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보다 낯선 오늘의 젊은 작가 4
이장욱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게 좋았다. 이 사람의 내부에는 빈방이 참 많구나. 내면에 있는 빈방. 내가 하릴없이 좋아하게 되는 건 그런 종류의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빈방이 있다면, 그 방에 과묵하고 고독한 손님을 들이고 싶었다. 낯선 손님과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앞으로의 계획이나 과거의 행적을 묻지도 않을 것이다. 침착한 공기와 평화로운 시간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목적의 전부인…… 그런 방이기 때문에. 갓 빨아 낸 신선한 모포의 향기가 떠도는 무채색의 방이기 때문에.

낯설고 과묵하며 선량한 이들이 조용히 묵어 가는 그런 공간을…… 나는 상상했다. 방이 하나 둘 늘어나면 나중에는 커다란 호텔이 될지도 모른다. 고요한 손님들이 늘어나고, 평화로운 시간이 흘러간다. 그러면 나는 어느 새벽, 그 호텔의 허름한 입구를 걸어 나와 다시 길을 떠나는 것이다. 작은 여행 가방 하나를 들고, 아무런 회한도 없이. 또 다른 낡고 허름한 방을 만들기 위해서. 

김의 내부에는 성실하고 긍정적인 공기가 떠도는 큰 방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그 방의 공기를 조금씩 호흡하며 주어진 시간을 통과할 것이다. 주인이 아니라 과묵한 손님이 되어서 하루하루를 묵어 갈 것이다. 그것이 내가 가진 희망의 전부라고 해도 좋았다. 희망은 사소하면 사소할수록 좋았다. 그런 희망은 사람을 좌절시키지 않고, 배신감에 치를 떨게 하지 않고, 죽게 만들지 않으니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Narcolepsy 2016-01-20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4년 2월
 
책섬
김한민 지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암초에 걸렸어. 책을 파다 보면 반드시 문제란 걸 맞닥뜨리게 돼.

물론 그 문제를 피해 나머지 부분만 팔 수도 있어.

하지만 신경이 쓰이지.
문제가 생각보다 클 수도 있고.
어떻게든 처리하지 않고는
아무 일도 안 되겠다는 느낌이 강해진단다.

문제 위에 쌓인 먼지를 걷어내면 문제는 살아 움직여.

넌 그것과 씨름해야 해.

그건 도깨비 같아서 동물이 되었다, 괴물이 되었다,

자빠뜨려 보려고 해도 여의치 않고,

두 다리 버티고 있기도 힘들지.
힘이 빠져 울고 싶어도 물고 늘어져야 해.
넘어가면, 지금까지 쌓은 걸 녀석이 모두 망칠 수 있어.

이 결투는 처음부터 불리한 게임.

쓰지 말 이유는 수만 가진데,
써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는.

그래도 의지는 네 편이고
그게 널 버티게 하지.

문제 해결? 그건 다름 아닌 직면이야.
끝없는 직면.
직면한 채 문제가 던지는 모든 자극에
끝까지 반응할 수 있느냐.

질기게 버티면 어느 순간 제 풀에 지쳐서
너를 피해버리지.

문제란 그런 거야.
문제도 너에게 질릴 수 있는 거지!

근데 여기서 힘을 많이 빼게 되어 있어.
연료 탱크의 반 이상을 써버리지.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는데….

"문제는요? 어찌 됐죠?"

가버렸어. 근데 멀리 안 갔어.

"괜찮은 거예요?"

뻐근하진 하지만… 일어나야지.
곧 다시 올 거고,
그땐 나도 힘이 없을 거야.
시간을 좀 번 것뿐이니 다시 오기 전에
작업을 완수하고 여길 뜨자고.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Narcolepsy 2016-01-20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4년 3월
 


점심 무렵이 지나서 엄마 요양원에 갔다. 민머리에 모자를 쓰고 갔다. 엄마는 쿨쿨 자고 있었다. 이제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도 피곤해서 엄마 침대로 파고들었다. 엄마는 내 민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여기에 남잔지 여잔지 모를 사람이 있네."
"엄마 남편은 사노 리이치지?"
"아무것도 안 한 지 한참 됐어." 아무것도하는 건 뭘까. 설마 엉큼한 그것일까? 하지만 아무 생각이 없는, 왠지 투명하게 느껴지는 엄마가 그런 소리를 하더라도 엉큼하게 들리지 않는다.
내가 큰 소리로 웃자 엄마도 소리 내어 웃었다.
"엄마, 인기 많았어?"
"그럭저럭." 정말일까?
"나 예뻐?"
"넌 그걸로 충분해요."
또다시 웃음이 터져버렸다.
엄마도 따라 웃었다.
갑자기 엄마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여름은, 발견되길 기다릴 뿐이란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엄마, 나 이제 지쳤어. 엄마도 아흔 해 살면서 지쳤지? 천국에 가고 싶어. 같이 갈까? 어디 있는 걸까, 천국은."
"어머,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던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잊지 마.
내가 이렇게 아플 수 있으면 남도 이렇게 아플 수 있다는 거. 제대로 연결해서 생각해야 해. 그런데 이렇게 연결하는 것은 의외로 당연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닌지도 몰라. 오히려 그런 것쯤 없는 셈으로 여기며 지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는 정도인지도 몰라. 그러니까 기억해두지 않으면 안돼. 안 그러면 잊어먹게 되는 거야.

잊으면 괴물이 되는 거야.

당신이 상상할 수 없다고 세상에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말아줘.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Narcolepsy 2015-02-19 0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4년 12월
 
고백의 제왕
이장욱 지음 / 창비 / 201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끼와 나는 신칸센을 타고 동경으로 갔습니다. 동경의 거리는 듣던 대로 화려하더군요. 사람들은 놀랄 만큼 무관심해 보였습니다. 그것 역시 듣던 대로였어요. 지하철을 타도 모두들 서로가 서로에게 지루할 뿐이라는 표정들이었지요.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폐만 끼치지 않는다면 네 인생 따위는 어떻게 보내도 상관없습니다, 라고 정중히 말할 듯한 표정들이었습니다. 그런 무관심이 얼마나 마음에 들던지, 나는 거의 쾌감을 느낄 지경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하필이면 지하철에서 자살하는 이유가 뭔지 깨달아버렸을 정도니까요. 덜컹덜컹, 네 인생 따위는 상관없습니다. 덜컹덜컹, 네 인생 따위는 상관없습니다. 지하철은 그렇게 동경의 한복판을 달려갔습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Narcolepsy 2014-06-12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3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