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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관의 살인 ㅣ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의 대표 주자'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시리즈 네 번째 작품이자 『흑묘관의 살인』과 더불어 가장 이색작으로 꼽히는 작품. 1989년작. 예전에 절판된 학산판으로 읽었지만 새로운 판형과 번역의 한스미디어판으로 다시 읽으니 확실히 느낌이 새롭다.
병약한 주인공 히류 소이치는 부친이 사망하자 자기를 키워준 이모님과 함께 본가인 히류 가로 돌아온다. 본가는 안채와 녹영장으로 나뉘는데 녹영장에는 관리인 부부와 세 사람의 하숙인이 기거하고 있다. 그리고 본가 건물에는 수많은 인형이 있는 아뜰리에 포함 조각가였던 아버지가 만든 신체의 일부가 없는 불완전한 형태의 마네킹 인형 여섯 개가 고인의 유지에 따라 복도 여기저기에 배치되어 있다. 그래서 '인형관'이라 불리기도 한다.
본가 생활이 시작되고 우연히 옛 죽마고우를 재회하면서부터 소이치는 과거에 봉인됐던 흐릿한 기억의 단편들이 떠오르고...알 수 없는 정신적 위화감이 시작될 즈음 인형관 주변에서 의문의 아동 연쇄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이와 때를 맞춰 소이치에게 정체불명의 협박 편지가 날아오고 누군가의 살의을 품은 악의적인 장난이 시작되더니 급기야는 인형관에서 첫 희생자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연속 살인...인형관에 돌아온 후 언뜻언뜻 떠오르는 흐릿한 기억들의 불길한 정체는 무엇이며 소이치에게 살의를 품고 악의적인 행동으로 살인을 벌이는 자는 누구인가.
이 책은 『흑묘관』과 더불어 관시리즈중 이색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먼저 기존 관시리즈에서 등장했던 고립된 관들과는 달리 인형관은 주변과 어우러진 저택이다. 미로관, 수차관 같이 딱히 특수한 형태로 설계된 독창적인 구조의 건물도 아니다. 또한, 관시리즈중 유일하게 주인공 소이치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작가가 주인공의 어둑한 내면을 끈적하게 표현하고자 의도적으로 시도했다고 밝혔는데 책을 다 읽어보면 1인칭 소설로 쓴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보통의 관시리즈는 특수한 형태의 관이 등장하고 그 기이한 구조물을 이용한 트릭과 진범을 찾아내는 본격 추리물 형태이다. 십각관, 시계관, 미로관, 수차관등이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기존의 관시리즈와는 달리 서스펜스 스릴러물에 가깝다. 물론 군데군데 추리적 요소가 등장하지만 소이치에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와 그러한 협박과 공포에 맞서 주인공의 자기 방어와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을 긴장감있게 그려낸다.
단순히 트릭과 범인을 맞히는 본격 추리 마인드로 책을 읽다가 마지막 결말에서 뒤통수를 맞는다. 이색작이라는 평에 걸맞게 일반 독자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반전이 펼쳐진다. 하지만 트릭을 풀고 범인을 맞히는 본격 추리소설을 기대한 독자에게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는 예상치 못한 결말에 '뭐야 이런 거였어' 라고 당황해 할 수도 있다.
문장의 구조와 전개 스타일 그리고 분위기가 꼭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을 보는 느낌이다. 머리, 팔 ,다리, 몸통등 몸의 한군데가 없는 여섯 개의 마네킹 인형이란 설정은 선배 작가 시마다 소지의 명작 『점성술 살인사건』에서 차용한 것이며 책 군데군데 기존의 출간작인 십각관 , 수차관 , 미로관을 은근슬쩍 언급, 소개하는 작가의 재치가 귀엽다.
데뷔작 십각관으로 '관'시리즈의 초석을 다지고 미로관으로 궤도에 오른 뒤 인형관에서 한 템포 쉬었다가 그 다음에 시계관이라는 걸작을 탄생시킨게 아닌가 싶다. 기존의 관시리즈에서 보여주었던 본격 추리물의 정석에는 약간 벗어나 있지만 관시리즈 특유의 음습한 분위기는 여전하고 조금씩 조여오는 스릴러적 긴장감과 진범에 접근해 가는 추리적 재미 그리고 이색작에 걸맞는 색다른 결말을 만나는 즐거움은 충분히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