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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ㅣ 문학.판 시 2
이성복 지음 / 열림원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아침에 친구와 등교하던 길에 이성복 시인의 시집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난 말이야. 그 시를 읽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니까. 우리도 그냥 시를 쓰자고 어렵게 머리 굴리지 말고, 오늘 아침에 길을 걸었다. 이런 식으로 말이야.”
“그러게 그 시인은 특히 하고 싶은 말은 거의 마지막 두 줄에 표현하는 것 같더라.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물음을 던져놓듯이 말이야.”
왜 뜬금없이 친구와의 대화를 몇 자 적어놓았냐 하면은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의 느낌을 한마디로 축약해보자면 일상 속에 말하고 한 바를 언 듯 던져 놓은 것 같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일상이라는 것이 이성복 시인의 면밀한 관찰력에서 나온 감탄이 나올만한 비유라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점이다. 시를 한번 다 읽고 난후 시집 뒤의 평론을 읽은 것이 살짝 후회가 된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객관적으로 환기하는 글을 읽어도 괜찮을 것 같아 읽었는데 역시 내가 놓치고 있었던 점이 있는 것 같다. 그런 것까지 포함해서 완전히 깊이 있게 시를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시에 대한 리뷰를 적고자 한다.
우선 너무나 눈에 도드라지는 특징이 있다. 내가 읽었던 다른 시는 고사하고 이성복 시인의 다른 시집에서도 볼 수 없었던 백편의 시마다 붙어있는 인용구 말이다. 시집 뒤의 글에도 실려 있듯이 이미 사용되지 않은 말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글을 옮긴 것이든 내가 쓴 것이든 어딘가 있었을법하기도 하고 이미 사용된 말이라는 점에서 신선함을 잃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시의 인용구는 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시집을 읽을 때 고민했던 것이 어떤 순서로 읽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우선 제목이 있고 인용구가 있고 시가 있다. 물론 나는 그저 쓰인 순서대로 읽었지만 그것을 되짚어야 할 때가 많았다. 인용구가 암시해 주는 바를 시의 본문을 읽기 전에는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시를 읽고 다시 한번 인용구를 쳐다보기를 적어도 50편쯤은 했던 것 같다. 덕분에 생각할 시간이 한 번 더 있었을지도 모르겠고 인용구와 시가 따로 존재하기는 하나 서로 상효작용을 일으키는 것처럼 새로운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딱 한편을 골라서 시집에 대한 평을 대표적으로 내릴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서지 않아서 시를 읽으면서 짧게나마 메모해뒀던 것을 기초로 부분을 짚어보도록 하겠다. 일부러 개수를 맞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집은 100편으로 깔끔하게 구성되어있고 그것이 각자 다른 내용임에도 일관된 구조로 쓰여 있다. 만화가가 주인공을 정해 그림을 그릴 때 그 주인공을 제대로 그리려면 수백 번은 그려야 한다는 말이 있다. 왜냐하면 그림은 그릴 때마다 조금씩은 달라지기 때문에 같은 주인공을 계속 그려내려면 그 정도의 연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습하다보면 그 그림체가 익숙해져 그리는데 무리가 없어진다. 이 시집도 그러하다. 시인은 새로운 그림체, 그러니까 이 시집에서 시도한 시의 구성법을 잘 이끌어 나간 것 같다. 이것은 그저 평이해 보일수도 있지만 철저히 의도하지 않았다면 나오기 힘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집을 펼쳐보자.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고 시인은 고백하고 있다. 그가 앞으로 우리에게 보여줄 시들을 그가 말하고 했던 것들에 대한 축약적인 문장 같다. 말은 인류의 약속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미 사용되지 않은 말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새롭게 조합됨으로써 그러니까 시인이 필요한 근친상간 같은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말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시인이 말하고자 한바는 무엇인가. 우리로써는 알 수 없다. 첫 시부터 이렇게 의문을 던져준 후 시인은 끊임없이 여러 가지 사례를 제시한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제시해 그것을 다른 시각으로 환기시키는 내용이 많은 것 같다. 느낌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서로 너무나 제각각이라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시를 읽다보니 조금 반복되는 말투가 있는데. 예를 들어 [뭐 그런 소릴 할도] 서처럼 ‘뭐~ 그럴 수도 있겠다.’ 라는 것은 꼭 같은 말로는 아니지만 약간은 체념한 듯한 하지만 그 속에는 그것을 이해한다는 듯한 느낌의 말이 시 중간에 몇 곳 나온다. 이것은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일지도 모른다. [내 몸에 떠오르지 않을 물빛] 이나 [언니라는 말의 배꼽] 에 나오는 배꼽과 물빛이라는 것의 다양한 이미지 묘사는 시인이 부여해준 새로운 해석의 배꽃과 물빛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준다.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부분에 집중적으로 조명해 여러 가지 생명을 불어넣어 생각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이 시집의 놀라운 점이다. 또 이 시집을 읽으면서 눈에 띈 점은 ‘전이’라는 개념이다. 반복되는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여러 가지 시인이 제시한 일상생활이나 시제 중에서 순식간에 사람의 삶이나 우리 안으로 뛰어드는 방법이 마치 하나의 말에 힘을 실어 그것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전이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예를 들어 [한번도 온 적도 없다는 듯이]에서 호랑나무 가시라는 시제를 ‘언제 누가 오지 말란 적 없지만, 언제 누가 오라 한 것도 아니다.’의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자신의 가족, 사람에게 전이 시킨다. 이런 느낌은 시를 읽는 동안 여러 번 느끼게 된다. 그리고 제목에서 나왔던 글이 시 내용에 반복되기도 한다는 것도 특징 중에 한가지 이다. 그 글을 둘러싼 다른 표현들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그것이 딱히 거슬리거나 하지 않는 것 같다. 아까도 말했듯이. 뭐 그럴 수도 있겠다와 비슷한 개념으로
[비에 젖어, 슬픔에 젖어]를 보면 ‘내가 부르지 않아도 노래는 흐르고 있었다. 라는 시구가 있다. 이것은 이 시 뿐만이 아니라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여러 번 다른 표현으로 바꾸어서 말하는 듯싶다. 내가 있고 어떤 대상이 있다. 그것은 말이 될 수도 있고 시가 될 수도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나는 어떤 행동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대상에게 어떤 변화를 줄 수 있는 요인이 되는지는 의문이다. 대상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도 존재했고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존재 할 것이다. 이 인식은 시집 전반에 흐르고 있는 맥락과 함께하지 않은가 싶다. 그리고 시집 곳곳에 재미있는 시선이 숨어 있는데 [잔치국수 하아 해주세요]를 보면 식욕-여자에 비유해 일치 하지 않을 때 다른 것이 찾아온다고 조금은 익살스럽게 표현되어있다. 그리고 시를 일다보면 재미가 있는데 그건 시구의 독창성과 이렇게 저렇게 다른 소리를 하는듯하다가 뒤통수를 때리는 반전 때문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우리는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되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시인은 드러나게 무언가를 비판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해석으로 우리를 환기시키곤 한다. [배고픔이라는 게 있다]에 ‘아침 해처럼 씩씩한 배고픔’이라는 시구. 도대체 아침 해처럼 씩씩한 배고픔이란 무엇 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해는 힘차니까 그럼 힘찬 배고픔일까? 여기에 시인은 새로운 뜻을 부여한다. 나를 불량식품이라 본다고 생각되는 상대.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거만 겉치레 등을 ‘씩씩 으로’ 포장한 것은 아닌가? 시인의 포장력은 대단한 것 같다. 또한 시에 흐르는 이미지의 연관성 아까 이야기 했던 전이 또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일상에서 발견된 명쾌한 생각들 과학원리처럼 다른 시각으로 무언가 발견하고 무언가를 추적 하는듯한 비유들은 부러울 따름이다. 그리고 아까 반전을 잠시 언급했는데 [귀는 위험할 수밖에]에 눈과 귀의 비교를 통해 ‘귀는 치명적이지 않다‘라는 결과적으로 보면 그 말을 역설하고 있다는 점이 더욱 말하고자 한반에 힘을 실어주는 힘인 것 같다. 시집 전반을 통해 일상에 떠넘긴 그의 비유는 가장 살갑게 와 닿는다. 산문체모습을 하고 있는 시가 독자에게 쉽게 다가갈 수는 있지만 그 전반에 깔린 의미들까지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것인지가 의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