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작>에 이은 손선영 작가의 두번째 장편 추리 소설입니다. '욘사마' 백용준 형사 시리즈 3부작 중 두번째구요. 마지막 3부인 <클라인펠터 증후군>은 조만간 출간 예정이라고 하네요. 전작이 화려한 미사여구, 무거운 주제, 잔인한 묘사등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였다면 이번 작품은 보다 쉬운 문장, 간결한 문체, 스피디한 전개 등으로 좀 더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간 느낌......인줄 알았습니다만 그게 또 그렇지 않네요. 문장은 쉬워 보여도 스토리는 상당히 복잡하고 거미줄처럼 얽혀있습니다.
10년간 노숙자로 살았던 이지훈은 남보라를 만난 후 새출발을 다짐, 말소된 주민등록을 복원시키기 위해 동사무소를 찾았다가 졸지에 살인자 이대형으로 몰리고...그는 원치않는 도망자의 길로 접어듭니다. 이에 주인공 백용준 형사와 10년전 사건을 해결키 위해 서울로 올라온 황재현 형사가 이 도망자를 추적합니다. 과연 이지훈은 왜 살인자 이대형이란 누명을 쓰게 됐으며 그 배후에 도사리는 거대한 음모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옴니버스 형식 네 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결국 마지막 하나의 결말로 관통하는 이 책은 추격을 기본 코드로 하는 본격과 사회파가 적절히 배합된 미스터리 스릴러물입니다. 추격 스릴러물의 백미는 현장감과 속도감이고, 특히 현장의 친숙도가 소설의 이해와 몰입에 첩경인데 운좋게도 소설속의 메인 배경이 되는 지역이 제 주요 생활권입니다^^. 방이 사거리, 방이 시장, 잠실역, 문정동 로데오 거리, 방이동사무소, 경찰 병원, 송파 경찰서 (음주 운전으로 두 번 방문했지요. ㅋ) 등 너무나 친숙한 지명과 장소가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쫒기는 이지훈이 방이 사거리에서 택시를 타고 급히 가락시장으로 가자는 장면이 있는데 제 머리속에 동시간으로 완벽한 네비게이션이 그려집니다. 신호등 세 개에 좌회전 한 번, 5분 거리 ㅎㅎ이해가 팍팍 되네요.
하지만 좋은 점은 거기까지. 전체적인 내용은 상당히 복잡, 난해합니다. 왜 이지훈이 이대형이라는 살인자로 쫒겨야 하는가 하는 단편적인 문제를 떠나 그 뒤에 숨어있는 범죄의 전체 메커니즘을 이해해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4부에서 백 형사와 황 형사로부터 사건의 전모를 듣는 형사과장이 여러번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제가 바로 그렇습니다. 1부와 4부를 두 번씩 읽었으나 전체 윤곽만 희미하게 잡힐 뿐 구체적인 범죄의 생성 과정이라던지 전체 범죄의 흐름과 그 구성원의 역할, 이해 관계등을 정확히 이해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따르네요.
국가에서 관리하는 지문과 주민등록제도를 (행안부는 주민등록을, 경찰청은 지문) 특정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이를 악용, 지문과 주민등록 조작으로 신분을 맞바꾸거나 신분 세탁을 함으로써 살인이나 보험사기 같은 폐해를 줄 수 있다는 사회적 문제성을 제기한 작품으로 보이는데 그 이야기의 구조와 전개가 상당히 복잡합니다. 작가님이야 세부적인 구조와 문제점등을 정확히 파악한 뒤 전체 아웃라인을 잡고 이야기를 끌어가지만 과연 일반 독자가 이 생소하고 복잡한 구조의 얘기를 단 한 번만 읽고 작가의 의중대로 잘 이해하며 따라올지 의구심이 듭니다. 그만큼 묵직한 주제에 걸맞게 내용도 복잡하고 전개도 복잡합니다. 일독을 마친 지금도 누가 이지훈이고 누가 이대형이고 누가 이동훈인지 헷갈리며 10년전 사건의 결말 및 다수의 인명 피해를 낸 아파트 총기 사건의 진위 역시 명쾌히 머리속으로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사회성 짙은 스케일 큰 주제, 누명을 쓴 도망자, 10년전 사건의 진범, 복잡하게 조직화되고 얽혀있는 범죄 구성원들과 그 역할, 그리고 마지막 드러나는 진실과 숨은 배후 세력까지... <합작>도 그랬지만 손작가님 책은 결코 쉽게 술술 읽히는 가벼운 책이 아닙니다. 추리소설 속에 철학이 있고, 문제 제기가 있고, 인간에 대한 윤리적 고찰이 있습니다. 그 와중에 간간이 등장하는 "가뭇없이, 발맘발맘, 나부대대, 찰나생멸"등의 흔히 쓰지 않는 우리말의 등장은 작가의 넘치는 국어 사랑으로 보여지고요. 이 책에는 <용의자 X의 헌신>의 초강력 스포일러가 나온다는 것을 귀뜸해 드리며(^^) 이상 감상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