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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차관의 살인 ㅣ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절판된 관시리즈中 한 권인 <수차관의 살인>이 한스미디어에서 개정 출간되었습니다. 2008년 신장개정판을 번역한 것이네요. 저는 몇 년전 <시계관>과 <십각관>을 재밌게 읽고는 관시리즈에 매료되어 그 즉시 구립 도서관에서 다 헤져서 너덜너덜해진 학산판 절판본 <수차관> <미로관> <흑묘관> <인형관>을 빌려와 손에 땀을 쥐며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당시 너덜너덜한 책이라도 흥미진진하게 읽었는데 이렇게 개정판을 빳빳한 새 책으로 다시 읽으니 기분이 상쾌해지고 재미가 배가되는 느낌입니다.
<수차관의 살인>은 데뷔작 <십각관의 살인>에 이은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참고로, '관 시리즈'는 십각관(1987년) → 수차관(1988) → 미로관(1988) → 인형관(1989) → 시계관(1991)(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 → 흑묘관(1992) → 암흑관(2004) → 깜찍관(2006) → 기면관(2011) 順입니다. (저는 깜찍관과 기면관 빼고는 다 읽었습니다.)
간단한 줄거리를 보면...과거 큰 교통사고로 얼굴과 다리를 다친 후지누마 기이치는 고무 가면과 휠체어에 의지한 채 어린 아내와 함께 외딴 골짜기에 수차관을 만들고는 은둔생활에 들어갑니다. 수차관에는 당대의 유명한 화가셨던 아버지의 유작들이 보관되어있고 호시탐탐 작품을 노리는 몇 명의 열혈추종자들이 방문한 자리에서 끔찍한 참극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뒤 같은 날, 사건 당사자들이 수차관에 다시 모이면서 1년 전의 악몽이 재현됩니다.
검정색 바탕에 세 개의 빨간색 수차를 수놓은 표지와 강렬한 빨간색 속표지는 이 작품의 분위기를 그대로 대변해줍니다. 시종일관 번개가 치고 폭우가 내리는, 외부와 고립된 수차관에 모여든 사람들...휠체어를 탄 가면의 관 주인, 의문의 추락사, 소각로의 불탄 시체, 감쪽같이 사라진 남자, 도난당한 그림 등 독자의 흥미를 자극할 본격추리의 요소들이 많습니다.
데뷔작 <십각관의 살인>이 육지와 섬, 두 군데 장소를 오가는 교차 서술 방식이었다면 <수차관>에서는 현재와 1년전 과거를 교차 서술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어찌보면 단순한 구성의 데뷔작에 비해 <수차관>은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 오가는 시점, 1인칭과 3인칭의 교차 서술, 다소 평범했던 십각관 건물 구조에 비해 좀 더 괴이하게 변형된 관의 구조, 여기에 다양한 복선과 아기자기한 트릭들이 (번역가 님 얘기대로) 깨알같이 들어있습니다. 다시 말해, <십각관>이 강력한 홈런 한 방으로 점수를 내는 작품이었다면 <수차관>은 단타 여러 개로 득점을 뽑아내는 작품이라고 할까요. 게다가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암흑관>과 함께 관시리즈 중에서 가장 공포스럽고 오싹합니다.
아야츠지 유키토와 '관시리즈'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실망하지 않을 작품입니다. 그렇다고 관시리즈中 최고로 꼽히는 <시계관>이나 <미로관>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24년전에 쓰여진 작품이라 사용된 트릭이나 구성이 그동안 많이 노출되고 보편화된 이유도 있겠지만 아마도 이야기가 좀 쉽게 흘러가서 눈치빠른 독자면 범인 맞히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보통 '독자와의 대결'에서 작가가 완승하기 마련인데 이 책은 독자가 승리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작가의 심기일전한 작품으로 이어서 <미로관의 살인>이라는 걸작이 탄생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범인을 쉽게 맞힌다쳐도 다양하게 깔린 세부적인 복선과 트릭을 추리하며 따라가는 재미는 분명 존재합니다.
처음엔 학산판으로, 이번에 한스미디어판으로 읽었으니 총 두 번을 읽었네요. 예전에 학산판으로 처음 읽었을 때는 느낌이 그저그랬는데 (책 상태도 한몫했겠죠) 이번에 재독을 하는 과정에서 (이미 기본 줄거리와 범인을 알고 있는 상태) 작가가 의도한 집필 방향이라든가, 숨겨놓은 복선이나 트릭등을 꼼꼼이 검증하며 따라가다보니 예상외로 만족도가 더 높아졌습니다. 막판에 한 방만이 존재하는 <십각관>에 비해 깨알같은 재미가 들어있는 <수차관>도 못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사족으로, 이 책이 현재와 1년전 과거의 같은 날을 시간대별로 교차 서술하는 전개 방식이니만큼 그냥 목차대로 읽지말고 먼저 과거 부분부터 주~욱 읽고 (2,4,6,8,10,12장, 프롤로그 順) 그 다음에 현재 부분 (1,3,5,7,9,11,13장, 인터로그 順)을 읽으면 그것도 그 나름대로 재미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