인이었다면, 이를 성장시킨 본격적인 요인은 ‘이윤’이었다. 할레 전문학교의 경우 “신자들의 아낌없는 기부와 프로이센 정부의 세금 감면 조치를 이용하여 프랑케는 박애 사업을 위한 기금을 더 모으기 위해 공장과 인쇄소를 세웠다[...]프로테스탄티즘의 노동 윤리가 경건한 신앙심을 자본주의적 근면성에 연결시킨 장소가 있다면, 프랑케 재단이 바로 그러한 곳이다.(168p) 당대에 할레대학과 경쟁하던 괴팅겐 대학역시 “유럽 전역의 귀족들을 -그리하여 그들의 돈을-끌어모으기 위해 하노버 국립대학으로 세워졌다.(172p)

전문학교에서는 이제 교원을 양성하고 전문학교의 학생들은 하부의 교육기관들에서 공공교육을 담당하거나 엄밀성을 미덕으로 하는 지식을 연마하였다. 전문학교에서 주로 문헌학적 연습을 통해 고전을 익힌 인문주의자들은 김나지움이라는 하부 기관을 통해 교실에서 세속적 지식을 나누어줄 돌격대가 되었고 청소년들은 고전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김나지움을 졸업한 학생들은 “공무원 혹은 개별 전문가로서 국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유연하고 적응 잘하는 비판적 사상가들”(189p)이 될 수 있었다.

전문학교의 등장과 성장은 한 국가(특히 독일)의 정치적 기획과 함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패배와 국가의 분열을 치유하고 통합하기 위해, 국가적 기획으로서 공공교육의 체계를 마련하였고 가장 상부에서 각 하부기관의 교원을 양성하여 통합된 문화 및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전문학교가 성장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 아니었을까? 따라서 각 학교들은 자체적으로 학교를 운영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하려고 노력하기도 했지만, 이것은 지배적인 기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대의 사회적 흐름 속에서 독일이 자신의 국운을 걸고 시행했던 국가적인 사업이 아니었을까?

 

6) 마지막으로 살펴볼 기관은 연구소이다. 연구소는 19세기에 어떻게 지배적인 과학 기관이 될 수 있었는가? 이는 리비히의 사례를 통해 볼 수 있는데, “리비히는 화학 연구가 유용하며, 그러므로 대학, 국가, 기업이 지원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리비히는 유기화학을 하나의 학문 분야로 발전시켰고, 농업용 비료, 화학 염료, 의약품을 개발하는 것이 막대한 실질적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증명했다[...] 리비히는 끊임없이 대학 학장들과 주 행정관들에게 연구소를 세우는 데 필요한 기금 마련 운동을 했고, 수많은 밀실 정치 운동 끝에 1830년대 말쯤에 이르러서는 작은 소도시 기센을 화학의 국제적 중심지로 성장시켰다.(211p)

연구소들은 자신의 연구들이 실질적인 유용성을 갖는 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집중적인 후원을 약속하는 재단들과의 계약을 맺게 된다. 연구소들은 재단 공무원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특정 프로젝트를 준비하였고 순수한 과학의 영역에서도 실용적인 결과들이 기대되었다. 재단의 후원이 없었더라면, 다양한 현지 조사 및 거대한 실험들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양한 현지 조사들은 지식의 발전뿐만 아니라 식민지 행정가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3.

『지식의 재탄생』에서는 서양 역사에서 지식이 적어도 여섯 차례 근본적으로 재발명 되었다고 주장한다. 각 기관들은 이전의 기관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그리고 적응하지도 못했던 변화들에 대응하며 그 자리를 대체했다. 동시에 각 기관은 지식을 추구하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명분과 관습을 창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저자들의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내가 중점적으로 이해해보고자 했던 것은 각 기관들의 물질적 토대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지식사회’라고 불리는 현대에서 지식이 ‘상업화’되었다는 것은 너무도 진부한 주장이다. 이제 우리는 학자나 연구자라는 표현보다는 ‘지식노동자’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며, “대다수의 ‘지식 노동자’에게 지적 흥분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은 학문적 자유의 전통적 안식처가 아니라 연구소의 실험주의가 기업의 기업가 정신과 만나 맞물려 돌아가는 곳이다.(251p) 현재의 지식의 상업화, 지적 자유의 박탈은 최근에 발생하여 진행중이고 곧 사라질 현상은 아닌 것처럼 이해된다. 오히려 도서관에서부터 시작된 각각의 기관들이 각자의 성장의 토대를 이룰 수 있는 물질적 조건들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며, 하나의 주도적인 지식의 형성과 생산 그리고 보존은 그에 적합한 물질적 조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인’ 내지 ‘연구자’는 자기목적적인 ‘자유인’이 아니라 언제나 그 물질적 조건들에 제약되어있었던 ‘시대의 자식’들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 대학의 상업화 내지는 지식의 상업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는가? 이러한 역사적·발생적 탐구가 현재의 상황을 정당화해주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대학의 상업화를 비판할 필요가 없거나 다른 방식으로 현재의 물질적 토대의 변화가능성에 주목하는 더 거대한 작업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 두 가지 것이 모두 부정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전자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의해, 후자는 현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역량에 의해- 우리는 어떤 자리를 점해야하는가? 만약 더 근본적으로 물어야할 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대학의 상업화에 관한 일정한 반감의 토대가 되는 ‘규범적 태도’는 무엇이며 그 현실에 존재하진 않지만 추구할만한 것의 후보 정도는 될 수 있는 ‘그 무엇’에 관한 우리의 합의는 가능한가? 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 규범적 태도가 명확하고 그에 대한 합의가 가능하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운동’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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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역사와 대학의 역할에 관한 소고


1.

『대학의 몰락』의 저자의 주도적 물음은 무엇인가? 그는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가? 그의 주도적 물음은 다음과 같다“대학이란 무엇이고 또 무엇을 하는 곳인가?(5p) 이 주도적 물음은 단순히 ‘대학’이라는 제도의 역사를 기술(description)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대학’이 어떤 곳이었는지에 대한 기술을 통해, ‘대학’이 어떠한 곳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규범적(normative)인 태도를 암묵적으로 반영하게 한다. 따라서 『대학의 몰락』에서 보여주고 있는 대학의 역사와 역사 속에서의 각 학자들의 대학론은 단순히 골동품적 역사서술의 역할이 아니라 저자가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대학의 존립 근거와 목적에 대한 논의를 (표면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강화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할 것이다. 저자가 보여주는 대학의 역사를 통해저자는 이상적인 대학의 존립 근거와 목적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에 앞서 저자가 제시하는 대학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해보고 저자의 규범적 태도가 반영된 대학론을 볼 것이다. 이는 저자가 보여주고 있는 다양한 학자의 대학론을 정리하고 저자의 학문론을 살펴봄으로서 간접적으로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위의 물음에 대한 견해를 정리해볼 것이다.

 

2.

저자에 따르면 대학은 서구에서 시작되었다. 그 기원은 11세기 혹은 12세기 즈음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University라는 용어는 ‘조합’이라는 뜻으로 기초 학문을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들의 연합”을 의미했었다. “이렇게 시작한 대학은 곧 제도와 학문의 내용에서 체계를 갖추고 학생을 선별하여 입학시키고 통일된 학위를 수여하면서 학문의 전당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65p)

현재 대학의 제도적·학문적 뿌리는 중세 대학에 있다. 이것은 단순히 University라는 용어의 기원뿐만 아니라, ‘진리’나 ‘지식’등의 라틴어를 학교의 이념으로 삼거나 학교의 건물을 중세 양식으로 짓거나 졸업식 때 가운을 입는 것에서도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더불어 학위의 이름, 학위를 수여하는 제도, 강의 방식 모두 중세 대학의 유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세의 대학은 신학적인 근거를 보다 충실히 설명하기 위해서 지식을 배우고 생산하였다. 중세의 대학은 조합에서 출발하였지만 카톨릭 교권의 후원 아래에서 유지되고 성장하였다. 대학의 자율과 자유라는 개념 역시 교권의 후원 아래에서 발전할 수 있었다. 대학의 세세한 행정상의 업무들을 교황의 대리인이 처리할 수 없었으므로 교수들에게 자치적으로 학교를 운영할 권한을 주었고 학생들도 세속의 권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그런 점에서 대학은 세속 왕권의 간섭으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었지만 교황으로부터의 독립은 얻은 것은 아니었기에 진정한 의미의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지식의 전수와 생산이 이루어진 곳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교황이 대학을 세속 권력의 간섭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했던 이유는 대학이 교회의 신학과 세계관을 지키고 전수하는 곳이었고, 또 다른 차원의 교회였기 때문이다.(77p) 이는 신학을 중심으로 다른 학문들의 질서를 정립할 수 있고 믿음과 배움이 신학적 세계관 안에서 함께 한다는 신념이 담겨 있기에 가능하다고도 볼 수 있다. 신학은 모든 학문들 중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각 학문들 간의 위계질서를 정하였고 각 학문들의 한계를 지적할 수 있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중세 대학의 가장 큰 유산은 학문의 자유나 대학의 자율이란 개념이 아니라, 합리적 토론과 논리적 사고를 학문의 자세로 만들었다는 데에 있다.(80p) 중세 대학은 교권의 지배 아래 있었지만 동시에 혁명적 사고가 싹을 틔울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고 종교 개혁 이후에는 이 새로운 형태의 믿음을 두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던 곳이 대학이기도 했다.

종교 개혁과 더불어 중세와는 다른 사상적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라틴어가 아닌 각 지역의 고유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신학을 대학의 중심이 아닌 철학을 대학의 중심으로 놓자는 새로운 대학론이 등장했다. 이러한 새로운 대학의 전통, 즉 근대 대학은 17세기 자연과학의 비약적 발전과 더불어 “대학을 과학적 탐구와 연구로 진리를 추구하는 곳”(87p)이라는 곳으로 이해하게 하였다. 근대의 대학은 핵심은 ‘자유’였다. 그것은 신의 자유가 아닌 ‘인간의 자유’였고 이것이 최고의 가치로 등장하며 이러한 사상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 칸트의 대학론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대학 내에서 철학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더 나아가 대학이 철학을 중심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90p) 이러한 주장은 기존의 신학의 입지를 위협하는 개혁적 주장이었다. 칸트 당대의 ‘철학’이란, 지금의 자연과학까지 포괄하는, 즉 신학, 의학, 법학 이외의 모든 학문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칸트가 보기에 중세 대학의 핵심영역이었던 신학, 의학, 법학은 모두 응용 가능하고 국가 차원의 실용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영역들이 대학의 핵심이 된다면 자연스럽게 대학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철학은 국가의 이익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에 통제의 필요성이 사라진다. “철학은 이성의 법만을 따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책임을 질뿐이며, 국가 권력의 통제는 필요 없다고 보았다. 그렇다고 철학이 국가와 사회적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철학은 상위학부(신학, 의학, 법학)의 가르침이나 연구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가를 판단하고 비판하는 기능을 통해 대학을 진리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 철학은 이성의 관심을 지키는 학문이기 때문에 자유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며, 그 자유가 보장될 때 국가까지도 이성이 지배하는 곳으로 이끌 수 있다고 확신했다.(93p) 국가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철학이 대학의 중심이 된다면, 대학은 학문의 자유와 자율이 보장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대학은 전문적인 직업인을 양성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대학의 중심에 선 철학이 오직 이성의 지배를 받으므로 대학은 세속 권력에 자유로운 학문 연구가 가능한 곳이 될 수 있다는 점이 강조될 수 있었다. 이러한 학문의 자유, 대학의 자율성에 대한 강조는 오늘날까지도 대학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게 쓰인다.

“칸트가 주장한 철학적 이성의 대학은 1810년 베를린 대학의 설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학의 역사에서 베를린 대학의 설립은 매우 중요하다. 연구(research)중심의 근대 대학 모델이 바로 여기서 출발했다.(97p) 연구 중심 대학이란 지식의 전수라는 고전적 의미의 대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연구하고 지식을 만들어 내는 것을 사명을 여기는 대학을 말한다. 그러나 베를린 대학의 출발은 일정한 역사적 조건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프러시아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사회 각 방면의 개혁을 추구하였는데, 이는 민족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베를린 대학 역시 민족문화를 살리고 학문을 꽃피우는 시대적 요구를 안고 태어났고 이 시대적 요구가 반영된 개념이 바로 과학적 연구였다. 이제 대학은 교회가 아닌 세속 권력으로서 국가와의 관련을 배제하고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공간이 된 것이다. “독일 대학은 교권에서는 자유로웠지만, 국가의 권력에서는 자유롭지 못했으며 교수의 임용이나 학사 관리는 철저하게 국가의 통제를 받았다.(101p)

자본주의가 세계를 주도하는 하나의 이념이 되고 일상적 삶을 규제하는 가장 강력한 세계해석의 방식이자 생산방식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대학에 대한 이해 역시 달라진다. 이는 미국의 대학들의 모습을 통해 이해해볼 수 있다. “미국의 큰 대학들은 20세기에 들어 미국의 산업자본주의와 국가주의, 그리고 최근엔 기업자본주의의 요구를 공학과 경영학을 통해 잘 받아들였다.(105p) 미국의 대학들 역시 그 기본적 뿌리에는 신학적 요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근래에 미국 대학이 보여주는 성과는 이러한 신학적 요구 혹은 기독교 정신의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1)미국의 대학이 유럽의 대학에 비해 국가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았기에, 대학은 실리적이고 실용적인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점, 2) 기업 운영을 다루는 경영학이 대학에 등장하였다는 점, 3)냉전 체제를 아래에서 체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국가의 군수 산업 발전을 위해 엄청난 지원을 받았다는 점과 지역학의 등장으로 다양한 기업과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로 인해 미국의 대형대학들은 각종 평가 지표에서 상위에 랭크되어 있고 현재 대학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논의를 재구성해보면, 대학을 이해하는 주요한 틀은 크게 3가지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중세 교회와의 관련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중세의 신학적 대학’ 그리고 신학을 탈피하고 국가와 관련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근대의 연구중심 대학’ 마지막으로 자본주의의 요구를 수용한 ‘기업형 대학’이 그 셋이다. 파리 대학이 중세의 신학적 요구를 가장 잘 반영한 대학의 사례이고 베를린 대학이 근대 국가 발전과 민족주의적 요구를 잘 반영한 대학의 사례일 수 있고 하버드를 비롯한 아이비리그의 대학들이 자본주의의 요구를 가장 잘 반영한 기업형 대학의 사례일 수 있겠다.

 

3.

대학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설명한 저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대학의 상은 무엇인가? 저자는 다양한 사상가들의 대학론과 자신의 학문론을 설명하면서 간접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보이는 것 같다. 칸트의 대학론은 앞서 간략하게 설명했으므로 하이데거, 리오타르, 데리다, 알란 블룸 그리고 매킨타이어의 대학론을 살펴보고 저자의 학문론을 검토해보겠다.

1) 하이데거의 대학론: “하이데거는 대학의 본질이란 것이 있으며, 그것은 독일 국민의 미래와 숙명적인 연관이 있다고 여겼다. 그 본질은 학문을 추구한다는 것이고, 그것의 실현은 고대 희랍 철학이 생각했던 학문의 원형적인 본질 즉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의 학문을 이 시대를 위해 되찾는 것이다.(162p) 하이데거가 직시한 당대 대학의 문제는 학문의 분열이었다. 각 학문이 자신의 고유한 원리 내에서만 움직이게 됨으로써 그 학문을 배우는 학생들은 각 학문의 전문가가 될 수는 있지만 인간의 삶의 총체적인 모습에 대한 근원적인 관찰과 질문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사실적이고 기술적인 정보를 모으고 산업적인 유용성을 따지는 대학을 비판하였다. 그래서 학문(이론)과 육체적 노동(실천)이 분리되지 않아야 하므로 대학생들 역시 육체적 노동과 봉사로 독일 민족의 정신적 사명을 완성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보았다. 독일 정신의 개혁은 곧 히틀러의 주장과 접점을 찾을 수 있었고 이러한 개혁에 관한 논의는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지 않은 대학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그는 나치와 협력하여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에 올랐다. 하이데거는 학문의 분업화를 막기 위해 자신이 직접 학장을 선출하고 학부들의 자율의식을 비판하였으나 총장의 권한강화는 곧 대학의 나치화를 의미했다. 또한 대학의 문호를 노동자 계층에 개방하여 대학이 다수에게 열려있는 기관이 되도록 하였으나 이 역시 나치 정권의 대중 선동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하이데거의 핵심과제는 학문의 본질을 추구하여 학문과 교육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희랍의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지 않는 대학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학문의 분열을 통합할 수 있는 대학을 만들고자 했고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지 않는 배움의 장소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이 독일 정신의 개혁이라는 목표와 연결되면서 나치와의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었고 그의 대학론 역시 오판에 따른 비극적인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2)리오타르와 데리다의 대학론: 리오타르는 구체적인 대학론을 정립하려고 했다기 보다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서 대학의 위상에 관한 문제제기를 했다. “그는 세계화의 본질을 지식의 문제로 이해했기 때문에 지식의 조건과 변화에 주목했다. 대학과 관련해서는 이 시대의 지식이 어떻게 생성되고 이용되는가를 파악하는 일이 대학에서 해야 할 학문의 기초작업이란 의미가 담겨있다. 그의 진단은 한 시대의 지식에 대한 보고의 차원을 넘어, 그 시대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그가 본 변화된 시대의 대학은 이미 그 사명이 끝난 교육 기관이었다. [중략] 지식의 목적은 소비와 교환이 되었고[중략] 대학의 연구와 산업적 연구의 구분은 없다. 대학의 교육은 지식 경제의 한 축으로 이해될 뿐, 인간이 되기 위한 조건도 아니고, 민주 시민 사회의 구성원들의 권리도 아니다.(173-174pp.) 리오타르에 따르면 근대의 대학은 계몽이라는 이상을 앞세워 인간 해방이라는 큰 담론 아래 학문적 작업을 해왔다. 그러나 해방을 약속했던 거대 담론의 처참한 결과는 거대 담론에 대한 거부로 나아갔고 해방이 학문적 동기가 되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의 대학과 지식의 관계를 살피는 것이 중요해진 것이다. “대학에서 해방이라는 초월적 가치는 철저하게 배제되었고, 체제 내에서 기술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만이 대학의 사명이 되어버렸다. 해방은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행위로 대체되었다. 입력과 출력을 위한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는게 경쟁에서 이겨, 뛰어남을 자랑할 수 있는 방식이 되었다.(175p)

리오타르의 대학론은 소위 포스트모던이라고 지칭되는 시대적 조류 속에서 지식, 대학 그리고 학문의 기능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더 이상 해방이 학문과 지식을 생산하는 동기가 되지 못한다. 오직 소비와 유통만이 목적이 되며 이를 위해 대학은 지식을 가장 생산적인 방식으로 산출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데리다의 경우 칸트 이후 근대 대학에 초점을 맞추며, 대학과 이성의 관계에 주목한다. 칸트의 주장대로 대학이 이성에 의해 움직이고 이성이 대학을 지킨다면, 대학의 존재 이유는 이성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제 인간의 이성은 편협한 목적만을 위해 달려가는 ‘도구적 이성’만 남게 되었다. 따라서 데리다에게는 “이성이 자본주의 시장과 기술주의의 유용성에 매몰된 대학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178p)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제 이성은 더 이상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목적을 가장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게 계산적 기능만을 담당하는 수단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대학은 자신이 존재 근거로 삼아온 이성에 관한 믿음을 상실하였으므로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인가? 데리다는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대학의 책임과 본질에 대해 말한다. 그에 따르면 “대학의 책임은 세상과 인간의 미래에 있다. 이것은 분명 끝없고 무한한 책임이지만, 대학이 서구 역사에서 이상으로 삼았던 것이다.(179p) 데리다의 이런 견해는 “대학이 모든 독단적이고 불의한 것에 대한 비판적인 저항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같은 쪽)고 주장하도록 나아가게 하며, 대학의 절대적인 자유를 말하게 한다.

데리다의 대학론은 근대 이성에 대한 비판의 맥락 속에서 이성에 대한 비판 역시 대학의 절대적 자유가 보장되었을 때 성취될 수 있다는 주장처럼 읽혀진다. 데리다가 대학의 절대적 자유가 보장되었을 때 대학의 책임과 본질은 회복될 수 있다고 주장했을 때, 그에게는 대학의 책임과 본질의 회복이 인류에 대한 책임과 연결된다는 깊은 신념이 담겨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3)알란 블룸의 대학론: 알란 블룸은 미국 대학 교육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의 비판의 표적이 된 것은 1960년대 학생운동과 연결된 미국 대학의 실태였다. 당시 학생운동이 지향했던 탈권위와 반체제와 같은 정치적 슬로건은 대학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 블룸은 그 운동의 결과로, “옳고 그름은 더 이상 대학의 관심이 아니고, 가치의 차이만이 남는 문화적 상대주의가 팽배하게 되었고, 대학은 존재 의식을 상실한 위기 상황을 맞게 되었다고 간주했다.(185p) 그러나 블룸은 대학이 분명한 사명과 본질을 갖고 있다고 믿었고 이 믿음은 서구 철학의 전통이 자유교양교육이 가능하며 그것을 통해 성취될 수 있다고 보았다. 블룸은 “대학이 고전의 전통을 망각하고 철학 없는 교육만을 강요하면서, 목적 없는 대학이 되어 버렸고 지적이고 도덕적인 권위를 잃었다”고 주장하며 그 결과 대학이 “혼이 없는 학생들을 배출한다”(186p)고 보았다. 블룸은 대학 학부 교육의 내용과 한계를 매우 단순하게 설정하고서 “철학과 신학과 고전문학 그리고 전체의 질서와 관계성을 찾으려 했던 과학의 역사를 가르치면 되는 것으로 보았다.(187p) 블룸은 대학에서 고전을 읽으며 옛 사람들이 인류의 어려운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학생들이 고전을 통해 세상을 향한 올바른 질문을 할 수 있고 스스로 생각할 능력을 키우고 의미 있는 삶을 개척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확신을 가졌다.

블룸의 대학론은 자유교양교육의 힘에 대한 믿음에서 기원한다. 그는 고전을 읽는 것을 통해 학생들이 대학에서 익혀야 할 모든 지식과 대학과는 다른 사회에서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전문적인 직업인 양성소로 전락한 대학, 학생운동의 영향 속에서 상대주의가 팽배해진 대학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자유교양교육이 실행될 수 있는 대학을 꿈꾸었던 것이다.

4) 매킨타이어의 대학론: 매킨타이어는 자유주의 비판가로 널리 알려져있다. 매킨타이어는 개인의 선택권을 골자로 하는 근대적 윤리관을 비판하면서, 개인의 선택권의 강조가 무엇이 옳은 선택인가에 대한 기준을 상실하게 하였다고 본다. 이는 대학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매킨타이어는 근대 이전의 대학이 당시의 역사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보유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 합리적이고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었다고 말한다. 그 기준은 신학만이 아니라 법학과 수학의 교수들도 공유했던 세계관과 학문론에서 출발한 합의에 따른 것이었다.(195p) 그러나 이제 누구도 그 ‘기준’이 가능하다는 전망을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기준의 상실은 ‘덕망을 갖춘 인간’을 배출하는 공간으로서 대학의 기능을 완벽하게 상실하게 한다. 연구 중심 대학은 엄청난 양의 연구를 통해 가시적인 성과들을 내지만, 학생을 어떤 자질과 덕망을 지닌 사람으로 형성할 것인가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매킨타이어는 그의 뿌리를 형성하고 있는 카톨릭 전통의 대학들의 각성을 촉구한다. , “그는 오늘날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학문이 대학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인간과 세상을 향한 공통된 목적의식과 통합성을 지닐 수 있다는 비전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197p) 매킨타이어가 제안하는 해결 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목의 가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공동체가 가지는 일정한 규범이 그 공동체 내부의 인간을 길러낸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하나의 단일한 전통만을 강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매킨타이어는 라이벌 대학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이 개념은 대학들이 각자가 속해 있는 전통과 이념이 담고 있는 최고의 가치와 비전으로 대학의 커리큘럼을 재구성하고, 그 노력으로 합리적 정당화의 기준을 도출해내어 라이벌 의식을 갖고 논의하고 대화하자는 것이다.(200p)

매킨타이어는 자유주의 사상 비판의 맥락에서 대학론을 제시한다. 그의 대학론은 공동체의 규범이 한 인간을 길러내기 때문에, 공동체가 지향하는 덕목들이 있어야 하며 그 덕목에 관한 정당하고 타당한 논의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각 대학은 자신이 추구하는 이념에 걸맞는 커리큘럼을 제공하고 선의의 경쟁을 벌이면서, 어떤 덕목을 갖춘 학생을 길러낼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학문론은 레비나스와 함석헌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그 골자는 인간에 대한 통합적 이해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함석헌의 경우 현실의 대학에서 학문이 세분화 되어감에 따라 한 분야의 전문가는 만들 수 있지만 다양함을 아우르는 지혜를 갖춘 인간을 만들 수는 없다고 본다. 레비나스의 경우 “학문과 배움이란 제도화된 교육 과정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묻고 배우는 것을 말한다. 타인을 향한 열림으로 내 자신의 도리를 묻는 도덕적 삶이 학문적 삶”이다. “배움이란 객관적이고 규격화된 지식을 추구하기보다, 끝나지 않는 대화를 통해 진리에 안주하지 않고 염치없음을 두려워하는 삶을 사는 것, 바로 그것이다. 배움의 삶은 곧 윤리적 삶, 혹은 가장 인간적인 삶의 모습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223p)

함석헌과 레비나스에 근거한 저자의 학문론은 곧 인간에 관한 통합적 이해와 이를 통한 윤리적 삶의 지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학문이 현실의 대학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의 근본 문제의식이다. 현실 속에 존재하는 기업형 대학에서 학생은 전문 직업인으로 길러지거나 한 분야의 전문가이지만 다른 분야에는 문외한인 사람이 된다. 여기서 삶의 가치나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저자가 그리는 이상적인 대학의 상은 곧 현실에 존재하진 않지만, 현인들이 끊임없이 물어왔던, 인간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그의 본질을 가장 잘 구현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대학이다. 이러한 배움의 공간에서 학생들은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함으로써 사회에서 보다 성숙한 삶을 살아갈 수 있고 이러한 구성원들이 살아가는 사회 역시 보다 성숙한 사회가 될 것이다.

 

4.

저자가 『대학의 몰락』에서 말하는 ‘대학의 몰락’이란 곧 ‘인간의 몰락’이자 ‘올바른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종식’이다. 이제 대학에서 그런 질문은 던져지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대학이 그러한 질문을 떠맡아야할 근거가 과연 존재하는가? 라는 것이다. 대학은 왜 그러한 질문을 던져야 하는가? 삶과 배움이 일치했던 과거의 전통이 그러했기 때문에 그러한가? 저자도 인정했듯이, 대학은 현실의 역사적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교황과의 결탁, 국가와의 결탁, 자본주의 및 기업과의 결탁이 곧 대학의 역사였다. 그렇다면 대학이 현실과의 비판적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하나의 ‘이념형’으로서 대학을 설명하는 것이지, 역사 속에서 대학은 단 한 번도 현실과 거리를 둔 적이 없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오히려 대학은 사회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사회의 제반조건에 지대한 영향을 받으며 나름의 위치를 차지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그 결과가 오늘 날의 기업형 대학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실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기 위해서는 가장 많은 자본을 가지고 있을 때가 아닌가? 그렇다면 현실과 비판적 거리를 두기 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 CEO임을 주장하는 총장을 선출하는 수단을 선택하는 것은 지극히 타당한 선택이 아닐까? 더불어 철학과 신학을 통해 인간에 대한 통합적 이해, 올바른 삶의 가치를 물을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근거에서 그러한가? 철학과 신학은 그러한 역할을 맡을 준비와 역량이 있는가? 아니면 생물학적, 물리학적 관점에서의 인간 및 사회에 대한 통합적 설명은 불가능한가?

나는 『대학의 몰락』을 통해 ‘대학이 어떤 곳이었고 현재는 어떤 곳인가’라는 질문에 일정한 답을 얻었다면, ‘대학이 어떤 곳이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유보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 몇 가지 질문들만을 무책임하게 던져놓았지만, 동학들과의 논의 속에서 유보적인 상태로부터 조금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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