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형성과 형성의 물질적 조건들에 관하여
-『지식의 재탄생』에 관한 소고
1.
『지식의 재탄생』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서구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지식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의 생산, 보존, 전달의 과정을 추적”(9p)하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 책은 지식을 관장했던 기관들의
역사”이다. “이 책은 고대 이후 서양의 지적 생활을 지배해 온 여섯 종류의 기관, 즉 도서관, 수도원, 대학, 서신 공화국, 전문학교, 연구소에
대한 상세한 기술이다.”(10-11p) 나는 이 책의
저자들이 가지고 있는 서술 의도와 일정 부분은 유사하게 또 일정 부분은 엇나가는 방식으로 ‘지식의 형성과 그 형성의 물질적 조건들’에 관하여 이
책을 읽었다. 즉,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어떤 지식의
형성은 “그것을 체계화하는 기관을 통해서만 그 효과를 전달할 수 있다”(12p)는 저자들의 주장이고
이러한 주장을 보다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파악함으로써 지식의 형성과 그 형성의 물질적 조건들에 관한 보편적인 형태를 파악하고자 했다. 물론 이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마다 다른 형태를 보이지만, 상이한
차이들을 포괄할 수 있는 메타적 수준에서의 논의 가능성이 그 차이로 인해 차단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2.
1) 가장 먼저 등장하는 지식형성의 기관은 도서관이다.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은 헬레니즘 제국의 ‘정치적 후원’을 바탕으로 데메트리오스라는 인물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발제자가 주목하는 바는 “왜 지배자들은 ‘지식’에 주목하였으며, ‘지식의
생산, 보존’을 위하여 도서관을 짓고 이를 후원하였는가?”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대규모로 계획된 호화스러운 기관으로서 도서관은 그리스의 학문의 패권을 당당하게 주장한 헬레니즘
제국 창건자들의 부와 야망을 반영”(21p)하고 있다.
도서관이라는 제도를 바탕으로 하는 지식은 폴리스라는 도시국가에서 형성된 지식과는 그 형태가 달랐다. 일반적으로 폴리스를 바탕으로 한 지식은 ‘구술’에 의해 형성되었고 ‘글쓰기’는 다른 육체 노동과 마찬가지로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 폴리스를 기반으로 한 사회 체계가 붕괴되면서 보다 큰 규모의 정치적
조직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따라서 “폴리스를 대체한 이 새로운 국가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리스 언어와
문화의 중요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문화적 경쟁의 수준을 개인의 차원에서 왕조의 차원으로 높였다. 이러한
왕조들은 처음으로 그 설립자보다 오래 존속하는 기관들을 세우기 위해 자원을 운용했으며, 그 기관들을
후원하는 보다 장기적인 국운에 큰 관심을 두었다.”(29p) 그
중 돋보이는 것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였으며 이들은 “그리스의 최고의 학자들을 수도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고, 그들에게 상당한 보수를 지급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30p) 통치자들은 자신의 명성을 높임과 동시에 경쟁자들을 호전적인 인물로 묘사하기 위해서 문화자본 - 그 중 대표적인 것인 지식 -에 투자를 했다. 또한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즉 “권력 언어와 교역 언어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학자들이 특별한 역할”(37p)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다고도
설명할 수 있다.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도서관’이라는
성문 중심의 지식을 형성하고 보관하며 전달할 수 있는 기관은 ‘정치적 후원’, 즉 당대의 통치자의 후원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2) 수도원은 6세기에
새롭게 생겨난 기관도, 로마의 붕괴에서 기원한 기관도 아니었다. 따라서
수도원을 하나의 주도적인 지식의 생산, 보관, 유통으로 이해할
때, 정치적인 고려보다는 다른 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수도원은 특히 문명이 부재했던 미개 상태의 최초의 학문 기관”(61p)이었다는 점이다. 수도원에서 생산된 지식은 주로 “수도 공동체에서의 삶을 정교하게 다듬는데 기여”하는 것들이었다. 다양한 규율들이나 제도집들이 문서화되고 유통되었고 예배에 필요한 다양한 의식들에도 정확한 체계를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수도원의 건립은 “유럽의 되살아난 경제”(72p)적 여건과 맞물려
있다. 수도원의 운영은 “세상으로부터의 기부-노동 수사, 토지와 자원, 정치적 군사적 보호-에
의존하는 방식”(74p)이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지식의
생산은 그 생산을 가능한 일정한 물적 토대에 기인하고 있다. 수도원이 도서관과 다른 점은 -이 책의 범위 내에서만 판단하자면- 도서관은 통치자의 정치적 후원에
기대고 있고 이를 통해 정치적 효과를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기대 받았지만, 수도원은 그와는 달리
상당히 개별화된 형태의 사회적 후원을 받았다는 것 -각 지역의 수도원들은 각 지역으로부터 자신들의 지식의
재생산이 가능한 체계를 구축했을 것이다-이다.
3) 중세의 대학은 현대의 대학과는 구분된다. 그것은 첫째, 중세의 대학은 의도적으로 설립된 것이 아니라 학생과
선생의 조직들이 가장 밀집한 지역을 중심점 삼아 자연스럽게 합쳐진 것에 불과했다는 점, 첫째로부터 기인한
두 번째 사항은 도시적 현상이라는 것, 마지막으로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는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이었고 종종 길드와 같은 의미로 이해되기도 했었다. 길드처럼 우니베르시타스에도 명장(교수), 장인(학사), 도제(학생)이 있었고 직업 교육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따라서 “사리사욕 없는 학문, 학구적 자유, 인성 교육, 비실용적 이상주의는 학자들이 무리를 이룬 모임의 의도하지
않은 부산물”(87p)에 불과하다.
중세의 대학 역시 회복한 유럽의 경제적 조건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유럽의
경제는 11세기를 거치면서 급격하게 되살아나 12세기에 절정에
이르렀다. 농업 생산성이 향상되고, 인구가 급증하고, 상업과 무역이 번창하고, 도시가 형태를 갖추고, 교화와 국가의 관료 체제가 전 사회를 촉수를 뻗치면서 돈과 계약을 통한 교류가 늘고[...]사람들은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많은 청년들이 새로운
번영기를 누리며 지식을 좇아 여행을 떠났다.”(88p) 이러한
경제적 번영과 더불어 파리의 신학, 볼로냐의 법학, 살레르노의
의학 그리고 프라하의 인문학이 대표적인 대학으로 자리를 잡았다. 신학,
법학, 의학은 당대의 사회적 여견 속에서 현실적인 효과-직업교육의
현장으로서 대학, 즉 신학자, 목회자, 법률가 그리고 의사-를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고 사회로부터 적절한
보호와 지원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신학과 법학처럼 의학도 사회적 유용성이 지적 탐구를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모든 종류의 대학 학부는 사회 내의 고립된 섬으로서 자치권을 누렸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궁극적으로 그들을 둘러싼 세계에 이바지했기 때문이다.”(109p)
그렇다면 프라하의 인문학은 어떠했는가? 여기에 대한 저자들의 설명은
충실하지 못하다. 부분적인 서술에 의해 추론해본다면, 인문학
중심지로서 프라하 대학은 카를 4세에 의해 주도되었다. 카를 4세는 대학을 설립하였고 새로운 커리큘럼 없이 전통적인 커리큘럼을 모방했다. 직업교육과
상관없는 하위학부로서 인문학 교육이 이루어졌다. 즉, 인문학이
융성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대학을 설립에 있어서 당대의 통치자였던 왕의 정치적 후원과 대학의 전체체계 내에서 하위학부로 자리매김 했기 때문이다. (아마 이것은 당시 모든 유럽의 대학과 동일한 커리큘럼일 것이다) 즉, 대학의 설립에 있어서는 정치적 후원이 그리고 대학이 여타의 사회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은 상급학부의 유용성
때문이었다. 그리고 인문학은 고급 직업 교육을 위한 일반적인 준비과정으로서 충실한 역할을 담당했다.
4) 도서관, 수도원 그리고
대학에 이어 새로운 형태의 지식생산의 기관이라고 불림직 한 것이 생겨났는데, 이는 서신 공화국이다. 서신공화국은 “전례 없는 규모의 파괴적인 변화에 완벽하게 적응한 기관이었다.
서신 공화국의 역사는 분열이 당연히 학문의 진보에 타격을 주었을 시기에 어떻게 유럽의 다양성이 학문의 진보를 가져왔는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 답은 급진적인 만큼 간단하다. 위기 혹은 붕괴의
위험에 처한 기존의 학문 기관들에 비하여, 서신 공화국은 새로운 지식의 생산을 합법성의 근거로 삼았다. 구체적인 형체를 갖춘 기관들 -인쇄소, 박물관, 학술원-이 그
새로운 지식을 실체적으로 제공했다. 서신 공화국은 다른 기관 모두를 포괄하는 역할을 했다. 그 덕분에 국제 협력은 오늘날까지도 서양 학문의 특징으로 남아있다.”(126p)
종교 개혁과 정치적 분쟁의 결합으로 1500년에서 1700년 사이의 유럽은 혼란에 휩싸였다. 각 종교적 분파, 정치적 입장에 따라 학문 문화는 분열을 경험했다. 그러나 이 분열
속에서 서신 공화국은 “출신이나 사회적 지위, 성별 학위에 구별을 두지 않았고 언어와 종교의 차이를
초월했다.”(127p) 이러한 개방성을 장점으로 주고받은
서신들은 “거의 항상 공개적인 회람 혹은 출판 아니면 친구들과의 공유를 염두”(133p)에 둔 형태로
쓰여졌다.
서신공화국은 하나의 기관이나 제도라고 말하긴 어렵다. 그것은 일종의
지적인 교류와 네트워크이다. 개방성이 주요한 특징이라고 지적하지만, 실제로
담론에 참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극히 제한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어떤 정보들이 유통된다는
것만으로 하나의 지식체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대에 “왕궁과 서신 공화국 사이 중간지점”(153p)에 존재했던 학회와 같은 조직들이 일정한 정보들에 권위를 부여하였을 것이다. 권위를 갖는 정보는 여타의 정보들과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쉬울 것이고 이러한 과정이 하나의 유의미한 지식을
형성해낸다. 그럼에도 학회는 독자적으로 자신의 영역을 세웠다기 보다는 “항상 권력가들과 세력가들을 교육함과
동시게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자”(154p)했기 때문에 지식의 형성과 그 물적토대의 관계는 여전히 명증하게
제시될 수 있다.
5)전문학교는 서신공화국을 대체한 기관이다. 전문학교의 출발점은 독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폴레옹에게 패배한
시기의 낙후된 가난한 독일은 세계 최초로 보편적인 공공 의무 교육의 종합 체계 위에 전문학교를 올려놓았다.”(164p) 독일에서 이러한 전문학교가 출발한 것은 ‘민족주의적 감정’로부터 출발하여 “공공 교육을 이용하여 종교, 민족, 계급으로 분열돼 있던 사회를 통일”(164p)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적 감정이 전문학교를 태동시킨 심리적 요인이었다면, 이를 성장시킨
본격적인 요인은 ‘이윤’이었다. 할레 전문학교의 경우 “신자들의 아낌없는 기부와 프로이센 정부의 세금
감면 조치를 이용하여 프랑케는 박애 사업을 위한 기금을 더 모으기 위해 공장과 인쇄소를 세웠다[...]프로테스탄티즘의
노동 윤리가 경건한 신앙심을 자본주의적 근면성에 연결시킨 장소가 있다면, 프랑케 재단이 바로 그러한
곳이다.”(168p) 당대에 할레대학과 경쟁하던 괴팅겐 대학역시
“유럽 전역의 귀족들을 -그리하여 그들의 돈을-끌어모으기
위해 하노버 국립대학으로 세워졌다.”(172p)
전문학교에서는 이제 교원을 양성하고 전문학교의 학생들은 하부의 교육기관들에서 공공교육을 담당하거나 엄밀성을 미덕으로
하는 지식을 연마하였다. 전문학교에서 주로 문헌학적 연습을 통해 고전을 익힌 인문주의자들은 김나지움이라는
하부 기관을 통해 교실에서 세속적 지식을 나누어줄 돌격대가 되었고 청소년들은 고전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김나지움을 졸업한 학생들은 “공무원 혹은 개별 전문가로서 국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유연하고 적응 잘하는 비판적 사상가들”(189p)이 될 수 있었다.
전문학교의 등장과 성장은 한 국가(특히 독일)의 정치적 기획과 함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패배와 국가의 분열을 치유하고 통합하기 위해, 국가적 기획으로서 공공교육의 체계를 마련하였고 가장 상부에서
각 하부기관의 교원을 양성하여 통합된 문화 및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전문학교가 성장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 아니었을까? 따라서 각 학교들은 자체적으로 학교를 운영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하려고 노력하기도 했지만, 이것은 지배적인 기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대의 사회적 흐름 속에서 독일이 자신의 국운을 걸고 시행했던 국가적인
사업이 아니었을까?
6) 마지막으로 살펴볼 기관은 연구소이다. 연구소는 19세기에 어떻게 지배적인 과학 기관이 될 수 있었는가? 이는 리비히의 사례를 통해 볼 수 있는데, “리비히는 화학 연구가
유용하며, 그러므로 대학, 국가, 기업이 지원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리비히는 유기화학을
하나의 학문 분야로 발전시켰고, 농업용 비료, 화학 염료, 의약품을 개발하는 것이 막대한 실질적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증명했다[...]
리비히는 끊임없이 대학 학장들과 주 행정관들에게 연구소를 세우는 데 필요한 기금 마련 운동을 했고,
수많은 밀실 정치 운동 끝에 1830년대 말쯤에 이르러서는 작은 소도시 기센을 화학의 국제적
중심지로 성장시켰다.”(211p)
연구소들은 자신의 연구들이 실질적인 유용성을 갖는 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집중적인 후원을 약속하는 재단들과의 계약을 맺게 된다. 연구소들은 재단 공무원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특정 프로젝트를 준비하였고 순수한 과학의 영역에서도 실용적인 결과들이 기대되었다. 재단의
후원이 없었더라면, 다양한 현지 조사 및 거대한 실험들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양한 현지 조사들은 지식의 발전뿐만 아니라 식민지 행정가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3.
『지식의 재탄생』에서는 서양 역사에서 지식이 적어도 여섯 차례 근본적으로 재발명 되었다고 주장한다. 각 기관들은 이전의 기관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그리고 적응하지도 못했던 변화들에 대응하며 그 자리를 대체했다. 동시에 각 기관은 지식을 추구하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명분과 관습을 창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저자들의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내가 중점적으로
이해해보고자 했던 것은 각 기관들의 물질적 토대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지식사회’라고 불리는
현대에서 지식이 ‘상업화’되었다는 것은 너무도 진부한 주장이다. 이제 우리는 학자나 연구자라는 표현보다는
‘지식노동자’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며, “대다수의 ‘지식 노동자’에게 지적
흥분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은 학문적 자유의 전통적 안식처가 아니라 연구소의 실험주의가 기업의 기업가 정신과 만나 맞물려 돌아가는 곳이다.”(251p) 현재의 지식의 상업화,
지적 자유의 박탈은 최근에 발생하여 진행중이고 곧 사라질 현상은 아닌 것처럼 이해된다. 오히려
도서관에서부터 시작된 각각의 기관들이 각자의 성장의 토대를 이룰 수 있는 물질적 조건들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며,
하나의 주도적인 지식의 형성과 생산 그리고 보존은 그에 적합한 물질적 조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인’ 내지 ‘연구자’는 자기목적적인 ‘자유인’이 아니라 언제나 그 물질적 조건들에 제약되어있었던 ‘시대의 자식’들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 대학의 상업화 내지는 지식의 상업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는가? 이러한 역사적·발생적 탐구가 현재의 상황을 정당화해주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대학의 상업화를 비판할 필요가 없거나 다른 방식으로 현재의 물질적 토대의
변화가능성에 주목하는 더 거대한 작업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 두 가지 것이 모두 부정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전자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의해, 후자는
현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역량에 의해- 우리는 어떤 자리를 점해야하는가? 만약 더 근본적으로 물어야할 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대학의 상업화에 관한 일정한 반감의 토대가 되는 ‘규범적
태도’는 무엇이며 그 현실에 존재하진 않지만 추구할만한 것의 후보 정도는 될 수 있는 ‘그 무엇’에 관한 우리의 합의는 가능한가? 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 규범적 태도가 명확하고 그에 대한 합의가
가능하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운동’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