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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 아래 잠들다 ㅣ 창비시선 229
김선우 지음 / 창비 / 2003년 10월
평점 :
나른한 오후 시집을 한 숨에 읽어버린 나는 고민해야만 했다. 이것을 오랫동안 씹고 씹어서 남은 것을 뱉어내야 하는 것인가? 득달같이 달려가 내가 느낀 것을 두서없이 늘어놓아야 하는 것인가? 아직 수양이 부족한 탓인지. 마음이 서둘러 진다. 잊을까봐 두려운 것이 아니라 참지 못하는 속내에 있을 것이다. 뭐가 그리 말하고 싶은 것이 많을까. 좀더 신중하지 못한 것은 내 성격 탓일지도 모르겠다.
이 시집은 여자가 쓰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감히 그렇게 한마디로 축약해서 말을 하고 있다. 물론 여자의 이야기만을 주저리 늘어놓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자가 아니고서는 이런 솔직하고 담백한 때로는 대담하기까지 한 글을 쓰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이 든다. 나는 가끔 여자가 아니고서는 쓸 수 없다는 글을 만날 때가 있었다. 그리고 대체로 그런 것들이 내 마음에 오랫동안 남아 가끔 꺼내보는 것이 무척이나 좋았다. 시집을 읽기 전에 훑어보았을 때는 시가 길어보였고 제목도 피상적인 느낌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에게도 뭔가 시작하기도 전에 지례짐작하거나 판단하는 좋지 않은 버릇이 있었던 것이다.
또 서론이 길어질 것 같으니 두서없이 시에 대한 감상을 말하도록 하겠다.
시집의 첫 장을 펴자 ‘민둥산’이라는 제목이 보인다. 하지만 시를 읽고 나서 제목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대를 맞는 내 몸이 오늘 신전이다] 시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를 결정짓는 하나의 문장만이 내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처음에 조금은 대담한 시인의 어투에 놀라기도 했으나 여자이기에 더욱 더 그런 어투를 사용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적어도 남자보다는 조금 더 투명하게 성이나 생명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남여 성차별적 발언도 아니고 사람 따라 다를 테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길 바란다. 얼마 전 다른 전공수업시간에 들었던 ‘구지화상’의 이야기에서 그가 선을 터득한 뒤 누가 질문을 해도 손가락 하나를 불쑥 세우는 것으로 답했다는 것과 그녀가 첫 시에서 세상을 접하는 태도가 같은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과의 교감 그 속에서 그녀자신은 신전이 되었다. 그런 자연과의 교감. 즉 ‘한 떨기 꽃이 피어도 그 영향으로 온 세계가 흔들린다.’ 라는 인식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으로 보여 진다. 이미 첫 시에서 그녀는 나의 시선을 자연이라는 거대한 창으로 넓혀주었다. 그래서 계속 시를 읽어감에도 두근거리는 기대감이 들었다. 또 나에게 어떤 것을 보여줄 것인가.
시인의 자신의 몸 안에서 생성되고 빠져 나가는 것에 대해서 참으로 진솔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공감이 가는 소재는 ‘월경’의 이미지 같은 것이다. ‘완경’에 수련과 꽃에 비유하여서 그것의 거둬진 후를 완경이라 표현한 것은 여성에 대한 최대의 존경의 표현이었다. 여자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남자가 이런 구절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가 상당히 궁금해 진다. ‘물로 빚어진 사람’ 은 월경을 물과 바다라는 이미지에 빗대어 공감가게 잘 표현해 냈다. 잘 표현해냈다는 것으론 식상하고 모자랄 만큼 좋게 읽혔다. 또 시인은 동화적 상상력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 구절들을 여기 저기 남기어 그 여운에 젖게 하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귀’에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슬픈 악기가 귀라고 믿어버렸다.]라거나 ‘매발톱’의 [사람에 의해 이름 붙여지는 순간 사람이 모르는 다른 이름을 찾아 길 떠나야 하는 꽃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같은 슬픈 옛이야기를 하는 듯한 어조로 말해주는 예쁜 표현이 그렇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이야기를 해주듯이 그렇게 한 구석 세상을 보여주고 그것으로 우리에게 느끼게 해주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예민한 시인의 감성이 잘 포착된 시들도 있었다.
‘ 너의 똥이 내 물고기다’에서 밤벌레라고 표현된 알몸의 엄마가 안고 있는 알몸의 아가들은 자연 속에 인간과 작은 생물인 밤벌레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미지를 이루어낸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미지들의 결합이 이렇게 절묘하게 어울리다니 놀라웠다. ‘내가 죽어지지 않는 꿈’에서 다른 이에게 무언가 주기 위해 죽음 앞에 서있는 자아가 등장한다. 내 것인지 알았던 몸둥아리었는데 그것은 내 몸이 아니었고 죽어 있는 것은 꽃이었다. 시인이 이것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할 문제인 것 같다. 꽃이 지는 것을 슬퍼하는 것인지 그 시의 깊이가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범람’이라는 시는 다른 전공시간에 수업한 적이 있었다. 다시 읽어 내리면서 그때와 같은 시라는 것을 잊고 있었을 만큼 느낌이 사뭇 달랐지만 말이다. 시의 후반부로 넘어가 ‘거꾸로 가는 생’을 보면 담담하게 이야기 하면서 ‘세상의 아름다운 빛들은 거꾸로 떨어진다.’ 라고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아이가 되어가는 것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청춘이 영원할 것이라 과신한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들이 아직 젊다는 이유만으로도 묻혀버릴 수 있기에 더 안타깝다.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는 우주에서부터 좁게는 작은 풀잎하나까지 다양하게 다뤄진다. 좀더 뒤편으로 가면 고양이를 소재로 삼고 있는 시들도 있다. ‘오! 고양이’ 라는 시도 무척이나 공감이 갔는데 내가 고양이를 키워봤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녀가 말하는 고양이 시체를 나 역시 넘어왔고 앞으로도 넘어야 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고양이의 눈동자는 사람을 추궁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눈동자에 추궁 당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을 추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 우리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하는데 그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입설단비’라는 시가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장식하고 있다? 이 표현이 어울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시가 장식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나는 이시를 사뭇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시에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기에 그러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여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남자들은 어느 정도까지 공감할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너무 뻔한 호기심인가? 어쨌든 이쯤에서 시집에 대한 평을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