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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증명 ㅣ 증명 시리즈 3부작
모리무라 세이치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1976~77년에 출간된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증명시리즈 3부작중 두 번째 작품입니다. 이 책은 2004년 복간된 신장판을 번역한 걸로 보이네요. 개인적으로는 작년에 해문판으로 읽은 『인간의 증명』 이후 두 번째 만남입니다. 소설은 일본과 연합군간의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세 쌍의 청춘이 등장하고 그들의 이야기는 전후 고도 성장기에 접어든 일본의 1970년대까지 대를 이어 이어집니다. 전쟁 세대인 세 부부와 전후 세대인 자식들의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서사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가사오카는 데이트를 하던중 불량배의 급습으로 이를 구하려던 경찰관이 목숨을 잃자 여자는 도망갔던 그에게 "비겁하다"며 작별을 고합니다. 비겁함을 속죄하고 범인을 잡기 위해 그는 경찰관이 됩니다. 야부키는 학도병으로 차출되어 겪은 전쟁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채 약혼녀의 여동생과 결혼합니다. 준이치는 약혼자의 실종으로 유명 요정가의 데릴사위로 들어가게 됩니다.
청춘 남녀 세 쌍의 얘기가 드라마 형식으로 번갈아 전개되다가 강변에서 변사체가 발견되면서부터 미스터리의 성격을 띄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가사오카 형사와 후배 시모타 형사의 수사로 인해 전혀 타인같았던 세 집안 사이의 접점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띠끌만한 단서라도 놓치지 않고 발품을 팔아 범인을 추적하는 두 형사의 집념어린 수사가 무척이나 인상적입니다.
단서와 동기를 추적해 범인을 밝혀내는 사회파 추리소설의 형식이지만 미스터리적 요소는 약합니다. '증명시리즈중 가장 문학성이 뛰어나다'는 평만큼이나 순문학으로 접근하는게 좋겠네요. 그만큼 스토리와 캐릭터로 승부를 보는 소설인데 특히 시시각각 변하는 캐릭터의 본성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모두 선하고 정의롭게 보이던 주인공들이 세월이 흘러가며 그들의 숨겨진 본성이 드러날수록 조금씩 선악이 바뀌게 됩니다.
또 하나 눈여겨 볼 점은 전쟁 세대와 전후 세대의 가치관에 따른 행동 양식의 차이입니다. 가사오카, 야부키, 준이치로 대표되는 아버지 세대들의 청춘은 전쟁을 통한 생존 본능, 사랑과 결혼, 진로와 취업, 가족과 희생 등 보편적인 그것인데 반해 전후 고도 성장기를 맞아 시국이 안정되고 세월이 풍요로워진 그들 2세들의 청춘은 반항, 탐욕, 방탕, 기만등 지극히 개인적인 도덕적 해이로 물들어 있습니다.
2004년 신장판 후기에서 저자는 "스스로 청춘의 의미에 대해 반문해 보고자 이 작품을 썼다"라고 소회하며 청춘의 3요소로 굶주림, 무한한 가능성, 기성 권위에 대한 적의와 반감을 들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에게 청춘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야부키같이 태평양 전쟁에 학도병으로 차출되어 목숨을 담보로 내놓는 불가항력적인 청춘도 있고, 가사오카같이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스스로 경찰이 되는 능동적인 청춘도 있습니다. 아니면 준이치처럼 흠모하던 여성의 약혼자가 실종되는 바람에 대신 그녀를 차지하게 되는 운좋은 청춘도 있겠고요.
마지막 장에서 밝혀지는 반전과 선악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세 집안과 자식들의 결말을 보니 일말의 허탈감과 인생의 덧없슴을 느낍니다. 뭉클한 감동을 선사했던『인간의 증명』과 인생의 씁쓸함을 맛 본『청춘의 증명』을 읽었으니 이제 좀 화끈한 『야성의 증명』을 읽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