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중고매장에서 이번 주말에 특별 할인 행사를 하는 모양이다. 구매 금액 3만 원 이상은 4천 원, 5만 원 이상은 1만 원 즉시 할인이라니 제법 쏠쏠한 혜택인 것처럼 보이지만, 몇 주 전에만 해도 구매 부수 2권 이상은 10%, 4권 이상은 20%, 6권 이상은 30% 할인 행사를 했었으니, 어찌 보면 이용자 입장에서는 혜택의 폭이 더 줄어든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귀님이야 지난번 행사 때에도 굳이 중고매장을 방문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굳이 찾아가지는 않을 생각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살 만한 물건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 번 지적했듯이, 물건이 괜찮으면 가격이 안 좋고, 가격이 좋더라도 여러 매장에 한 권씩만 있으니 교통비나 배송비까지 감안하면 새책과 별 차이가 없어져서 구입을 꺼리게 되는 거다.


지난번 할인 행사 때에도 전부터 사고 싶은 물건이 딱 한 권씩만 있었던 논현점과 부천점을 하루씩 찾아가 볼까 생각해 보았지만, 우주점에 올라온 재고 목록을 훑어도 한 곳에서 2권 이상 구입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워 보여서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니 이제 최소한 3만 원 이상 구입해야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행사라면 더욱 더 참여하기가 어렵지 않겠나.


나귀님이 살까 말까 생각 중인 저 책들의 상태를 보면 알라딘 중고매장의 현 상황이 여실히 드러나는 듯하다. 원체 보기 드문 책들이어서 예전 같으면 누가 진즉 가져가 버렸을 법한데, 나귀님이 발견한 지 6개월 가까이 되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팔리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귀님뿐만 아니라 다른 대부분의 이용자들도 구입을 꺼리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어찌 보면 중고매장의 문제는 우후죽순식 확장의 역설로도 보인다. 중고 물품의 공급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매장이 늘어나는 만큼 상품은 줄어들게 마련이어서, 이제는 중고 서적 대신 신간이나 문구를 더 많이 진열한다. 그나마 남아 있는 중고 물품도 대부분 악성 재고일 뿐이고, 나귀님의 경우처럼 어쩌다 살 만한 물건이 있어도 사방팔방에 뿔뿔이 흩어져 있다.


중고매장 초창기에 종로점이나 신촌점에 가면 늘 한두 박스씩은 구입했던 나귀님이지만, 지금은 매장마다 살 만한 물건이 한 개쯤 뿐이고, 그나마도 가격이 맞지 않거나 배송료가 아까워서 사지 않고 버티는 참이니, 그 물건은 머지않아 악성 재고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반짝 할인 행사 대신 가격이나 배송료 인하 같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결국 덩치 늘리기에만 골몰해 매력을 상실한 것이 알라딘 중고매장의 현 상황이 아닐까 싶다. 매장은 늘어나고, 상품은 줄어들고, 수익도 줄어드니 가격을 올리자고 생각했겠지만, 이용자라고 해서 무조건 수긍할 리는 없다. 중고 구매의 매력은 어디까지나 '싼 맛에 하나 더' 산다는 것인데, 중고매장의 정책은 이와 정반대로 가고 있으니 외면당하는 것이 아닐까.


문득 예전 어느 헌책방 사장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주인은 절대 손님보다 똑똑한 척 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1만 원짜리 책이 있어도 9천 원만 부르면 손님은 '여기는 주인이 가격을 잘 몰라서 싸게 판다'고 생각해서 단골이 되지만, 항상 제값을 부르면서 에누리조차 없으면 손님도 횡재하긴 글렀다고 생각해서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구입을 삼가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 젊은이들이 술을 마시지 않아서 대학가의 식당들이 폐업까지 고려한다는 뉴스 기사가 나온다. 음주 문화가 바뀐 것도 사실인 듯하지만, 그보다는 코로나 이후 급격히 인상된 주류와 음식 가격의 영향도 없지 않을 듯하다. 뒤늦게 가격을 내리는 곳도 있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 아닐까. 나귀님 보기에는 알라딘 중고매장의 상황도 다르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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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양반이 까먹었는지 태블릿을 놓고 나갔기에 오랜만에 유튜브에 들어가 보니, 배우 김석훈의 채널에 고액 세금 체납자 압수품 경매를 살펴보는 동영상이 있기에 클릭해 보았다. 이 배우는 홍길동이며 "궁금한 이야기"며, 여하간 반듯한 이미지로만 생각되었는데, 의외로 중고 물건을 좋아해서 종종 찾아다닌다기에 신기하면서도 뭔가 친근한 느낌까지 생겼다.


간혹 뉴스에서 국세청 직원이 고액 세금 체납자의 자택을 급습해서 집안 곳곳에 숨겨놓은 현금이며 각종 고가 물품을 압수했다는 내용이 보도되는데, 이번 경매는 그렇게 압수한 물품을 처분하는 자리였다 한다. 경매는 3월 11일에 이미 끝났으며, 김석훈은 경매를 앞두고 진행사인 서울옥션을 방문해서 미리 물품을 확인하고 설명을 듣는 내용을 콘텐츠로 제작했다.


압수품 중에는 가방과 장신구 같은 각종 "명품"은 물론이고, 미술품과 골동품에 심지어 와인까지도 있었는데, 의외로 책도 한 권 있어서 특이하다 싶었다. 지난번 최화정 유튜브에서 윤유선 집에 있다고 나왔던 데이비드 호크니의 초대형 화집인데, 출간 당시 가격이 수백만 원대이고 지금은 더 뛰었으니 충분히 고가 물품이라고 간주되어 압수 대상이 될 만해 보인다.


김석훈도 가방과 장신구와 와인 같은 각종 "명품"보다는 이 책을 마음에 두었던 모양이다. 추정 낙찰가 300-700만 원이라서 자기도 400만 원까지는 쓸 의향이 있었다지만, 실제 경매의 진행 상황을 살펴보니 이미 830만 원까지 가격이 오른 상태여서 응찰도 못 하고 깨끗이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나귀님 입장에서는 저 응찰가가 뭔가 너무 비싸지 않은가 싶었다.


왜냐하면 지난번에 쓴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호크니의 초대형 화집은 원래 정가 400만 원이지만 지금도 알라딘에서는 850만 원에 구입 가능하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래 저 초대형 화집에는 전용 받침대도 끼워주었던 반면, 이번에 경매에 나왔다는 화집은 그 받침대가 없는 듯했다. 신품을 850만 원에 구입할 수 있다면 중고로 830만 원은 비싸지 않나?


물론 애초에 9,000부 한정판이고 해외에서는 모두 품절이니 830만 원에 구입해도 충분히 이득이겠지만, 만약 알라딘에 재고가 있다면 차라리 적립금 25만 원 받고 정가 850만 원에 신품을 사는 편이 더 이득일 것이다. 관건은 알라딘의 재고 유무인데, 어쩌면 진짜로 창고에 먼지 쌓인 재고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또 어쩌면 "전산 착오"로 재고 없는 책일 수도 있다.


여하간 진짜로 있다고 치면, 딱 "콘텐츠 각"이기는 하다. "정가 850만 원, 전세계 9,000부 한정판, 전설의 희귀본 구입기!"라며 주문부터 "언박싱"까지, 아니, 한 발 더 나아가 그걸 중고매장에 들고 가서 정가의 20퍼센트인 170만 원에 중고로 되파는 과정까지 찍어보면 제법 화제가 되지 않을까. 알라딘 회원 중에 혹시 유튜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시도해 보시라.


그나저나 저 화집의 낙찰가가 얼마인지 궁금해서 구글링했더니, 경매 결과는 서울옥션 회원에게만 공개된다 해서 결국 알아내진 못했다. 한 번 부른 가격이 떨어질 리는 없으니 결국 830만 원 이상의 가격으로 낙찰되지 않았을까. 물론 김석훈이 탐낸 또 다른 물품인 달항아리는 경매 시작과 동시에 응찰가가 4천만 원이었으니, 책값이야 새 발의 피 수준이다만.


한편으로는 저 호크니 화집의 원래 소유주가 과연 누구였을지 궁금하다. 단순 치부 목적에서 고가품을 섭렵하다 한정본 화집까지 구입한 걸까, 아니면 호크니의 그림을 구입하기 위한 참고서로 구입한 걸까, 아니면 진짜로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이것까지 구입한 걸까. 그런데 어쩌다가 고액 세금 체납자가 되어서 기껏 산 책을 빼앗기고 경매에 내보낸 걸까.


물론 뒤집어 생각해 보면 딱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고액 체납자의 기준이 2억이라니 이렇게 재산 압류까지 들어갔다면 최소 수억에서 최대 수십억 단위의 범법자라고 봐야 할 테니까. 최근 늘어난 전세 사기 사건에서도 건물주가 국세 체납자인 경우가 많았으니, 상습 고액 체납자라면 세금은 둘째 치고 다른 방면에서도 이미 피해자를 다수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그나저나 책 한 권에 830만 원이라니. 가진 책 전부를 오늘 당장 경매에 내놓아도 총액이 그쯤은 못 될 나귀님 입장에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금액이다. 물론 어쩌다 수도 요금 한 번 밀리기만 해도 가슴 덜컥 하는 나귀님 입장에서는 무려 세금을 수억씩 체납하면서까지 호크니 화집을 집에 두고 있었다는 것 역시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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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읽기의 계보"라는 새로운 서비스를 내놓은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 주였나, 오랜만에 문득 생각이 나서 알라딘의 또 다른 신규 서비스인 "투비컨티뉴드"에 들어갔더니만, 알라딘에서 서비스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창작자들의 성토가 한창이기에, 이것도 결국 오래 못 가겠구나 싶었는데 또 새로운 서비스라니, 이건 또 얼마나 가다 말려나.


그나저나 무슨 내용인가 궁금해서 클릭해 보니 주제별 책 소개인 듯한데, 26년 1호의 주제는 "AI는 인간의 꿈을 꾸는가?"이다. 대강 그 주제에 해당하는 책들을 줄줄이 소개하고 설명을 덧붙였는데, 어째서인지 사고싶어도 살 수 없는 책들이 몇 가지 눈에 띈다. 예를 들어 "신화적 원형" 항목에 소개된 에이드리엔 메이어의 <신과 로봇>은 현재 절판이기 때문이다.


"대항문화와 실리콘밸리" 항목에 소개된 티머시 리어리의 <플래시백>도 역시나 절판본인데, 이건 오역 논란까지 있었던 책이다. 심지어 "불평등 가속 체계" 항목에서는 <AI 지도책>의 서지 정보를 "에이드리엔 메이어 지음, 안인희 옮김, 을유문화사"라고 잘못 적어놓기도 했는데, <신과 로봇>의 내용을 잘못 "복붙"한 결과로 보이니, 이래저래 부실공사투성이다.


책을 소개하고 추천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구입 가능한 책과 가능하지 않은 책, 절판본과 오역본을 구분하는 것처럼 최소한의 정돈은 필요하지 않았을까. 물론 옥석을 뒤섞다 못해 존재하지 않는 정보까지 존재한다고 우기는 환각 증상이 AI의 특성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는 지금 상황에서 보자면, "읽기의 계보" 서비스야말로 충분히 현 추세에 맞는 것 같다만...



[*] 위에 쓴 것처럼 알라딘의 잘못에 대해 지적질을 했더니 어느새 슬그머니 서지정보를 수정해 놓았다. 기껏 책 팔아보겠답시고 이벤트를 만들면서도 서지정보 하나 제대로 못 적어놓고, 심지어 팔 수도 없는 절판본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 밑에 장바구니 담기 버튼을 넣어서 사고 싶어도 살 수 없어 황당한 상황을 만들다니, 이래저래 부실하고 시늉뿐인 알라딘이다. 지난번 21세기 최고의 책 이벤트도 그랬지만, 매번 뭔가 일을 벌일 때마다 잘못되거나 미진한 부분이 눈에 띄니, 뭔가 진심이라곤 없고 시종일관 불성실하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여하간 지들이 잘못한 것은 나귀님 서재 글 읽고 슬그머니 고치면서도, 정작 선정하고 나서도 신청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뭉개 버린 서재의달인 기념품은 여전히 소식도 없으니 참으로 웃기는 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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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국사 원전을 읽어보자 싶어서 <삼국사기>와 <고려사> 번역본을 통독한 적이 있다. 문제는 그 다음 읽을거리였는데, "조선왕조실록" 국역본이 있지만 워낙 가격이 비싸고 중고도 희귀해서 구입이야 꿈도 못 꾸었다. 전자책 씨디롬은 나오기 전이고, 도서관에서도 관외 대출 불가 자료이다 보니, 매일같이 출퇴근하며 읽어보는 수밖에 없나 싶어 고민스러웠다.


마침 옆에서 지켜보던 후배 하나가 '그런 책 우리집에 많다'기에 무슨 뜻인가 했더니, 할아버지가 국학계의 원로이시고, 마침 실록 국역을 주관한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도 이사로 재직하셔서 서재에 국역본이 다수 있었던 모양이다. 후배가 나중에 집에 가서 찾아보니, 실록 중에도 어떤 것은 분량이 많고, 또 어떤 것은 단종처럼 그 재위 기간만큼 내용도 짧았다던가.


지금 다시 확인해 보니 실제로 재위 기간이 짧았던 문종과 단종의 실록은 분량도 적어서 각각 전2권과 전4권인데, 그나마도 색인을 제외하면 1권과 3권짜리일 뿐이다. 적게는 십여 권, 많게는 수십여 권에 달하는 다른 실록에 비하자면 아담한 편이지만, 언젠가 인터넷 헌책방에 매물로 올라온 <단종실록>을 보고는 살까말까 한참 고민한 끝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뭐든 낱권 하나를 사 놓으면 나머지도 구입해 완질을 갖추어야 만족하는 나귀님이니, 자칫 <단종실록>을 샀다간 이후 400여 권이 넘는 다른 실록도 찾아 헤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인터넷으로 국역본을 열람할 수 있으니 안 사길 잘 했다 싶으면서도, 문종이나 단종의 '미니 실록' 한 질 정도야 살 걸 그랬나 싶어 살짝 아쉽다.


"조선왕조실록" 국역본은 1960년대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세종실록>을 시작으로 여러 종을 간행했는데, 수년 뒤에 다른 국역 기관인 민족문화추진회까지 번역에 뛰어들면서 잡음도 있었다고 알고 있다. 어쨌거나 실록 국역은 1900년대에 일단 완료가 되었지만, 서두른 만큼 오역이 많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어 최근에 수정 재간행 사업이 시작된 모양이다.


실록은 워낙 분량이 많아서 전문 연구자를 제외하면 개인의 구입 소장은 무리일 법한데, 그래서인지 한때 "조선왕조실록" 씨디롬이 제작되어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에 나귀님도 씨디롬이면 하나 구입해 볼까 하는 마음에 서울도서전에서 해당 업체 부스에 찾아가 가격을 문의했더니, 흘끗 한 번 쳐다보기만 하고 대답도 없이 무시해 아니꼬왔던 기억이 난다.


종이책과 마찬가지로 씨디롬 역시 개인보다는 기관 구매자를 겨냥하고 개발비를 감안해 고가로 책정했을 터이니, 지금 가격으로는 수백만 원짜리 자료를 사겠다며 기웃거리는 나귀님이 사뭇 가소롭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수요를 과소평가해서 안하무인으로 굴다가 훗날 복제품 씨디롬이 단돈 몇만 원에 판매되며 매출을 잠식당해 폐업했다니 씁쓸한 일이다.


한때 실록 전권을 담은 기술 혁신이라 칭송되던 씨디롬도 지금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쓰는 사람도 없고, 인터넷 시대에 발맞춰 실록 전권을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서 누구나 무료로 볼 수 있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다만 이제는 자료가 있어도 열람할 시간이 없고, 열람할 시간을 얻어도 시력과 지력이 모두 쇠퇴했으니 그저 한탄스러울 뿐이다.


그나저나 새삼스레 <단종실록>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된 까닭은 당연히 최근 화제가 된 영화 <왕과 사는 남자> 때문이다. 처음에는 단종과 엄흥도 이야기라고 하기에, '아니, 그거 모르는 사람 있나' 싶어 시큰둥했었다.(문득 소설 <다빈치 코드>가 인기이던 시절, '아니, <성혈과 성배>에서 다 설명한 이야기인데, 그게 뭐 신기하냐'며 코웃음 친 기억도 난다).


그런데 엄흥도 일화나 한명회의 외모에 대해서도 이번에야 처음 알았다는 사람이 많은 듯하니, 세대가 또 한 번 바뀌며 한때 익히 알려진 사실마저 생소하게 느끼는 사람이 늘어난 모양이다. 언젠가 <놀면 뭐하니>에서 '주주' 자매가 '사육신'(死六臣)을 무슨 '신'(神)으로 착각해 유재석에게 핀잔을 들었듯, 머지않아 장희빈이나 임꺽정도 모른다는 사람이 나오려나.


심지어 바깥양반도 엄흥도에 대해 처음 듣는다기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맹꽁이 서당>에도 나왔던 이야기이고, 예전에 큰 인기를 끌고 훗날 리메이크까지 된 드라마 <사모곡>에서도 '엄흥도 후손 찾기'가 줄거리에서 중요한 소재 가운데 하나로 나왔으니 제법 유명한 일화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이렇게 어느 정도 망각된 다음이라 영화도 인기인 것일까.


<왕과 사는 남자>의 경우, 영화의 완성도는 아쉽다는 평가가 지배적인 반면, 배우의 호연에 대해서는 칭찬이 많은 듯하고, 무엇보다도 결말 부분의 비극적인 묘사가 심금을 울렸다는 데에 관객 모두의 의견이 일치하는 모양이다. 어찌 보면 갖가지 폭력과 살인과 패륜과 반전이 일상화된 'K-그로테스크' 영화에 대한 반발로 오히려 순한 맛을 반기는 것은 아닐지.


그나저나 바깥양반도 조만간 영화를 보고 오면 십중팔구 단종 책을 찾아내라고 난리칠 듯해서, 뭐가 있나 미리 뒤져 보니 영화의 배경이라는 사육신 관련서가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사육신의 유고집인 <육선생 유고>이고, 또 하나는 사육신의 행적집인 <육신록>으로 표제작을 비롯해 "단종출손기", "참판박공일기", "육문정출절행록", "육신묘비명"이 들어 있다.


<육신록>의 역주자 홍기원은 출판사 민속원의 대표이기도 한데, 자기 집안인 풍산 홍씨 전래 자료인 궁중문학 필사본 <서궁일기>, <육신록>, <읍혈록>의 역주본을 간행한 바 있다. <육신록>에 수록된 가계도를 보면 풍산 홍씨 중에는 홍국영과 혜경궁 홍씨처럼 눈에 익은 인물도 눈에 띄는데, 한 가문에서 궁중문학의 대표 작가가 여러 명 나왔다는 점은 흥미롭다.


언젠가 이야기했듯이 일본 중세 여성 문학 <가게로 일기(청령일기)>를 쓴 미치쓰나의 어머니를 중심으로 이와 비슷한 가계도를 그려 보면, 세이쇼나곤과 무라카미시키부를 비롯해 헤이안 시대의 주요 여류 작가들이 혈연과 직업으로 연결된 관계망이 나타나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비록 시대와 정서의 차이는 있지만 꽤 흥미로운 비교 대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육신록>에 수록된 자료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사육신이 중심이기 때문에, 엄흥도의 행적은 노산군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정도로 짤막하게 한두 문장만 언급되고 만다. 그 행적을 감안해 보면 실록에는 당연히 언급이 없고 훗날 야사에서만 언급되었다고 하니, 아마 <왕과 사는 남자>의 각본 집필 과정에서도 이 자료가 유용하게 사용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물론 야사인 탓에 그 신빙성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따라붙는다는 점도 감안할 법하다. 정사에서도 사실의 미화 시도가 나타나듯이, 야사에서도 마찬가지 경향이 나타나니까. <육신록>의 내용 중에도 훗날 단종의 원혼이 나타나 영월 원님이 줄줄이 죽어나갔다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후일담이 나오니, 그 전승이 사실에서 상상 차원으로 넘어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영화의 인기 덕인지 영월에 관광객이 몰린다더니, 알라딘에도 뒤늦게 단종 관련서가 우후죽순 간행되니 우스운 일이다. 이러다간 <단종 인문학>, <열아홉 살에 읽는 단종>, <처형은 당하지만 사약은 먹기 싫어> 같은 책도 조만간 나오지 않을까. 물론 일개 영화를 빌미로 세조 왕릉에 악플 다는 사람보단 이런 책이라도 읽는 사람이 차라리 나아 보이기는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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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먹고 설거지 하는데 바깥양반이 식탁에 앉아 <흑백요리사 2>를 보기에 왔다갔다 띄엄띄엄 구경했는데, 여러 유명 호텔의 주방장을 역임하고 학교 강의도 해서 젊은 요리사들의 존경을 받는다는 프랑스 요리의 달인 박효남의 인터뷰와 대결 장면이 나온다. 문득 저 사람 혹시 예전에 피터 현에게 한 수 배웠다던 그 힐튼 호텔 프랑스 요리사 아닌가 궁금해졌다.


구글링해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었다. 피터 현 자서전에서 봤는지, 아니면 나중에 박효남의 이력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에서 재연 배우의 연기로 봤는지 모르겠지만, 여하간 프랑스에서 오래 살았던 피터 현이 한국에 돌아와 호텔 식당에 가서 요리를 하나 주문했는데, 막상 먹어 보니 자기가 아는 맛이 아니어서 다시 만들어 달라 항의했다는 거다.


당시의 주방장이 박효남이었는데, 손님의 항의에 두 번 세 번 요리를 다시 만들어 내놓아도 여전히 이게 아니라고 일축하니, 나중에는 아예 피터 현에게 다가가서 '제가 잘 몰라서 그런 모양이니, 손님께서 조리법을 알려주시면 그대로 만들겠습니다'라고 정중하게 요청했고, 저 미식가가 알려주는 그 요리의 프랑스 '현지' 조리법을 거꾸로 전수받았다는 것이다.


나중에 피터 현이 입원하자 박효남이 그 요리를 만들어 가져갔고, 이제는 제대로 만들 줄 안다며 인정받았다는 후일담도 있다. 어찌 보면 훈훈한 이야기고, 또 요즘 분위기에서는 '손놈'이냐 '귀인'이냐를 놓고 치열한 키보드 배틀이 벌어질 만한 사안이지만, 박효남은 이 사건을 자기 경력에서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로 여기는 듯 인터뷰마다 번번이 언급했다.


피터 현(현웅, 1927-2019)은 아쉽게도 오늘날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육이오 직후 미국 유학 중 동명이인 공산주의자로 오인되어 국외추방을 당했고, 이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해서 여러 문인과 교우하며 언론인 겸 편집자로 활동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한때 사르트르와 포크너의 (결국 불발된) 대담에 동석했다는 것만 봐도 그 영향력을 알 만하다.


그의 자서전이 <월간 조선> 연재를 거쳐 <세계를 구름처럼 떠도는 사나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도 간행되었는데, 나귀님 입장에서는 제한된 지면에서 차마 다 밝히지 못한 본격적인 교우록을 펴내지 못한 채로 저자가 타계한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예를 들어 자서전에 달랑 한 줄 나오는 '내 친구 질 들뢰즈'라는 구절만 봐도 솔깃할 사람이 적지 않을 테니...



[*] 피터 현도 남다른 사람이지만 형님들이 워낙 쟁쟁한 분들이다 보니 아무래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큰형 현영학(1921-2004)은 민중 신학자 겸 민주화 운동가이고, 둘째형 현봉학(1922-2007)은 의사로 흥남철수작전 당시 미군 선박으로 피난민을 대거 실어 나르는 데에 일익을 담당한 것으로 유명하며, 셋째형 현시학(1924-1989)은 해군 장성으로 오늘날 한국 해군의 기틀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으니 이래저래 대단한 집안 같기도 하다. 물론 지금 와서는 피터 현이 박정희에 감화되어 전기까지 썼다는 이유 때문에 무작정 비난부터 박고 시작할 사람이 훨씬 더 많겠지만...


[**] 피터 현 다음으로 파리를 주름잡은(?) 인물로는 1970-80년대에 <한국일보> 특파원이었던 김성우가 있다. 파리에 머물면서 이오네스코를 인터뷰한 것을 시작으로, 그의 소개를 받아 알랭 로브그리예 등 여러 현존 작가를 인터뷰하고 한국에 초청하기도 했으며 (하지만 사르트르만큼은 만나지 못했으며, 결국 인터뷰 대신 장례식만 취재해서 기고문을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명 문학 작품의 무대가 된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세계문학기행>을 연재하여 큰 인기를 얻었던 인물이다. 귀국해서도 <한국일보>에 계속 근무하다 퇴직한 이후에는 고향인 남해의 섬을 하나 매입해서 유유자적한다는 소식만 얼핏 들었는데, 요즘은 뭘 하시나 검색해 보았더니만... 다행히 아직 돌아가시지는 않았는데, 어째서인지 '윤어게인' 집회며 발언에 열심인 듯해서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나귀님 입장에서는 이재명과 민주당을 좋아하는 사람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엄령조차 제대로 실행하지 못해서 우왕좌왕하다 자멸해 놓고 '실패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식의 궤변만 늘어놓는 윤석열과 국민의힘을 좋아하는 사람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니... (바로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지지자인 피터 현이 '의문의 1승'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 뜻하지 않게 피터 현을 국외추방시킨 원인이었던 동명이인 공산당원 피터 현(1906~1993)은 미국 이민 후 연극계에서 활동하던 재미교포이다. 언론인 피터 현의 자서전에는 훗날 미국에 돌아가서 수소문 끝에 저 동명이인 피터 현을 만난 이야기도 실려 있다. 동명이인 피터 현의 부친 현순(1880-1968)은 감리교 목사이자 재미 독립운동가였으며, 누나 앨리스 현(1903-1956)도 동생과 마찬가지로 미국 공산당원이었지만 엉뚱하게도 공산주의를 표방한 국가였던 북한 체류 중에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전한다. 앨리스 현에 대해서는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라는 전기가 나와 있고, 동명이인 피터 현의 자서전 <만세>도 번역되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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