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내 정원의 붉은 열매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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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만 취하면 무턱대고 상대방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버릇이 있다고 나를 나무란 P형의 말은, 지금 생각해보면 P형이 내게 건넨 최초의 농담이었는지 모른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자신도 나의 대책 없이 충동적인 술버릇을 알고 있다는 암시적인 표현이었는지 모른다. 그 말을 할 때 P형의 입가에 잡힌 주름은 비웃음이 아니라 장난기였는지 모른다. 내가 골목 모퉁이에 숨어서 지켜보았을 때 P형은 소주 한 병이 아니라 꽤 큰 봉지를 들고 숨차게 언덕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 봉지 속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당시에 내가 좋아하던 짭짤한 포와 달콤한 과자들이 가득 들어 있었을까. P형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은 무엇이었을까. 어째서 나는 나보다 고작 한 살 많은 뿐인, 따지고 보면 현수와 동갑인 스물한 살의 청년에게 무조건적인 신뢰와 절대적인 관용을 기대했던가. 그때는 상상조차 못 했지만 어쩌면 P형은 내가 자고 가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상상이 사실이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어딘가 삐딱하다는 현수의 말은 정확했다. 바람 부는 날의 빗줄기처럼, 틀린 글자를 지우는 교정선처럼, 어떤 비스듬한 바이어스가 P형의 삶을 긋고 지나갔고 나는 그 빗금의 끄트머리에 걸려 있다 제풀에 떨어져나온 것뿐이었다. 차라리 술 취해서 아무에게나 사랑을 고백하는 버릇을 가졌던 게 나았다. 현수의 말대로 차라리 음흉한 쪽인 게 나았다. 기억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그 많은 시간 속에서, 아둔하고 자존감만 높았던 나는, 나만 모르는 장소에서 나만 모르는 얼마나 많은 수치스런 행위와 제멋대로의 오해를 반복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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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olepsy 2016-02-22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3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