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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나무 숲
권여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평점 :
얇은 잡지를 깔고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계단 좌우 폭이 좁아 마치 아동용 의자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담배 연기는 건너편 건물의 자줏빛 기와지붕 쪽으로 날아갔다. 자줏빛 지붕 너머로 낡은 고층 아파트의 다닥다닥한 베란다가 보였다. 이 동네는 너무 낡고 남루해 오히려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담배를 꽁치 통조림 캔에 눌러 끄고 고개를 들었다. 아파트 너머 하늘은 언제나 희끄무레했다. 문득 하늘색, 살색, 이런 색깔들이 없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색깔들이 없어진 게 아니라 그 이름들이 사라졌다. 존재의 소멸보다 이름의 소멸이 왜 더 허무한 느낌을 줄까. 오랫동안 생각했다. 이름이 사라지면 불러 애도할 무엇도 남지 않아 그런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