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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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언니를 본 지 벌써 10년이 흘렀네요. 보푸라기 인 폴리에스테르 재질의 책가방을 메고, 알람 소리 어지러운 육교를 지나 '노량도'에 입성한 게 엊그제 같은데. '합격해야 탈출할 수 있는 섬'이라고, 다들 그런 식으로 우스갯소릴 하곤 했잖아요. 그때는 언니가 되게 언니처럼 느껴졌는데 이제 저도 서른이네요. 그사이 언니에게도 몇 줄로는 요약할 수 없는 시간들이 지나갔겠죠? 바람이 계절을 거둬가듯 세월이 언니로부터 앗아간 것들이 있을 테죠? 단순히 '기회비용'이라고만 하기엔 아쉽게 놓쳐버려 아직도 가슴을 아리게 하는 것도. 말해도 어쩔 수 없어 홀로 감당해야 할 비밀과 사연들도요. 그래서 사실 오늘 언니가 8년 동안 임용이 안 됐었단 얘기를 들었을 때 가슴이 먹먹했어요. 8년. 8년이라니. 괄호 속에 갇힌 물음표처럼 칸에 갇혀 조금씩 시들어갔을 언니의 스물넷, 스물다섯, 스물여섯…… 서른하나가 가늠이 안 됐거든요.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 마음속에 생기는 온갖 기대와 암시, 긴장과 비관에 대해서라면 저도 꽤 아는데. 자식 노릇, 애인 노릇 등 온갖 '도리'들을 미뤄오다 잃게 된 관계들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닌데. 좁고 캄캄한 칸에서 오답 속에 고개를 묻은 채, 혼자 나이 먹어갔을 언니의 청춘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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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19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2년 7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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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제는 말하기도 쪽팔리지만 새로 들어간 그 회사에서도 나는 나보다 경력도 적고 직급도 낮은 연하의 남자 하나를 사랑했다가 혼자 쓸쓸히 마음을 접은 일이 있었다. 나는 이른바 짝사랑 전문가였고 그쪽 분야에만 오래 전념해오다보니 다른 분야는 아예 자신도, 관심도 없게 되었다. 짝사랑만의 도저한 쾌감이랄까, 뭐 그런 것에 중독되다보니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짝사랑만 가능한 대상을 물색하여 거기에 전념하게 되었다. 아이돌 댄스그룹 멤버에게 몰두하거나 내 평생 영원히 만나게 될 것 같지 않은 대만 텔레비전 드라마의 남자 배우를 남몰래 흠모했다. 그러다가 문득 달력을 보니 어느새 나는 서른이 되어 있었다. 거울 속의 저 아줌마는 과연 누굴까? 루이뷔통 스피디백을 들고 어디든지 출동할 자세가 되어 있는 머리 질끈 동여맨 전투적인 여성이 정말 나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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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19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9년 10월
 
기타노 다케시의 생각노트
기타노 다케시 지음, 권남희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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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에는 말이 죽어가고 있다. 말이 죽어간다는 것은 사고가 죽어간다는 뜻이다.
최근에 유행하는 노래를 듣고 있으면 왠지 무서워진다.
'내가 있으니 너도 안심이지' 라든가, '이제 무섭지 않지' 라든가, '널 지켜줄게 등……. 시시한 가사들만 먹히고 있다. 너희들은 언제부터 국민고충처리위원이 된 거냐.
그러면서 실제로 하는 짓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여자에게 차인 데 대한 보복으로 하루에 100번이나 무언 전화를 걸지 않나, 부모에게 독약을 먹이지를 않나…….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내 세상에는 너밖에 없어' 라고?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게 아니다. 너, 인도나 중국에 가보라고. 인간이 몇십 억이나 있다는 것도 모르냐, 이 녀석아.
만담이라면 이렇게 한 방 받아칠 태세다.
그걸 비유라고 한 거겠지만, 너무나 유치하고 직접적이고 또 노골적이다. 부끄럽지 않느냐고 작사가에게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그는 아마 부끄러워하진 않을 것이다.
"지금은 그런 가사가 아니면 팔리지 않습니다. 몰랐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비웃을 게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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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19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0년 7월
 
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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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에서 의대를 졸업했을 때, 그가 참석하지 않는다면 슬플 거라던 자상한 여교수 때문에 졸업식에 참석해 땡볕 아래서 총장의 마지막 격려사를 들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내면의 공포가 증폭된 나머지, 케빈은 영혼이 조여오는 기분을 느꼈다. 점잖은 가운을 입었던 백발이 성성한 총장은 자신의 말이 케빈의 내면에 잠복해 있던 공포를 악화시켰다는 걸 전혀 몰랐으리라. 프로이트마저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사랑하지 않으면 병이 난다"고. 사람들이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간판에서, 영화에서, 잡지 표지와 텔레비전 광고에서 모두가 간단명료하게 내뱉고 있었다. 우리는 가정과 사랑의 세계에 속해 있고 너는 그렇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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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19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0년 7월
 
픽션 - 작은 나라와 겁나 소심한 아버지와 한심한 도적과 자식보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엄마와 아이를 두고 페루로 가 버린 부모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새와 위험하지 않은 대결과 이상한 휴대전화와 당신이 모르는 뉴욕의 비밀
닉 혼비.조너선 샤프란 포어.닐 게이먼.레모니 스니켓 외 지음, 이현수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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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봤더니, 아무도 나한테 관심이 없더라. 심판은 그 사람한테 레드카드는 커녕 옐로카드조차 주려 들지 않았다. 우리 쪽에 프리킥을 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우리 팀원 중 누구도 내가 다쳤는지 아닌지에 관심없었다. 모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경기를 하고 있었다.

경기 중 휴식 시간 때 무슈 플라미니에게 물었다.


"봤죠?"


"뭘?"


"아저씨가 나한테 패스했을 때 일어난 일 말예요."


"응. 너 공 빼앗겼잖아. 남한테 넘겨줬다고."


"내가 넘겨준 게 아니에요. 누가 끼어들어서 나를 땅에 때려눕히고 뺏어 간 거라고요."


"그걸 태클이라 그런단다, 스테판. 태클에 적응하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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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19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9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