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먹고 설거지 하는데 바깥양반이 식탁에 앉아 <흑백요리사 2>를 보기에 왔다갔다 띄엄띄엄 구경했는데, 여러 유명 호텔의 주방장을 역임하고 학교 강의도 해서 젊은 요리사들의 존경을 받는다는 프랑스 요리의 달인 박효남의 인터뷰와 대결 장면이 나온다. 문득 저 사람 혹시 예전에 피터 현에게 한 수 배웠다던 그 힐튼 호텔 프랑스 요리사 아닌가 궁금해졌다.


구글링해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었다. 피터 현 자서전에서 봤는지, 아니면 나중에 박효남의 이력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에서 재연 배우의 연기로 봤는지 모르겠지만, 여하간 프랑스에서 오래 살았던 피터 현이 한국에 돌아와 호텔 식당에 가서 요리를 하나 주문했는데, 막상 먹어 보니 자기가 아는 맛이 아니어서 다시 만들어 달라 항의했다는 거다.


당시의 주방장이 박효남이었는데, 손님의 항의에 두 번 세 번 요리를 다시 만들어 내놓아도 여전히 이게 아니라고 일축하니, 나중에는 아예 피터 현에게 다가가서 '제가 잘 몰라서 그런 모양이니, 손님께서 조리법을 알려주시면 그대로 만들겠습니다'라고 정중하게 요청했고, 저 미식가가 알려주는 그 요리의 프랑스 '현지' 조리법을 거꾸로 전수받았다는 것이다.


나중에 피터 현이 입원하자 박효남이 그 요리를 만들어 가져갔고, 이제는 제대로 만들 줄 안다며 인정받았다는 후일담도 있다. 어찌 보면 훈훈한 이야기고, 또 요즘 분위기에서는 '손놈'이냐 '귀인'이냐를 놓고 치열한 키보드 배틀이 벌어질 만한 사안이지만, 박효남은 이 사건을 자기 경력에서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로 여기는 듯 인터뷰마다 번번이 언급했다.


피터 현(현웅, 1927-2019)은 아쉽게도 오늘날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육이오 직후 미국 유학 중 동명이인 공산주의자로 오인되어 국외추방을 당했고, 이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해서 여러 문인과 교우하며 언론인 겸 편집자로 활동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한때 사르트르와 포크너의 (결국 불발된) 대담에 동석했다는 것만 봐도 그 영향력을 알 만하다.


그의 자서전이 <월간 조선> 연재를 거쳐 <세계를 구름처럼 떠도는 사나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도 간행되었는데, 나귀님 입장에서는 제한된 지면에서 차마 다 밝히지 못한 본격적인 교우록을 펴내지 못한 채로 저자가 타계한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예를 들어 자서전에 달랑 한 줄 나오는 '내 친구 질 들뢰즈'라는 구절만 봐도 솔깃할 사람이 적지 않을 테니...



[*] 피터 현도 남다른 사람이지만 형님들이 워낙 쟁쟁한 분들이다 보니 아무래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큰형 현영학(1921-2004)은 민중 신학자 겸 민주화 운동가이고, 둘째형 현봉학(1922-2007)은 의사로 흥남철수작전 당시 미군 선박으로 피난민을 대거 실어 나르는 데에 일익을 담당한 것으로 유명하며, 셋째형 현시학(1924-1989)은 해군 장성으로 오늘날 한국 해군의 기틀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으니 이래저래 대단한 집안 같기도 하다. 물론 지금 와서는 피터 현이 박정희에 감화되어 전기까지 썼다는 이유 때문에 무작정 비난부터 박고 시작할 사람이 훨씬 더 많겠지만...


[**] 피터 현 다음으로 파리를 주름잡은(?) 인물로는 1970-80년대에 <한국일보> 특파원이었던 김성우가 있다. 파리에 머물면서 이오네스코를 인터뷰한 것을 시작으로, 그의 소개를 받아 알랭 로브그리예 등 여러 현존 작가를 인터뷰하고 한국에 초청하기도 했으며 (하지만 사르트르만큼은 만나지 못했으며, 결국 인터뷰 대신 장례식만 취재해서 기고문을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명 문학 작품의 무대가 된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세계문학기행>을 연재하여 큰 인기를 얻었던 인물이다. 귀국해서도 <한국일보>에 계속 근무하다 퇴직한 이후에는 고향인 남해의 섬을 하나 매입해서 유유자적한다는 소식만 얼핏 들었는데, 요즘은 뭘 하시나 검색해 보았더니만... 다행히 아직 돌아가시지는 않았는데, 어째서인지 '윤어게인' 집회며 발언에 열심인 듯해서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나귀님 입장에서는 이재명과 민주당을 좋아하는 사람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엄령조차 제대로 실행하지 못해서 우왕좌왕하다 자멸해 놓고 '실패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식의 궤변만 늘어놓는 윤석열과 국민의힘을 좋아하는 사람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니... (바로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지지자인 피터 현이 '의문의 1승'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 뜻하지 않게 피터 현을 국외추방시킨 원인이었던 동명이인 공산당원 피터 현(1906~1993)은 미국 이민 후 연극계에서 활동하던 재미교포이다. 언론인 피터 현의 자서전에는 훗날 미국에 돌아가서 수소문 끝에 저 동명이인 피터 현을 만난 이야기도 실려 있다. 동명이인 피터 현의 부친 현순(1880-1968)은 감리교 목사이자 재미 독립운동가였으며, 누나 앨리스 현(1903-1956)도 동생과 마찬가지로 미국 공산당원이었지만 엉뚱하게도 공산주의를 표방한 국가였던 북한 체류 중에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전한다. 앨리스 현에 대해서는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라는 전기가 나와 있고, 동명이인 피터 현의 자서전 <만세>도 번역되어 나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