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줘
길리언 플린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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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섬세한 소설이다. 인간의 내면을 이렇게 잘 파고드는 소설이 있을까. 허구헌날 트릭과 액션으로 대표되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추리 스릴러물만 보다가 이렇게 섬세하게 인간의 심리를 다루는 작품을 읽으니 장르소설의 또다른 맛을 느낀다. 2012년 아마존 종합 베스트 1위, 뉴욕타임즈 소설 베스트 1위, 아마존 리뷰 8,500개, 2013년 애드가상 후보에 영화화 결정...괜히 대중적, 비평적으로 호평을 받는 작품이 아니다. 

 

미주리주 한적한 시골 마을...결혼 5주년 아침에 아내 에이미가 갑자기 사라진다. 매년 해오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보물찾기 형식의 수수께끼같은 단서들만 남겨놓은 채....그녀는 스스로의 의지로 모습을 감춘 것인가 아니면 불가항력적인 범죄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인가. 아내의 혈흔, 난장판이 된 집안, 불확실한 알리바이 등 사건 당시의 주변 정황들이 남편 닉을 실종된 아내의 유력 용의자로 지목하고 있고...그러한 닉은 결백을 주장하며 아내 찾기에 나선다.

 

이 책은 사건이 벌어진 날부터의 닉의 시선과 실종된 아내 에이미의 과거 일기로 교차 진행된다. 닉의 수기를  통해 그가 겪는 정신적인 고통과 아내를 찾기위한 다방면의 노력에 동정과 연민을 느끼는 한편 아내의 일기를 통해서는 5년전 닉을 처음 만나 결혼해서 행복한 순간 그러나 부부의 실직, 경제적인 어려움, 시골로의 이사등으로 힘든 상황에 처하는 에이미의 처지가 애처롭게 그려진다.

 

사실 그들이 처음 만나 사랑을 해서 결혼을 하고 여타 이유로 정든 대도시 뉴욕을 떠나 닉의 고향 미주리주 조그만 시골 마을에 정착하는 초반부는 딱히 긴장감이 없어 지루하게 읽힌다. 하지만 아내를 잃은데다 억울한 누명까지 써서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본 닉의 감추어진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면서부터 잔잔하게 진행되던 이야기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이야기가 진행되고 숨겨진 놀라운 사실들이 한꺼풀씩 드러날수록 닉과 에이미 두 부부 개개인의 품성과 인격에 대한 판단이 엎치락뒤치락 계속해서 바뀐다. 과연 누구의 잘못이 더 크고 누가 더 악한 사람인가.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 자는 누구인가. 보이는게 전부가 다가 아니다. 소심하고 수동적인 남편 닉의 일상의 사소한 거짓말들은 아내 에이미의 그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애교 수준이다. 그녀의 위선적인 태도와 대담한 계획, 거칠것 없는 추진력에 놀란다.

 

중간 과정이 '사랑과 전쟁'이면 결말 부분은 '적과의 동침'이다. 벌어진 상처가 워낙 크기에 과연 봉합될지는 극히 미지수이지만. 부부간에 제일 중요한 것은 신뢰이다. 자의적이든 아니면 (실직같이) 어쩔수 없는 외부적인 요건에 의한 타의적이든 그 신뢰에 금이 갔을 때 부부 또는 연인간에 벌어질 수 있는 극한의 드라마를 탄탄한 스토리, 섬세한 심리묘사, 반전을 거듭하는 치밀한 구성으로 완성도 높게 표현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내가 읽은 책은 가제본이라 일부 내용과 결말이 바뀔 수도 있다고 한다. 정발본을 통해 작품의 깊은 맛을 다시한번 음미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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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라이 기요시의 인사 미타라이 기요시 시리즈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옮김 / 검은숲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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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라이 기요시는 '신본격 추리소설의 대부' 시마다 소지가  창조한 명탐정입니다. 전설적인 역작『점성술 살인사건』(1981년)으로 데뷔해서『기울어진 저택의 범죄』,『마신유희』등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왔으나 정작 작가와 작품에 대한 관심이었을 뿐 탐정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을 통해서 미타라이 탐정의 매력에 푹 빠지는 계기가 되었네요. 1987년에 발표된『미타라이 기요시의 인사』는 네 개의 단편이 수록된 본격 추리 단편집입니다.

 

『숫자 자물쇠』는 미타라이 기요시가 본격적으로 탐정일을 시작하는 첫 번째 사건입니다. 명함도 파고 수임료도 받네요. 서두에 우메자와 가의 『점성술 살인사건』이 언급되서 얼마나 반갑던지...그때의 전율과 흥분이 되살아납니다. 논리적인 본격 추리의 재미는 물론이고 미타라이 탐정의 천재적인 수학 능력과 요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 그리고 애잔한 감동을 주는 따스한 마음씨도 엿볼 수 있습니다. 

 

『질주하는 사자(死者)』는 불가사의한 시체 이동에 관한 물리적 트릭이 나오는데 착상은 기발하나 현실감은 의문입니다. 다소 만화적이라고나 할까요...음악이 있는 추리물입니다. 미타라이의 프로 뺨치는 숨겨진 기타 실력을 즐겨보시길.

 

『시덴카이 연구 보존회』는 예상치도 못한 허를 찌르는 전개와 반전이 유쾌함을 선사하네요. 준비된 결과에 과정을 끼워맞추는 억지스러운 부분도 보이나 발상 자체가 신선하고 재밌습니다. 홈즈의 유명한 단편이 떠오르는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리스 개』는 액션, 스케일, 추리가 잘 어우러진 유괴 미스터리입니다. 탐정의 비밀스런 과거도 언급되고 사라진 건물, 암호 해독등 흥미진진한 요소가 많습니다. 사건을 수락하는 이유도 인상적이네요.  

 

작가이자 친구인 이시오카가 왓슨역의 화자가 되어 미타라이 탐정의 활약상을 그린 작품도 있고 아예 제3자의 시각으로 서술되는 단편도 있습니다. 그동안 여러 추리 단편집에서 실망한 적이 많았는데 이 작품에 수록된 네 개의 단편은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재미와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굳이 탐정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아도 단순히 본격 추리 단편으로써의 재미가 충분히 살아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꼽자면 그리스 개 > 숫자 자물쇠 > 시덴카이 연구 보존회 > 질주하는 사자 順이랄까요. 

 

불가사의해 보이는 사건을 능숙하게 해결하는 천재적 추리 능력과 개를 좋아하고 여성에게는 무관심한 미타라이 탐정의 오묘한 매력이 잘 드러나있는 작품입니다. 다소 까칠하고 괴짜로 비춰지는 탐정의 캐릭터 탄생 배경은 시마다 소지 작가가 일본인론에 비유해서 설명한 작품 후기에서 그 연유를 확인할 수 있고요. 시마다 소지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충분히 만족할만한 단편집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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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림스톤 펜더개스트 시리즈 3
더글러스 프레스턴.링컨 차일드 지음, 신윤경 옮김 / 문학수첩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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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개스트 시리즈 첫 작품인 『살인자의 진열장』을 접하고는 두 번 놀랐습니다. 이야~ 참 독특하면서도 재밌는 스릴러네. 근데 왜 이걸 분권했을까...두 번째 읽은『악마의 놀이』는 캔사스주의 광활한 옥수수밭과 어두컴컴한 동굴이 기억납니다. 특히 마지막 동굴에서의 결투 장면은 그야말로 작품의 백미였지요. 돌이켜 생각해보니 소재의 흥미로움은 『살인자의 진열장』이, 재미와 완성도는 『악마의 놀이』가 좋았지않나 싶습니다. 그리고는 2년이 지나 세 번째 접한 펜더개스트 시리즈에 또 한 번 놀랍니다. 728쪽의 엄청난 두께에 한페이지 28줄의 빼곡한 활자체....분권을 피하기위한 출판사의 노력이 엿보이네요.  

 

미국 롱아일랜드 사우샘스턴에 위치한 호화 저택에서 기이한 시체가 발견됩니다. 외부와의 접근이 완벽히 차단된 이 거대 밀실에서 집주인인 예술 평론가가 몸 내부에서 열이 발생, 새카맣게 타서 죽은 것입니다. 유황(브림스톤)의 냄새가 진동하고 바닥에는 의문의 발굽 자국이 찍혀 있습니다. 마치 루시퍼의 재현처럼 악마가 다녀간 것일까요...불가사의한 인체 자연 연소 사건에 펜더개스트가 뛰어듭니다.

 

펜더개스트 시리즈의 매력은 일반 스릴러물에서 만날 수 없는 기이한 사건을 과학과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풀어내는 몹시 기묘하고도 독특한 스릴러 창출에 있습니다. 이러한 독창적인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선발주자가 바로 주인공인 FBI 특별 수사관 펜더개스트이고요. 문화, 예술, 과학등 다양한 분야에 정통한 '걸어다니는 백과사전' 수준인 펜더개스트는 마른 체구에 하얀 피부, 늘상 고급 검정 양복에 운전수 딸린 롤스로이스를 타는 부자집 도련님입니다. 한술 더떠 과거를 내다보는 초능력(천리안)도 있는데 이번 작품에는 발휘를 안하네요 (그러면 30년전 사건도 쉽게 알아낼 수 있는데...) 그리고 한때 뉴욕 시경의 부서장이었다가 잠시 소설가 외도로 인해 변두리로 좌천된 우직하고 정의감 넘치는 다고스타 경사가 파트너로 등장합니다. 펜더개스트가 전작들에서는 다소 까칠한 스타일로 나오는데 반해 이번 작품에서는 상당히 자상하고 예의 바르게 등장하는게 이채롭네요.

 

흡사 악마의 소행으로 보이는 이 기괴한 인체 자연 연소 사건이 뉴욕에서도 연이어 발생하고 매스컴의 바람을 타면서 메시아를 자처하는 뜨내기 목사가 일시에 영웅으로 등장하고 종말론을 믿는 광신도들이 운집하면서 뉴욕 센트럴파크는 아수라장이 됩니다. 하지만 이 인체 자연 연소 사건의 배후에는 악마적인 계략과 기발한 트릭이 숨어 있습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부터 황금비로 예견되는 지구 대재앙설, 종말론같은 인류 문명과 미래에 관한 다양한 학설이 사건에 신비감을 덧붙이고 음악, 미술등 다양한 예술 분야와 항공우주산업같은 전문성있는 이야기들이 작품을 질적으로 풍족하게 만듭니다. 거기에 다고스타 경사와 헤이워드 과장의 러브라인도 살짝 들어가 있고...비밀연구소를 침입할 때는 흡사 007 첩보 영화를 보는 것 같고 중세 수도원과 고성에서 펼쳐지는 액션씬에서는 정말 댄 브라운 스타일의 숨막히는 스릴감을 느낍니다.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으면서 상당량을 차지하는 벅 목사件은 조금 줄였을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무대 배경을 이원화시키고 그러한 기이한 사건으로 인한 예측 가능한 사회적 현상을 논하고 벅 목사 입을 통해 인류 종말에 대해 심도있게 얘기하고 '제3의 주인공' 헤이워드 과장에게 분량을 주려는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벅 목사 관련 부분을 눈으로 읽고 있어도 머리와 마음은 외국으로 날아간 펜더개스트와 다고스타의 숨가쁜 여정을 좇고 있더군요.

 

확실히 여타 스릴러물과는 차별되는 펜더개스트 시리즈만의 오묘한 매력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728쪽의 두툼한 분량이 술술  넘어갑니다. 중세와 현대 그리고 미국과 유럽을 넘나드는 한 편의 지적 스릴러 여행을 다녀온 느낌이네요. 특히 마지막 장 공항에서의 다고스타 경사의 회한에 잠긴 장면과 짧막한 에필로그가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이 책이 '형제의 난' 3부작(Diogenes Trilogy)중 첫 작품으로 악마적인 기질을 가진 펜더개스트의 남동생 디오게네스가 책 중간에 한두 페이지 정도 짧게 언급되는데 어두운 야망과 잔인한 창의적 에너지를 기록한 비밀 일기장을 없앤 형에 대한 분노로 인해 복수의 선전포고를 합니다. FBI 형과 천재적인 살인마인 동생간의 대결은 다음 작품인 『Dance of Death(근간)』에서 다뤄진다고 하니 기대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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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립트 스토리콜렉터 15
아르노 슈트로벨 지음, 박계수 옮김 / 북로드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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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독일 작가 아르노 슈트로벨의 2012년 작품으로 싸이코 범죄자를 추적하는 추리 스릴러물입니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젊은 여성을 납치, 살해한 후 그 여성의 등가죽을 벗겨 캔버스를 만든뒤 거기에 소설을 쓰고 또 그 피해자의 이마에 챕터를 표시해 시체를 유기하는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합니다. 관련 사건의 잠정 피해자 중 한 명이 함부르크 지역 유력 신문사 사장의 실종된 딸이구요. 근데 특이한 점은 이 범행의 세부적인 전개 방식이 크리스토프 얀이라는 작가가 쓴 『스크립트』라는 추리소설 속의 내용을 그대로 모방한다는데 있습니다. 이 작가의 또다른 작품을 모방한 범죄가 4년전 쾰른에서도 발생했었구요.

 

단순히 책을 모방한 싸이코 범죄자의 소행인지, 작가를 열혈 추종하는 광신 독자의 미친 애정의 표시인지 아니면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려는 작가 또는 출판사 관계자의 악마적인 자작극인지....지역 유력 신문사 사장이자 실종된 딸의 아버지가 경찰서장과의 친분을 이용, 딸을 찾아내라는 거센 압력을 행사하는 가운데 함부르크 경찰 소속 마티센 여경정과 에르트만 경감이 수사에 착수합니다.

 

넬레 노이하우스의 타우누스 시리즈 영향인지는 몰라도 여기서도 (여자가 상관인) 남녀 버디 파트너 형사가 등장하는데 그들간의 파트너쉽이 결코 신뢰적이지는 않습니다. 거기에 그들의 직속상관인 슈토어만 본부장과 여경정간에 껄끄러운 악연도 존재하구요. 세 경찰 주인공간의 반목과 불신에서 오는 갈등과 미묘한 신경전속에 『스크립트』란 책을 둘러싼 작가, 출판사 관계자, 비평가, 서적상, 열혈 팬등의 주변을 중심으로 수사가 진행되지만 사건은 연쇄살인으로 발전합니다.  

 

한마디로 술술 읽히는 소설입니다. 가독성이 좋습니다. 한정된 등장인물에 내용도 복잡하지 않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군더더기없이 스피디하게 진행됩니다. 제한된 용의자 범위에서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 추리하면서 두 남녀 파트너의 수사 과정을 흥미롭게 따라가다보면 금새 마지막 장에 다다릅니다. 

 

반면에 깊이는 부족합니다. 북로드의 대표주자 타우누스 시리즈처럼 사회적 관습에 대한 문제 제기나 심오한 주제 의식이 있는 그러한 작품이 아닙니다. 벗겨낸 여성의 등가죽을 캔버스로 만들어 소설을 쓴다는 엽기적인 도입부에 비해 피튀기거나 눈쌀 찌푸리는 하드코어적인 잔인한 장면이나 묘사는 전혀 없어 예상보다 수위가 약합니다. 중간중간 짧은 분량으로 납치된 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죽음과 공포의 현장이 교차 편집되는데 이 부분의 스릴감이 조금 부족해 보이고요.

 

하지만 단순히 재미면에서 부담없이 가볍게 즐기기에는 괜찮은 오락 추리 스릴러물입니다. 여러 용의자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수사, 진범의 정체를 밝히는 수사 과정도 흥미롭고 사건이 해결됨과 동시에 삐걱거리던 세 경찰의 마무리를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니 - 여담이지만 - 온라인등에 서평을 조심해 올려야겠습니다. 잘못하다간 (또는 재수없으면) 범죄에 연루될 수도 있겠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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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관 살인사건 스토리콜렉터 7
오구리 무시타로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로드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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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전 사둔 책을 이제야 펼쳐들었다. 많은 독자들이 중도 포기하고, 완주한 독자들도 이해도가 채 30%가 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악명(?)높은 책...『도구마 마구라』, 『허무에의 공물』과 함께 '일본 탐정소설 3대 기서'중 한 권으로 불리는 『흑사관 살인사건』. 1901년 출생한 저자가 1934년 <신청년>이란 잡지에 이 작품을 썼다고 하니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이러한 방대한 지식의 추리소설을 쓴 자체가 놀랍고 경이롭다.

1885년 보스포루스 해협 동쪽, 일본 가나가와 현에 설립된 이 화려한 서양식 저택은 마치 흑사병 사망자를 모아두었던 프로방스 요새를 떠올린다는 이유로 흑사관(黑死館)이라 불린다. 카테리나 데 메디치의 사생아로부터 시작된 저주받은 후리야기 혈통의 비극은 흑사관 설립자인 산테쓰 의학 박사의 자살 포함 세 건의 변사사건으로 이어진다. 흑사관에는 산테쓰 박사가 의문의 자살을 한 뒤로 그의 아들 하타타로와 네 명의 외국인 현악사중주단 악사들 그리고 여비서. 여사서, 노집사, 급사장등이 기거하고 있다.

흑사관의 성주 산테쓰 박사는 자살하기 전까지 40여년 동안 흑사관에 단 한순간도 거주하지 않았으며 정체불명의 네 명의 외국인 악사들은 그들이 요람에 있을 때 흑사관에 들어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차례도 바깥 출입을 한 적이 없다. 또한 흥미를 끄는 것은 '테레즈'라 불리는 여자 인형이다. 산테쓰 박사가 귀국선에서 병으로 잃은 사랑하는 여인 테레즈를 못잊어 만든 등신 크기(165cm)의 이 태엽 인형은 스스로 걸으며 움직인다. 그래서인지 섬뜩하게 작동하는 이 인형을 흑사관 사람들은 자살한 박사의 악령이 씌웠다고 두려워한다.

중세의 철학적인 벽화들과 다양하고 진귀한 고서 그리고 일본 무사의 갑옷등 기괴한 그림과 책, 장식물로 채워진 흑사관에서 박사의 자살 1년 뒤에 네 명의 외국인 악사중 한 명이 독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명탐정 노리미즈는 하제쿠라 검사, 구마시로 수사국장과 함께 조사에 착수하지만 이를 비웃듯 연쇄적인 살인이 일어난다.

사실, 이 책의 리뷰를 쓴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왜냐면 (나 역시) 책의 30%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단편 『실락원 살인사건』에서 맛봤던 오구리 무시타로의 전방위적인 놀라운 지식과 현학적인 말투가 유감없이 발휘된다. 고대나 중세 유명한 학자들의 이론과 학설을 기반으로 의학, 약학, 화학, 물리학, 연금술, 언어학, 기호학, 색채학, 심리학, 종교학, 정신병리학, 고고학, 천문학, 철학 등 온갖 학문의 생소한 지식들이 죄다 출동한다. 노리미즈 탐정이 쉴새없이 쏟아내는 현란한 현학적인 대사를 이해하기는 커녕 사건의 메인 흐름조차 따라가기가 벅차다. 과연 검증된 학문과 지식을 바탕으로한 작가의 확고한 세계관인지 단순한 언어유희적 말장난인지조차 헷갈린다.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노리미즈 탐정의 현학적인 대사를 읽다보면 정신이 멍해지고 육체가 이탈하는 느낌이다. 읽는 건 까만 글자지만 머리속은 새하안 백지가 된다. 특히 배음(음향), 천문학, 암호 해독 그리고 서양 고전 문학을 인용해서 대화하는 부분에서는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하나'하는 절망감에 빠지기도 한다. 이 책에 인용되거나 소개된 다양한 이론이나 학설의 진위와 노리미즈의 추리에 대한 상황적 논리성 또는 현실성 여부등을 판단할 엄두조차 생기지 않는다. 비꼬아 표현하자면, 추리소설을 빙자(?)한 작가의 끝없는 학식 자랑이라고 해야 할까. 그나마 적재적소에 들어있는 다양한 삽화와 도면들이 조금이나마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위안이다.

사건의 전개는 간단하다. 살인사건이 벌어지면 조사에 착수한 노리미즈의 현란하고도 현학적인 장광설이 시작된다. 그러면서 한 명씩 용의자와 대질 심문을 하고 그 와중에 의도적인 빗나간 추리로 용의자의 방심을 부르기도 하지만 노리미즈 스스로 잘못된 추리로 진범을 오인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책의 후반부로 가면서 흑사관 건축가의 저주에 물든 악마적인 계략, 성주 산테쓰 박사의 자살 포함 세 건의 변사사건의 진상, 박사의 유언장을 둘러싼 실체와 음모, 네 명의 외국인이 40년 동안 흑사관에 갇혀있어야만 했던 비밀스런 배경등 흥미진진한 얘깃거리가 줄을 잇는다. 몇 건의 살인 및 미수가 발생하는 동안 노리미즈의 추리는 번번히 빗나가고 용의자가 서서히 줄어드는 마지막 장에 가서 진범이 밝혀지지만 정확한 범행의 진상을 복기해주는 부분이 없어 책을 덮고도 뒷맛이 개운치 않다. 비록 디테일한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흑사관의 비밀스런 내력을 통한 책이 갖는 신비하고도 기괴한 분위기 그리고 노리미즈의 현학적인 대사들은 한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이 책을 쓴 작가, 번역을 한 번역가 그리고 (어찌됐건) 책을 끝까지 읽은 나에게 경의를 표한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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