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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의 살인사건, 실로 무서운 것은
우타노 쇼고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에도가와 란포는 내가 최애하는 일본 추리작가 중 한 명이다. '신본격 미스터리의 대표주자'로 불리는 우타노 쇼고도 마찬가지. 그래서 두 작가의 국내 번역작들은 대부분 읽고 소장중이다. 그런 두 작가가 만났다. 그야말로 환상의 만남이요, 꿈의 콜라보레이션이다.
<D의 살인사건, 실로 무서운 것은>은 2000년대를 대표하는 우타노 쇼고가 1920~30년대 일본 추리소설의 정착과 부흥을 이끈 에도가와 란포의 주옥같은 단편 여덟 편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 새롭게 변주한 단편집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전에 예습 차원으로 - 물론 오래전에 모두 재밌게 읽은 작품들이지만 - 책장에 꽂혀있는 란포의 해당 작품을 다시 찾아 읽었다. 과연 우타노 쇼고는 어떠한 소재와 트릭, 스토리로 란포의 명작들을 현대적 감각으로 되살려냈을까.
한 남자의 망상과 광기, 변태적 사랑을 섬뜩하게 그려낸 란포의 대표작 <인간 의자>가 현대판으로 부활했다. 버림받은 한 남자가 잘나가는 예전 여자친구인 여류 작가에게 복수의 칼을 들이민다. 그 선공은 역시 푹신한 대형 소파이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이용한 교란 작전을 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상치 못한 비극이...
환상 문학의 걸작으로 꼽히는 <오시에와 여행하는 남자>에서는 몽환적인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단편에서는 오시에 액자 대신 스마트폰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여자 친구와 영상통화를 하며 혼자 여행을 하는 남자. 근데 모든 행동이 수상하다. 영상 속 여자 친구의 정체도 미심쩍고 이 남자 역시 예사롭지 않다. 원작이 환상적인 사랑 이야기라면 이 작품은 뒷골이 서늘할만큼 섬뜩하다.
<D 언덕의 살인사건>은 란포가 창조한 명탐정 아케치 코고로가 최초로 등장하는 본격 추리물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우타노 쇼고는 원작을 현대 버전으로 완벽히 재현해 낸다. 의문의 사체와 명확한 동기 그리고 반전을 거듭하는 추리...과연 표제작으로 선정될 정도로 완성도가 뛰어나다. 분량상 제일 마지막으로 읽은 보람이 있다. '실로 무서운 것은'이라는 부제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오세이 등장>에서 요부이자 악녀는 실수로 궤짝에 갇힌 남편을 못 나오게 힘으로 눌러 죽이는 냉정한 살의를 보여준다. 이 단편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 우연히 실수로 궤짝에 갇힌 남편을 멀리 프랑스로 출장 와 있는 부인이 원격 살해한다. 그 방법은 둘의 유일한 연결 수단인 스마트폰. 현대판 악녀다운 수법과 발상이다. 궤짝에 갇혀 힘겹게 스마트폰을 조작하며 탈출에 안간힘을 쓰는 남자의 노력이 블랙 코미디를 연상시킬 정도로 웃기면서도 애처롭다.
자신이 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아흔아홉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그린 란포의 원작 <붉은 방>이 재연되는 연극 무대에서 실제로 총기 발사에 의한 사고가 발생한다. 경찰과 감식반이 출동하고 무대와 객석은 아수라장이 된다. 하지만...관객이 진짜로 자극을 받는 것은 따로 있다. 반전에 반전이 있는 블랙 코미디물.
엿보기 신공, 1인 2역 트릭 등 란포의 주특기가 유감없이 발휘된 본격 추리의 걸작 <음울한 짐승>을 현대에 되살려 낸 이 단편은 시작부가 원작과 동일하게 "나는 당신을 24시간 훔쳐보고 있다"는 협박 메일로 시작된다. 훔쳐보는 기법과 범인의 의외성까지는 좋았으나 살인의 동기가 석연치 않다.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잘 이해가 안 된다.
<비인간적인 사랑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에서는 란포의 원작 두 편이 합쳐져 있다. 남편의 엽기적인 행각에 대한 복수가 비극으로 이어지는 <비인간적인 사랑>과 갈라진 2전짜리 동전에서 나온 암호로부터 은행 강도가 숨겨놓은 5만 엔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2전짜리 동전>이 그것이다. 이 단편에서는 AR(artificial reality)을 통해 연인의 죽음을 목격하고, 현실에서는 살인죄로 감옥에 다녀와 노인에게 여생을 의지하는 한 여자의 기구한 삶이 펼쳐진다. 그 와중에 수십 년 전 숨겨진 보물(증권)을 찾아가는 암호 풀이가 이 단편의 백미이다. 가장 공을 들인 단편이 아닌가 싶다.
정말 문장 하나, 단어 하나까지 아껴가며 읽었다. 그만큼 모든 단편들이 밀도와 짜임새가 좋다. 에도가와 란포와 우타노 쇼고. 내가 좋아하는 두 작가를 한 작품에서 만나니 재미도 두 배, 기쁨도 두 배다. 원작을 미리 읽고 비교해서 이 책을 읽으니 원작을 현대적 감각으로 변주하는 우타노 쇼고 작가의 의중과 노련한 테크닉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더욱 재밌게 읽은 것 같다.
작가는 거의 모든 단편에서 태블릿 pc와 스마트폰은 기본이고 홀로그램, VR(virtual reality), AR 등 최첨단 IT 기기와 기법을 서술과 트릭의 소재로 사용한다. 그것은 작가가 현대물에는 그 시대와 상황에 맞는 현대 문명을 사용해야 한다는 철학 때문이다. 거기에 원작과 현실을 조금씩 비트는 블랙 코미디 같은 전개와 결말이 때론 옅은 실소를 자아낸다.
작가는 이 작품을 끝으로 더 이상 란포와 연관된 책을 쓰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래서 더 애착이 가는걸까...이 작품을 통해 에도가와 란포의 명작들을 다시 한번 회상하고, 동시에 우타노 쇼고 작가의 재기발랄한 필치를 감상할 수 있어서 무척 행복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