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이란 누구인가?
-『지식인이란 누구인가- 프랑스
지식인들의 상상력과 도전』
1.
『지식인이란 누구인가』는 프랑스 지식인들의 사례를 통해 “지식인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있는 책이다. 저자가 지적하다시피 “20세기
프랑스 지식인들은 이념적 독재도 모르고 식민지 경험도 없고 외국의 영향력 아래 핍박받지도 않았다.”(8p) 따라서 만약 우리가 지식인이 그가 맺고 있는 사회적 맥락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한국에서의 지식인은 프랑스의 지식인과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지식인은 누구인가?” 아니 도대체 “한국에 지식인은 있었는가?” 이런 특수성에 국한된 질문의 한계를 넘어 진정 “지식인은 누구인가?”
“프랑스 지식인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그 지식인의 전형을 밝혀낼 수 있는가?”
이 글을 통해서 위의 질문에 답을 해보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지만, 그
전망은 불투명한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다만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지식인들의 활동들을 정리하면서 그에
관한 답을 간접적으로나마 찾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2.
1) 19세기 말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을 거치며 자유의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의 삶은 여전히 열악한 저지에 놓여있었다. 그들은
결사의 자유를 비롯한 노조 설립을 위한 자유를 확보하기까지 더 오랜 시간 투쟁 했어야 했다. 페르낭
펠루티에는 노조 운동을 펼치며 노동자의 권익을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한 지식인이었다. 펠루티에가 활약하던
시기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노동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펠루티에의 노조 운동(부루스 운동)이 다른 운동들과 구별될 수 있었던 것은 펠루티에의 원칙
때문이었다. “그의 정신은 집약하면, 혁명은 노동자의 손으로, 노동자의 의식으로 해나가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노동자의 독자성이었다.”(17p)
펠루티에는 당대의 노동문제에 관하여 감정적인 접근보다는 과학적 인식을 추구했다.
당대의 계급적 격차는 분명했고 펠루티에는 이 중 가장 심각한 문제로서 ‘교육의 불평등’ 문제를 고민했다. 당대 노동자 계층의 아이들은 정상적인 교육을 받기 어려웠고 공교육에서 배제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펠루티에는 이 문제를 고민했고 노동자들이 과학적 지식을 습득하고 이를 통해 “노동운동이 과학적 지식을
장전해야 사회에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21p)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펠루티에는 부르스를 만들었다. 부르스는 일종의 지역별 노조였다. 부르스는 취업 서비스를 제공했고 특히 강좌와 도서실을 열어 위에서 언급한 교육의 격차 및 노동자 계급의 독자적인
운동을 위한 지적인 토대를 만들고자 했다. 당대 노동자들은 “직업 강좌에 관심이 많았고 일요일 저녁의
시 낭독회에도 많이 모였다. 그들은 또 산업재해 사고에 대한 구체적 절차, 구식과 신식의 노동 방식이 자신들에게 미치는 영향 등에 관해 지식을 수집하고 강론을 듣기를 원했다.”(29p)
펠루티에는 부르스를 설립하고 다양한 기고글을 쓰면서 자신의 생활을 영위했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혁명의 방법에 대해 고민하였고 그 산물이 ‘총파업론’이었다. 펠루티에는
총파업을 “전반적인 파업이 아닌, 인력과 물자의 유통을 와해시키고 그로써 식량 부족과 억압적 기구의
마비를 도발하도록 하는 몇몇 전략 산업 부분에 국한될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낭만적 봉기가 아닌 폭력을
포함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국가를 타도하고 경제적 권력을 근로자들에게 주는 혁명이었다.”(34p)
펠루티에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활동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노동자의 독자성에 대한 강조와 이를 돕기 위한 교육 문제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 불평등에 의한 지식의 불평등은 곧 경제적 불평등으로 연결되기에 펠루티에의 문제의식은 의미 있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2) 두 번째 지식인의 사례로 소개되는 것은 장 조레스이다. 조레스가 활동하던 당시 유럽은 전쟁의 위협에 휩싸이고 있었다. 전쟁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지만 “위기의 상황에서 반전주의자들이 우세한 고지를 차지하기는 어려웠다.”(46p) 반전 문제에 먼저 대비한 측은 노동운동 측이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사회당의 조레스가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조레스는 하원의원 이었고 사회주의가 프랑스에 뿌리 내리도록 노력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다양한 매체와 연설을 통해 전쟁을 반대했다. 그는 단순히 자본주의
자체에 반대하기 위해서 전쟁을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반전 활동과 사상을 통해 사회주의가
민족과 문명을 수호를 위하려는 것이었다.”(51p) 조레스가
생각하기에 자본주의 세계에세 전쟁은 영구적이고 보편적이었다. 전쟁의 배후에는 무기 상인들이 있고 절대주의
체제가 그것을 후원한다. 조레스의 특이점은 “전쟁의 원인과 책임을 자본주의에서 찾았지만 전쟁을 인류의
문제로 확대”(54p)한 것이다. “전쟁은 그에게 모든 인간에
대한 모든 인간의 전쟁이었다. 전쟁은 한 계급 내에서 개인들에 대한 개인들의 전쟁이며, 한 나라 안에서 계급들에 대한 계급들의 전쟁이고, 인류 안에서 인종에
대한 인종의 전쟁이고, 민족에 대한 민족의 전쟁이었다.”(ibid.)
당대는 민족주의가 강성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대의 민족주의는
주로 우익 민족주의였다. 예를 들어, “독일의 병력이 자국에
비해 강하고 프랑스는 이에 대배해야 한다는 식의 논조”(57p)는 우익 민족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많은 호응을 얻었다. 조레스는 이러한 민족주의에 대항에 지속적으로 반전을 주장했다. 그는 의회 연설을 통해 반전을 주장했으며 2차 인터네셔널에서 그
희망의 불씨를 찾고 있었다. 제 2차 인터네셔널의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민족의 불가침성과 불접촉성, 그리고 평화의 유지를 위해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들이 조직될
의무가 있음을 확인했다.”(65p)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레스에게
민족과 계급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는 커다란 숙제로 남아이었었다. “조레스가 추구하는 민족은
혁명 후의 나라와 동일한 상이었다. 민족의 독립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자라날 수 없었다[...]그는 어떠한 군국주의 국가라도 그 안에서 자유라는 혁명적 힘에 호소하지 않고서는 민족이 성립되거나 구출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옛 조국은 편협하고 이기적인 집단에 의해 착취당했다. 그 조국은 새롭고 우월한 조국으로 바뀌어야 했다. 국제주의는 그러한
각 민족의 독립을 보장하는 것이었다.”(67p)
그러나 결국 독일에 의해 전쟁이 선포되었고 독일의 사회주의는 전쟁에 반대하지 못했다. 조레스는 반전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역량을 믿었다. 따라서
민족문제로 인한 대립과 적의에 대한 대중적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중적 감정은
쉽게 반전을 위한 결의로 모아지기 보다는 타자에 대한 적의와 대립의 감정으로 깊어지기 쉬웠다. 조레스의
사례는 이러한 점에서 많은 교훈을 주고 있고 곱씹어 봐야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3) 세 번째 사례는 파시즘에 대항하는 작가들이다. 그 중 앙드레 지드가 소개되고 있다. 1차 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이탈리아, 독일 등에서 파시즘이 득세하고 있었다. 이에 대항해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반파시스트 감시위원회를 만들고 활동하였다. 여기에는 많은 작가들이 참여하였다. 앙드레 지드는 본래 정치적 활동을 활발히 하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파시즘의 위협이 대두하자 정치의 세계에 들어섰다. 지드는 먼저 식민지 지배에 대한 통렬한 고발과 반성에
대한 글을 썼다. 그는 아프리카 여행을 하면서 본 참상을 적었고 당대 식민지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통념의 장벽을 넘어서려고 했다. 또한 반파시즘 운동에 열성을 보였는데, 그는 독일 반파시스트들을 위한 협회의 수장을 맡으면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지드 뿐만 아니라 많은 문인들과 예술가들은 감시위원회 활동을 통해 문화를 지키려는 의지와 의식을 보였다. “문화의 정의는 전쟁과 파시즘에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것이었다. 문명을
침해하는 모든 위협에 맞서 자신의 영역에서 싸우는 것이었다. 작가들이 수호하려는 문화는, 쇄신된 계몽의 문화였다. 권력에 대한 비판, 분명한 사고와 참여, 대중의 교육과 지적이고 도덕적인 행동, 사회구조를 훨씬 큰 개인의 자유와 정의를 향해 진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이었다.”(96p)
지드를 비롯한 프랑스의 작가와 예술가들은 파시즘에 대항했다. 그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책자를 발간하는 일과 같은 것들이었지만, 이는 앞서 제시한 문화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노력들이었다. 이러한 노력이 얼마나 많은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숙고해 보아야할 문제이지만, “파시즘이라는 전체주의적 체제를 저지할 수 있는 길은 또 다른 전체가 아니라 명료한 의식과 행동양식을 가진
개인들의 구성체”(98p)라는 생각을 확고히 견지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을 것이며, 전체와 개인 사이에서 작가나 예술가들의 위치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하는 길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4) 마지막으로 제시된 사례는 알제리 전쟁기의 청년 지식인들이다. 당대 프랑스인들은 알제리를 프랑스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알제리는
프랑스와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 지배에 들어간 것도 오래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부분 알제리를 여타의 식민지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2차 대전 후 많은 식민지들이 독립을 쟁취하였고 알제리에서도 민족해방 운동이 일기 시작했다. 민족해방운동의 불길은 점점 거세졌고 이에 대항하여 알제리 내의 프랑스 군부는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 중 핵심적인 것은 ‘고문’에 관한 문제였다.
프랑수아 모리악은 고문 제도에 대해 최초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었다. 고문과
폭력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지만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프랑스인들에게서
알제리인들의 저항은 정당하게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제리는 프랑스 국토라는 관념이 버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리악은 이러한 상황에서 고문에 대한 비판과 반대의 논쟁을 계속하였다.
그 후에 오댕 사건이 벌어졌다. 오댕은 알제 과학대학의 조교였으며
공산당원이었다. 그는 고문을 받고 살해되었는데, 그의 부인이
이 사실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오댕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오댕 사건의 진상조사와 고문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다. 그 후 오댕 위원회에는 천 여명의 교사들이 가입하였고 오댕 사건에 관한 진실이 밝혀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주요 프랑스 일간지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기에 오댕 위원회는
이 사건을 알리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그 결과 <신문(訊問)>이 발간되었고 많은 지식인들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부는 이 책에 대하여 입수 조치를 취하였으나 지식인들의 반대 서명이 이어졌고 이 책의 인기는 더욱 높아져
다른 나라에 까지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이러한 고문과 폭력에 대한 고발이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고문은
여전히 합법적인 범죄로 남아있었다. 오댕 사건 이후 자밀라 부파차 사건이 일어났다. 대학생이고 공산당원이었던 오댕과 달리 자밀라는 평범한 알제리 여성이었다. 그는
테러범으로 지목 받고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이에 대해 보부아르는 자밀라의 변호인을 만났고 이 사건을
알렸다. 보부아르의 글은 고문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는데 기여했다.
그 후 알제리에서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프랑스 본토에서도 정치적인 국면 변화가 있었다. 특히 알제리 독립 문제에 관하여 “정치적 해법뿐 아니라 사회적인 도덕성이 일부에서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민족자결권을 향한 열망에 대해 고문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여 지식인과 교회 지도자들, 청년과 학생들이 평화를 요구했다.”(125p)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것이 곧 ‘121인 성명서’이다. “121인은 이 전쟁이 정복 전쟁도 아니며 국방 전쟁도 아니며 내전도
아니며 점점 더 군부 자체와, 봉기 앞에서 양보하지 않으려는 일단의 특수계층이 주도하는 전쟁이라고 규정했다. 그들은 알제리 인민에 반대하여 무기를 들기를 거부하며, 프랑스 인민의
이름으로 억압받고 있는 알제리인들을 지원하고 보호하는 것을 의무로 삼는 프랑스인들의 행위는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성명서는, 결정적인 방식으로 식민체계의 붕괴에 기여하고 있는 알제리 인민의 대의는 모든
자유인의 대의라고 못 박았다.”(ibid.) 서명을 한 121인은 정치적 계파와 상관 없이 많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좌파와 우파 지식인들은 각론에 있어서 입장은 달랐지만, 좌우에 관계
없이 모두 고문에 반대하였고 알제리 인민의 독립이라는 대의에 찬성하였다.
전쟁 이후에도 프랑스의 언론은 고문과 고문 피해자들에 대한 보도를 하면서 이러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이러한 언론의 노력은 “언제 어느 순간에라도 재생될 수 있는 고문과 같은 민감한 매커니즘을 새 세대에게 제시하여
과거를 모르는 세대에게 공공의식을 심어주려는 것”(131p)이었다.
3.
프랑스의 지식인들의 사례로 보건대, 저자가 생각하는 ‘지식인’이란
당대의 민감한 이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사람을 의미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참여’의
지평이 무제한적으로 ‘개방’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시간이 흐른 뒤,
그들의 ‘참여’가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목적’을 갖고 있을 때, 그들은 ‘지식인’으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나치의 인종차별에 기여한 우생학자를
지식인이라고 평가했을까? 물론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지식인은 누구인가?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라는 이념은 누구에게나 몫을 내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앞서 말했던 ‘참여’가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목적’은 늘 역사적인 평가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인가? 여전히 많은 질문들이 이어지지만, 앞으로의 논의를 통해 보다 정교한
질문들이 던져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