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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풀이 눕는다 - 김사과 장편소설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7월
평점 :
판매중지
그냥 난 술을 마시는 게 좋았다. 술을 마시면 모든 것이 모호해졌고 고통을 덜 느꼈고, 그래서 쉽게 웃을 수 있었다. 제정신으로 견딜 수 없던 것도 농담처럼 우스워졌다. 물론 적당히 취했을 때이 이야기다. 그리고 난 언제나 지나치게 취했다. 처음엔 단순한 습관이었다. 아니 그냥 술이 있어서 마셨다. 문제는 마시면 마실수록 기분이 나빠졌다는 것이다. 계속 마시다보면 어느 순간 마음속에 난 작은 구멍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맨홀과 비슷했다. 사람 한둘 정도가 빠질 수 있는 크기의, 검고 조용하며 들여다보면 악취가 나는 그런 구멍 말이다. 그런데 그건 내가 취했을 때에만 나타났다. 그리고 나는 바보같이 매번 놀랐다. 이런 게 여기에 있었다니! 왜 그 동안 보지 못한 거지? 나는 그걸 메우고 싶었다. 아니 메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마시면 매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난 계속 술을 마셨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점점 기분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게다가 구멍은 그대로였다. 난 계속 술을 마셨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심지어 구멍이 더 커져 있었다. 그때쯤 술을 마시는 것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나는 돌이킬 수 없이 취해 있었다. 하지만 내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했다. 그게 날 미치게 만들었다. 나는 애원하기 시작했다. 제발 이 또렷함을 지워달라, 제발 나를 취하게 해달라, 잠깐이라도 잊게 해달라. 그러나 술은 더이상 나를 돕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구멍 속으로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더이상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하도록. 누구도 나에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그리고 언제나 거기서 기억이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