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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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당신과 유카코 씨의 관계에 문득 애정이라는 말을 놓아 봤습니다. 어쩐 일인지 그 말이 현저하고 확실한 존재감을 갖고 제 가슴속에 자리 잡고 말았습니다. 당신과 유카코 씨 사이에는 단순히 남자와 여자라는 것만이 아닌, 저 같은 사람은 도저히 밀치고 들어갈 수 없는 강한 애정이 존재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제 안에서 그 생각은 점차 부풀어 오르고 어떤 확신 같은 것이 되어 눌러앉기 시작했습니다. 일시적인 남녀의 유희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그런 게 아니라 거기에 아무도 끼어들 수 없는 열렬하고 비밀스러운 애정이 있었다고 한다면....... 저는 그때서야 비로소 억누를 수 없는 질투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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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사생활의 천재들
정혜윤 지음 / 봄아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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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잠깐 숨을 곳, 잠깐 쉴 곳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비가 오면 잠시 피해갈 처마 밑 같은 곳 말입니다. 지렁이 수준의 숨어 있을 만한 곳도 있고, 새 수준, 고양이 수준의 숨어 있을 곳도 있습니다. 인간 한 명 한 명에게도 이 도시에 잠깐 쉬어갈 곳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마이크로 하비타트(미소 서식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동생과 이제 막 마이크로하비타트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우연히 주남저수지 근처에 사는 어떤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주남저수지에서 좀 떨어진 동관저수지란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거기선 아침에 해 뜰 때 철새가 날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로지 그 지역에서만 해볼 수 있는 일, 그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거기 가서 그것을 본 사람들이 결국은 그 지역을 좀 더 잘 사랑하게 되길 바랍니다. 모든 서식지는 오로지 거기서만 살 수 있는 것들을 품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곳에서도 그곳에서처럼 살 수는 없는 것들을 품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서식지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장소만이 마이크로 하비타트가 아닙니다. 아예 인간 한 명 한 명이 다른 인간의 마이크로 하비타트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쉴 만한 곳, 살아갈 곳이 되는 거죠. 자신의 친구나 애인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한 사람이 하나의 마이크로 하비타트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이 원하는 일을 밀고 나가려면,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소중한 존재로서 인정받았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인정과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용기를 내기가 힘듭니다. 젊은 시절에 사랑이 어느 정도 충족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한 사람은 자신을 인정했었다는 것이 사람에게 주는 것은 자신감 그 이상입니다. 자기를 뛰어넘게 합니다. 세계가 바뀌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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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22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3년 6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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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의 통증이 다시 살아났다. 격렬한 통증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격렬한 통증의 기억이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쓰쿠루는 자신을 향해 말했다. 애당초 텅 비었던 것이 다시 텅 빌 따름이 아닌가. 누구에게 불평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와 그가 얼마나 텅 빈 존재인가를 확인하고, 다 확인한 다음에는 어딘가로 가 버린다. 그다음에는 텅 빈, 또는 더욱더 텅 비어 버린 다자키 쓰쿠루가 다시금 혼자 남는다. 그뿐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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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22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3년 7월
 
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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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쓸쓸한 구석에서 만난 이들이 살 비비는 풍경은 이렇게 서로 닮고 만다. 가진 것은 몸뿐, 할 수 있는 것은 사랑뿐.

그래, 신파 맞다. 맞긴 한데, 그게 또 싫지가 않은 것이다. 뭐랄까, 아늑한 신파라고 할까. 누구에게나 몸에서 비린내가 나는 외로운 날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 날에는 또 이런 남녀들의 뽕짝 같은 수작들이 위로가 된다. 나만 아는 그런 여인숙, 어딘가에 꼭 하나만 있어서, 사랑이든 신파든, 한 몇 달 살아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잖은가, 기적이 없는 세계에 신파라도 있어야지.


- 「여인숙으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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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22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3년 8월
 
그림 여행을 권함
김한민 지음 / 민음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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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것들은 감히 심중을 헤아리거나 예측할 수 없음. 그것이 노인들의 매력이다. 페루의 마누Manu 정글에서 만난 마치젱가Machiguenga 부족의 노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분에게도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말수가 너무 적어 일찌감치 포기하고, 대신 낚시하는 모습을 촬영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런데 낚시 운도 따르지 않아 고기가 좀처럼 잡히질 않았다. 한참 후에 왜 그런지 물어보니 원래 낮에는 입질을 안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제야 말씀해 주시냐, 진작 알았으면 이렇게 오래 기다리지 않았을 텐데, 하고 물을 순 없었다. 노인이 촬영진의 기대에 부응해야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어쨌든 우린 낙담해 버렸다. 이 먼 곳까지 와서 뙤약볕 아래 몇 시간이나 할애하고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으니. 작별 인사나 하려고 일어섰다. 대답이 돌아올 것도 기대하지 않고 "그럼 잘 계시고, 건강하세요."라고 말하고 돌아서려는데, 노인이 나를 올려다보며 한마디 던졌다. 그때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가 깊고 정이 듬뿍 담긴 눈빛을 반짝이며 딱 한마디.

"언제 또 올 건데?"

그 목소리엔 도시인들에게 익숙한 '언제 한번 보자.'나 '볼 수 있으면 보자.' 식의 무성의한 빈말과는 차원이 다른 진심이 담겨 있었다. 당황한 나는 "아, 네, 가능한 한 빨리 와야죠......." 라며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그런데 내 대답을 듣고 노인의 만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가슴이 아려왔다. 엄청난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았다. 노인의 그 한마디는 '아무것도 못 건졌잖아, 시간만 낭비했어.'라는 건방진 생각이나 품었던 내게, 낯선 사람과의 만남에서 뭐가 중요한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목적에만 집착하고 있던 내게 주어진 과분한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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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22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3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