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개념에 관한 새로운 이해의 가능성

-과학혁명의 구조를 중심으로

 


 

1.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연구활동 자체의 역사적 기록으로부터 드러날 수 있는 전혀 다른 과학의 개념(the concept of science)을 그리는 것”(21p)을 목표로 하고 있다. 토마스 쿤의 주된 비판 대상은 과학을 축적에 의한 발전이라는 개념”(22p)을 가지고 이해하는 과학사학자들의 작업이다. 쿤은 축적성을 떠난 발전의 노선을 추적하여 새로운 과학사 서술을 시도한다. 그의 작업에서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과학의 발전에서 역사적인 요소들이 차지하는 의미라고 재정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따르면 “[과학적 탐구의 기초가 된다고 믿어지는]관찰과 경험만으로는 [과학적]믿음의 특정한 무리를 결정할 수가 없다. 개인적 그리고 역사적 사건으로 이루어진, 겉보기로는 임의적인 요소가 항상 주어진 시대의 어느 과학자 사회에 의해서 신봉되는 믿음 가운데 그 구성성분으로 끼어든다”(25p,[]는 인용자 첨가)는 것이다. 이러한 쿤의 작업은 축적에 의한 과학의 발전이라는 기존의 믿음과 앞으로의 발전의 가능성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의도하고 있다. 오히려 무균상태의 실험실은 가치중립적인 지식의 생산이 가능한 장소가 아니라 이미 항상 주어진 패러다임의 제약 속에서 실험의 목표와 방법 등이 미리부터 설정되어있는 곳이다. 이렇게 과학의 발전에서 역사적인 요소가 차지하는 의미들을 부각시킴으로써 일련의 새로운 개념들이 제시되는 데, 패러다임(paradigm), 정상과학(normal science), 비상과학(extraordinary science) 그리고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 등이 주요한 개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쿤의 새로운 과학적 지식의 발전에 관한 하나의 이론을 요약·정리하고 이에 관한 비판적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이 비판적 의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의 지식이 형성됨에 있어서 역사가 차지하는 의미와 역사적인 것들 속에서 제약된 구체적인 개별자들이 어떻게 반응할 수 있는지에 관한 보다 예리한 이해가 가능해지기를 희망한다.

 

2.

 쿤에 따르면, “정상과학은 과거의 하나 이상의 과학적 성취에 확고히 기반을 둔 연구활동을 뜻하고 그 성취란 몇몇 특정한 과학자 사회가 일정 기간 동안 과학의 한 걸음 나아간 활동을 위해 기초를 제공하는 것으로 인정한 것을 말한다.”(33p)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 뉴턴의 프린키피아등이 그러한 성취에 해당한다. 이러한 저술들이 이루어낸 성취는 다른 여타의 경쟁 이론들의 옹호자들을 완벽하게 제거했다는 점에서 전대미문의 것이었고 동시에 모든 유형의 문제들을 연구자들의 재편된 그룹이 해결하도록 남겨놓을 만큼 열려진(open-ended)것이 있었다.”(34p) 쿤은 이러한 두 가지 특성- 다른 경쟁 그룹을 제압할 수 있는 능력, 후속 연구자들이 달려들어 풀 수 있는 열려진 문제들의 존재-을 띠는 성취를 패러다임이라고 부르고 이 패러다임은 정상과학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패러다임이라는]이 용어를 선택함으로써 나는 실제 과학 활동의 몇몇 인정된 실례들-법칙, 이론, 응용, 기기법 등을 모두 포함하는 사례들-이 그로부터 과학 연구의 특정한 정합성의 전통이 나타나는 모델을 제공한다는 점을 시사하고자 한다.”(ibid.) 이로써 쿤은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기존의 선형적 발전 모델에 관한 비판적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쿤은 패러다임의 개념을 보다 적절히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정상과학이 굳건히 건립되기 이전을 고찰한다. 과학의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는 여러 특징적인 학파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는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현상들을 기술하고 해석”(41p)한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의 분기 현상은 점차로 가라져 간다. 이 분기 현상의 사라짐이 곧 정상과학에로의 길(the route to normal science)이다. 이 차이의 사라짐은 그 학파 고유의 특성적 신념과 선입견 때문에 지극히 방대하고 미완성인 정보 더미의 어느 특수 부분만을 강조했던 패러다임 이전 학파들 가운데 하나의 학파의 승리에 기인한다.”(ibid.) 이렇게 하나의 학파가 승리를 거두면, 이전의 경쟁하던 학파들은 점진적으로 사라져가고 경쟁하던 학파에 속하던 연구자들은 승리한 학파로 전향하기도 한다. 이 정상과학에로의 길은 패러다임이 가지는 일종의 배타성을 적절히 보여준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 분야의 새롭고 보다 확고한 정의를 내포한다. 자기들의 연구를 새로운 패러다임에 적응시키는 것을 원치 않거나 또는 적응시킬 수 없는 사람들은 고립된 채로 계속해야 하든가 아니면 스스로를 어느 다른 그룹에 소속시켜야 한다.”(43p)

 “그렇다면 한 그룹의 단일한 패러다임의 수용이 허용하는 보다 전문화되고 심오한 연구의 성격은 무엇인가? 만일 그 패러다임이 일단 완전히 수행된 연구를 대표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통합된 그룹에게 어떤 문제들을 해결 과제로 남겨놓는가?”(49p) 이와 같은 질문을 통해 우리는 정상과학의 본성(the nature of normal science)를 이해할 수 있다. 하나의 패러다임은 주어진 문제들을 푸는데 있어서 여타의 경쟁 상대들보다 훨씬 성공적이라는 이유에서 전문가들 사이에서 그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정상과학은 주어진 문제들을 더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약속이며 그 약속의 실제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의 패러다임 안에서 연구자들은 사실들에 대한 지식을 확장시키고 사실들과 패러다임의 예측 사이에 일치 정도를 증진시키면서 그리고 패러다임 자체를 더욱 명료화”(50p)시키면서 정상과학을 유지해나간다. 정상과학은 세 가지 핵심적인 속성들을 갖는데, 1) “패러다임은 사물의 본질에 대해서 특히 뚜렷하게 드러내 보여준 것으로 밝혀진 사실들의 부류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그 사실들을 적용함으로써 패러다임은 그 사실들을 보다 정확하게 그리고 보다 다양한 상황에서 결정한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52p) 2) “패러다임의 존재는 풀어야 할 문제를 설정해준다.”(53p) 3) “패러다임은 모호한 이론의 일부를 해결하고 이전에는 단지 관심에 그쳤던 문제들에 대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준다.”(54p) 이러한 정상과학의 본성을 정리하면, “의미 있는 사실의 결정, 사실의 이론에의 일치 그리고 이론의 명료화”(61p)라고 요약할 수 있다.

 정상과학 내에서, 즉 하나의 패러다임 내에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일종의 퍼즐풀이와 같은 것이다. 쿤은 그것을 퍼즐풀이로서 정상과학(normal science as puzzle-solving)이라고 표현한다. 패러다임은 문제를 설정하고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도 제공한다. 따라서 여기서 제공되는 문제들은 과학자 사회가 과학적이라고 인정하거나 또는 그 구성원들에게 참여하라고 권장하게 될 유일한 문제들이 된다.”(68p) 정상과학이 하나의 퍼즐풀이라면, 거기에는 분명한 해답도 있고 또 그 풀이에 관한 일정한 규칙도 존재한다. 패러다임이 바로 그 해답이 확실히 있다는 것과 풀이의 규칙을 제공한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패러다임 내에서 주어진 규칙에 입각하여 해답이 있다는 확신으로부터 추동되어 문제에 집중할 수 있다. 그 다음 단계로 과학자 개인이 도전하는 것은 나머지 퍼즐들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 점이며, 그 규칙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이러한 규칙을 부여하는 것은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과학적 작업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는 이러한 패러다임의 실재(reality)여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모든 과학자들이 자신의 문제풀이가 어떤 규칙에 의해서, 또 문제 자체가 어떻게 주어졌는지를 알고서 푸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패러다임은 우선성(the priority of paradigms)는 분명한 것이다. 실제적인 과학적 작업들이 패러다임의 우선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일반적인 교과과정에서 원리 자체를 배우기 보다는 그것의 응용과 실제적인 풀이를 통해서 원리를 간접적으로 체득하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의 우선성이 더 중요한 이유는 정상과학이 무리없이 잘 수행될 때가 아니라 정상과학이 위기에 닥쳤을 때이다. 정상과학에서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이에 대한 설명을 해보려고 시도할 때, 과학자들은 자신이 지금까지 풀어왔던 문제 설정, 문제 풀이의 규칙 자체를 의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anomaly)의 지각이 곧 새로운 발견이다. 즉 발견은 자연이 정상과학을 다스리는 패러다임-유도의 예상들을 어떤 식으로든 위배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그것은 다음 단계로 이상 현상의 범위를 다소 확장시켜 탐사하는 것과 더불어 지속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상이 기대치가 되도록 패러다임 이론이 조정되는 경우에만 종결된다.”(90p) 우리가 과학적 발견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례들, 예를 들어 산소의 발견, X선의 발견 그리고 라이덴 병의 발견은 모두 공통적인 특징들을 갖고 있다. 그 특성이란 이상 현상에 대한 사전 인지, 관찰적 및 이론적 인식의 점진적 및 동시적 출현 그리고 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흔히, 저항을 수반하는 패러다임 범주와 과정의 변화를 포함한다.”(101p) 일반적으로 하나의 패러다임은 그것이 여러 문제들을 해결함에 있어서 상당히 성공적이란 이유에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그 아래서 수행된 관찰과 실험은 대부분은 주어진 문제들을 잘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후에 정교한 장치들이 제작되고 이론이 더욱 명료화된다. 이런 전문화는 문제들을 푸는 데 더욱 유용한 도구가 되지만 과학자들의 시야를 크게 좁히는 결과도 초래한다. 따라서 과학은 점점 더 경직화된다. 이런 상황에서 이상이 발견된다. , “이상은 패러다임에 의해서 제공되는 배경에서만 나타난다. 패러다임이 정확하고 영향력이 클수록 그것은 이상 현상에 대하여, 따라서 패러다임 변화의 가능성에 대하여 보다 예민한 지표를 제공한다.”(104p)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문제와 그 문제의 규칙들로 설명될 수 없는 여러 현상들이 발견됨에 따라 패러다임은 위기를 겪는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이루어졌을 때, 기존의 플로지스톤 이론에서 라부아지에의 산소에 대한 발견이 제시되었을 때 그리고 뉴턴 역학의 절대 공간 개념에서 아인슈타인의 공간개념이 제시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 가지 실례는 전형적인 사례들이라고 볼 수 있는데, “각 경우 새로운 이론은 정상적 문제 풀이 활동에서의 현저한 실패를 본 후에야 비로소 출현했다.”(117p) , 하나의 패러다임이 위기(crisis)를 겪게 되면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과학적 이론이 발생(emergence of scientific theories)한다.

 위기가 새로운 이론의 출현에 필수적인 선행조건이라면, 과학자들은 위기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 먼저 정상과학은 이론과 사실이 보다 가깝게 일치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것은 패러다임 내에서 확증 또는 반증에 대한 시험이나 조사들이 그러한 노력의 증거임을 보여준다. 만약 이상 현상이 위기를 유발시킨다면, 그것은 단순히 변칙 이상의 것일 수밖에 없다. 만약 변칙적인 것이나 단순히 풀리지 않은 문제라면 그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 곧 설명가능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이상현상이 그 이상의 것이라면, 하나의 이상 현상이 정상과학의 또다른 퍼즐 이상의 것으로 보이게 되는 때에, 위기로 그리고 비상과학으로의 이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상 현상은 그 자체로서 이제 전문 분야에 의해서 점점 일반적으로 수용되기에 이른다. 그 분야의 가장 탁월한 많은 학자들이 그것에 차츰 더 많은 주의를 쏟게 된다.”(128p)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패러다임이 제공한 규칙들과 문제 설정 자체에 대한 의문이 쏟아지게 된다. 일부는 한 패러다임 내에서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시도할 것이고 패러다임을 명료화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럼에도 이상현상이 설명되지 않는다면, “정상과학의 규칙들은 점증적으로 모호해진다. 패러다임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실제로 연구에 종사하는 이들 가운데 그것에 관하여 전적으로 합의하는 사람은 극소수인 것으로 들어나게 된다. 이미 풀린 문제들의 표준 풀이조차도 의문의 대상이 되고 만다.”(ibid.) 결국 모든 위기는 하나의 패러다임이 모호해짐과 더불어 그리고 정상과학이 제공하는 규칙들이 느슨해지면서 시작된다. 이상 현상이나 위기에 직면하면, 과학자들은 현존하는 패러다임에 대하여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고 그들의 연구의 목표나 성격도 달라지게 된다. 이로부터 여러 경쟁적인 이론들이 쏟아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쿤은 비상적 연구라고 부르며 정상과학, 위기, 비상적 연구/비상과학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은 축적적 과정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이러한 위기의 급증, 비상적 연구는 과학학명을 야기시킨다. 그렇다면 과학혁명은 무엇이고 그리고 그것은 과학의 발전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141p) 쿤에 따르면 여기서 과학학명이란, 옛 패러다임과 양립되지 않는 새 것에 의해서 전반적이거나 부분적으로 대치되는 비축적적인 발전에서의 에피소드들”(ibid.)이다. 그렇다면 왜 혁명인가? 정치적·사회적 영역에서 사용되는 혁명이라는 개념을 과학적 탐구의 영역에 사용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과학혁명이란, 기존 패러다임이 자연 현상에 대한 다각적인 탐사에서 이전에는 그 방법을 주도했으나 이제 더 이상 적절하게 구실하지 못한다는 의식이 과학자 사회의 좁은 분야에 국한되다가 점차로 증대되면서 시작된다. 정치적, 과학적 발전의 양쪽에서 위기로 몰고 갈 수 있는 기능적 결함을 깨닫는 것은 혁명의 선행조건이다.”(142p) 위기를 태동시킨 정치적 시스템 혹은 정상과학의 패러다임을 깨닫는 것은 양자에게 동일한 것이며 정치에서 기존 체제와 새로운 체제를 세우려는 편으로 양극화되면 정치에의 의존이 무너져버리듯, 과학에서도 기존의 패러다임을 고수하려는 측면과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려는 측이 대립할 경우 그것은 양립할 수 없는 선택의 문제가 되고 이는 기존 패러다임에의 의존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각 측의 주장은 전혀 다른 패러다임에 기초해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혁명이라 불리는 사태, 새로운 종류의 현상이나 새로운 과학 이론의 동화가 그것들보다 구식인 패러다임의 폐기를 강요해야만 하는 본연적인 이유가 존재하는가?”(144p) 이는 과학이론의 본성을 탐구함으로써, 과학혁명의 필연성(necessity of sciectific revolutions)을 설명할 수 있다. 쿤에 따르면 새로운 과학적 이론이 제시될 수 있는 상황은 오직 한 가지 뿐이다. “이것들은 인식된 이상 현상들로서 그 특성적 성격(characteristic feature)은 기존 패러다임에 동화되기를 강경히 거부한다는 점이다. 이 현상만이 새로운 이론들의 작인이 된다.”(148p) 이러한 상황에서 탄생한 이론들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이론, 코페르니쿠스 그리고 라부아지에의 이론들이다. 이러한 이론의 탄생은 기존의 패러다임과 양립할 수 없는 개념적 변환을 몰고오며 이는 결정적인 파괴력을 갖는다. 쿤은 그러한 개념적 변환 자체를 과학에서의 혁명적 재배치의 원형으로 보아도 좋을 것”(154p)라고 주장하며, 낡은 이론에서 새로운 이론으로의 전환을 과학혁명이라고 명명한다. 이렇게 패러다임의 전환 혹은 과학혁명이 발생하면, 이전의 패러다임 내에서 과학적 작업과 현존하는 패러다임 내에서의 과학적 작업은 전적으로 양립되지 않은 것(incompatible)일 뿐만 아니라 비교 불가능한(incommensurable)것이 된다. 왜냐하면 제시되는 문제 자체가 다를 뿐만 아니라 하나의 패러다임 내에서 퍼즐풀이는 전적으로 다른 규칙들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패러다임은 단순히 인식적 측면에서 기능할 뿐만 아니라 규범적 측면에서도 기능한다.

 이러한 과학혁명 혹은 패러다임의 전환은 세계관의 변화(changes of world view)이다. 물론 이전 패러다임 속에서의 과학자와 현존하는 패러다임 속에서의 과학자가 전혀 다른 세계를 살고 다른 것을 관찰한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릴레이는 똑같이 떨어지는 돌을 관찰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떨어지는 것을 돌의 본성(, 상태의 변화에 주목)으로 설명하였고 갈릴레이는 임페투스 이론의 영향을 받아 운동, 즉 하나의 과정에 주목하였다. 이는 직접적 경험이 가치 중립적이라는 기존의 상식을 뒤엎는 것이며, 어떤 사태에 대한 관찰이나 실험이 전적으로 패러다임이라는 제약 속에서(이를 적극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면 조건속에서) 이루어지고 해석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뚜렷한 세계관의 변화를 야기시키는 과학 혁명은 실제로 비가시적인 성격(invisibility)을 갖는다. 이는 일반적인 과학 교육 방법 때문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과학 교과서를 배우고 그 권위를 의심하지 않는다. 과학교과서는 이미 명료화된 일단의 문제들, 데이터, 이론 그리고 가장 빈번한 경우로는 그것들이 쓰인 시기의 과학자 사회에 공양되어 있는 일련의 특정 패러다임에 관해서 논의하게 된다. 교과서들 자체는 당대의 과학적 언어의 어휘와 구문을 전달하는 것을 겨냥한다[...]그러나 교과서는 정상과학의 영속을 위한 교육적 수단으로서 언어, 문제 구조 또는 정상과학의 기준 등이 바뀔 때마다 그에 따라서 전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다시 쓰여야 한다. 요컨대 교과서들은 매 과학혁명을 거칠 때마다 바뀌는 것이며, 이렇게 새롭게 쓰인 교과서들은 필연적으로 그것들을 생산했던 혁명의 역할뿐만 아니라 혁명의 존재 자체까지도 가려버리고 만다.”(198-199p)

 그렇다면 과학혁명은 어떻게 해결되는가? 앞서 논의에 따르면 기존 패러다임과 현존 패러다임은 비교불가능한 것이며 양립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각 과학자들은 어떤 영역에서는 서로 다른 것들을 보며, 또 서로 다른 관계에서 그것들을 본다.”(215p) 그것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혁명적이며 동시에 하나로부터 다른 것의 이행(transition)’ 혹은 개종(conversion)’을 거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이행 혹은 개종이 가능한 것은 옛 패러다임을 위기로 끌고 간 문제들을새로운 패러다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해결할 수 있다는 점”(218p)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두 패러다임을 날카롭게 구분시켜줄 수 있는 결정적인 실험들이 새롭게 해석되고 실증적인 증거까지 확보된다면 이행이나 개종이 더 쉽게 가능해진다.

 우리는 이러한 패러다임의 이행을 하나의 발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양립 불가능하며 비교 불가능한 것 아닌가? 분명한 것은 과학혁명은 대립되는 두 진영의 어느 한쪽이 전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종식된다.”(235p)라는 것이다. 이 승리에 발전이라는 개념을 쓸 수 있는가? 이는 과학자 사회의 본성을 설명함으로써 답을 얻을 수 있다. 과학자 사회는 세부적인 문제들에 집중하고 있으며 그들이 제시하는 해법은 많은 사람들에게 풀이로서 수용되어야 한다. 그들은 이미 게임의 규칙을 공유하고 있고 과학자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주어진 규칙을 학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과학자 사회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통해서 해결되는 문제의 수요와 정확도를 극대화하는 고도의 효율적인 매커니즘”(237p)에 의해 작동한다. 그러므로 패러다임의 변화는 과연 주어진 문제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그리고 정확하게 풀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과학자 집단의 결정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다. “이 방향은 과학적 진보라는 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 온 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한 유형의 발전이 그러한 활동이 존속하는 한 필연적으로 과학 활동을 특징지을 것임도 동시에 보여준다. 과학에는 다른 유형의 발전이 있을 필요가 없다. 보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우리는 패러다임의 변화들이 과학자와 과학도들을 점점 더 진리에 가깝게 인도하고 있다는 관념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239p)

 

3.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를 통해 기존의 축적적 발전이라는 과학적 지식의 생성과 진보에 대한 통념을 비판하고 그것을 패러다임의 전환이란 개념을 통해 다시 서술하고 있다. 쿤의 관점을 우리가 수용한다면, 패러다임이라는 일종의 제약혹은 조건아래서만 우리는 지식을 확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의 확장이 보편적이면서 필연적인 진리로 다가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탐구는 이미 패러다임에 의해서 방향지워져 있고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것 역시 패러다임이라는 색안경에 의해서 조정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식을 생산하고 보존하는 모든 활동은 이와 같이 미리 방향 잡혀져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는 특수한 영역, 즉 과학이라는 영역에만 국한된 것인가? 쿤의 논의에서 나는 패러다임이 일정한 물질적 성격 혹은 규범적 기능까지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이데올로기와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패러다임을 하나의 이데올로기’(여기서 이데올로기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을 미리 방향잡고 있는 어떤 것으로서 의미를 갖는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면, 이데올로기 비판은 어떻게 가능한가? (쿤에 의해서 그러한 가능성은 이미 차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패러다임은 양립 불가능하고 비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더 나아가서 우리가 앞서 보았던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과 같은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형태의 이념형을 제시하는 것도 일종의 패러다임이라고 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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