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를 보니 미국 트럼프 정부의 폭주에서 선봉을 담당한 머스크의 정부효율부(DOGE)에서 '미국의 소리'(VOA) 방송의 해체에 돌입했다는 뜻밖의 소식이 나온다. VOA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설립된 미국 정부의 선전 부서로 냉전 시기에는 소련과 동구권을 상대로 방송했고, 우리나라에서도 독재 정권 시기 검열을 피해 외부 세계 소식을 듣는 통로로 활용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박정희 정권의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보도였으니, 국내 언론이 검열로 침묵을 지키는 와중에 VOA가 오히려 민주화 운동에 일익을 담당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지금도 러시아나 중국 등의 독재 국가를 상대로 비슷한 역할을 지속하는 까닭인지, 이번의 갑작스러운 VOA 폐지 소식에 러시아와 중국 정부는 오히려 적극 환영하는 입장이라고 전한다.


물론 미국 정부의 입장을 주로 대변하는 매체이니 자국의 이익을 항상 염두에 두게 마련이고, 그렇기 때문에 보도 내용도 항상 공정하리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최근 미국 해외원조국(USAID)의 갑작스러운 폐지 결정과도 유사하게, 수십 년째 이어진 사업을 하루아침에 없앤다는 것이 과연 미국의 장기적인 이익에 부합할지 여부는 의문일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이번 VOA 폐지 조치로 가장 당혹감을 느낀 쪽은 바로 탄핵 반대 시위를 주도하는 윤석열 지지자들이라는 뉴스도 있었다. 무슨 뜻인가 알아보니, 그중 다수가 탄핵 심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VOA의 방송 내용 일부를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오해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생활 영어 프로그램의 내용 일부를 일종의 암호 메시지로 해석했기 때문이라나!


그렇잖아도 극우 세력이 탄핵 반대 집회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나란히 들고 나오고, 조만간 트럼프가 윤석열을 구해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입에 올리며, 심지어 탄핵 찬성 연예인을 미국 CIA(?)에 신고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꾸준히 있었다. 그런데 같은 편이라고 믿었던 미국 정부의 뒤통수로 VOA가 폐지되었으니, 이게 무슨 영문인가 싶어 당황할 수밖에!


한편으로는 쌤통이다 싶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명분 없는 비상 계엄을 실시한 현직 대통령이며 그 지지자들 모두가 이처럼 극우 유튜버의 갖가지 가짜 뉴스를 신봉한 까닭에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한심하고 남부끄럽기 짝이 없다. 물론 트럼프 정부의 VOA 폐지가 실현되더라도, 극우 세력은 또 다른 가짜 뉴스로 억지 주장을 지속하겠지만.


그나저나 이쯤 되니 예전에 VOA에서 방송한 강연을 엮어 만든 책이 기억나서 책장을 뒤져보게 되었다. <미국소설론>(VOA 편저, 서숙 옮김, 탐구신서 83, 1985)이라는 문고본인데, 원제는 "미국의 소리 포럼 강연: 미국 소설"(The Voice of America Forum Lectures: The American Novel)이며, 쿠퍼의 <개척자>부터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까지 19종의 작품 해설이다.


셔우드 앤더슨의 연작 소설 <오하이오 주 와인즈버그>를 해설한 평론가 어빙 하우를 제외하면 강연자 대부분은 영 낯선 편인데, 그래도 헤밍웨이 전기로 유명한 칼로스 베이커가 해당 작가의 대표작 <무기여 잘 있거라>의 해설을 담당한 것을 보면, 대부분 현직 교수였다는 나머지 강연자들도 해당 작가나 작품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왕 책을 꺼낸 김에 몇 가지 읽어보자 싶어서, 그나마 줄거리를 비교적 뚜렷이 기억하고 있는 작품 위주로 고르다 보니,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 앤더슨의 <오하이오 주 와인즈버그>,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편을 읽어보게 되었다. 비교적 평이하면서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지목해 주니, 이것이야말로 비평의 미덕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허클베리 핀>에 대한 헨리 내쉬 스미스의 설명이다. 마크 트웨인의 이 소설은 <톰 소여>의 속편이자, 백인 부랑아의 방랑기이자, 유머를 앞세운 작품에, 최근 많이 비판받는 것처럼 "깜둥이"를 비롯해서 갖가지 인종차별적 표현이 넘쳐나는 등의 갖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오래 전부터 이른바 '위대한 미국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스미스는 출간 이후 50년간 뜨뜻미지근했던 이 작품에 대한 평가가 올라간 까닭을 미국의 현실에서 찾아보려 한다. 평범한 부랑아였던 헉 핀이 보물 찾기로 벼락부자가 되어 하루아침에 모두의 주목과 선망이 되자 오히려 어색함과 불편함을 느꼈듯이,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거치며 갑작스레 세계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이란 나라도 비슷한 처지였다는 것이다.


급기야 헉 핀은 재산과 명성을 모두 내버리고 자유로운 삶을 찾아 방랑을 떠났고, 이 과정에서 도주 노예를 친구로 삼고 위기에서 구출하며, 결국 다시 문명 세계로 돌아와서도 새로운 도주를 꿈꾸는데, 이 과정 내내 반복되는 임기응변이 미국인 특유의 실용주의와 공명한 까닭에 큰 인기를 끌었으며, 급기야 "위대한 미국 소설"로 공인받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헉 핀의 자유분방하면서도 무책임한 태도에는 장점 못지않게 단점도 뚜렷하다. "이처럼 행동하는 소년, 또는 국가는 일관성 있는 정책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예측할 수도, 믿을 수도 없는 태도로 행동한다는 인상을 줄 것이다."(101쪽) 이는 트럼프 정권 1기부터 줄곧 지적되었듯, 미국 문화의 저류인 반지성주의가 실용주의와 표리 관계인 것과 유사하다.


심지어 트럼프 정권 2기 출범과 함께 지속되는 폭주를 미리 예견한 것처럼 보이는 문장도 있다. "이런 소년이나 국가는 신뢰할 수 없는 우방으로 보일 수도 있다. 아무도 어떻게 그가, 또는 그 나라가 미래의 상황에서 행동할 것인지 과거의 행동으로부터 추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내외를 통해 미국의 국가 정책은 세계에 그같은 인상을 흔히 주어 왔다."(101쪽)


"묵계된, 또는 성문화된 법률보다는 직관적인 정의감에 호소하는 것은 바로 헉 속에 있는 미국적인 특징이라 하겠다. 우리는 법을 준수하지 않기로 유명한 국민이다. (...) 이런 뜻에서 우리 문화 속에는 무정부주의적인 성격이 분명히 있다. (...) 법과 법을 대변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불경은 열정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우리 문화의 어두운 면이다."(102쪽)


물론 트럼프 정권의 폭주를 마크 트웨인 탓으로 돌리려는 것까지는 아니다. 다만 초강대국으로서의 책임을 하루아침에 내버리고 고립을 택하려는 저 나라 지도자의 행동이야말로 끝까지 문명화를 거부하며 개척지로 도주하기를 꿈꾼 저 부랑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위대한 미국 소설"로 평가되는 이유를 아이러니하게도 실감했을 뿐이다.




[*] 검색해 보니 이보다 더 먼저 간행된 <지식과 사회: 미국의 사회학>(탈코트 파슨즈 편저, 임희섭 옮김, 탐구신서 56, 탐구당, 1972) 역시 "미국의 소리 포럼 강연" 시리즈의 번역서라고 한다. 이제 와서 다시 꺼내 보기 귀찮으니 그냥 그렇다는 것만 적어놓고 지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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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탄핵 찬반 시위 뉴스를 보니 문득 해방 직후의 신탁 통치 찬반 시위가 떠올랐다. 그 당시에도 좌익과 우익이 찬탁과 반탁으로 나뉘어 서로를 매도하며 극렬 시위를 벌였다고 하지 않았던가. 비록 사안이야 다르지만, 툭하면 하나임을 강조하던 민족이 이처럼 양분되어 대립한 사례를 더 찾기도 어려워 보이니, 이번 일도 후세가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다.


그나저나 탄핵 반대를 주도하는 극우 세력의 행보는 나날이 기세를 더해 가면서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불안과 공포마저 불러일으키는 모양이다. 최근 시내에 다녀온 바깥양반의 목격담에 따르면, 야당 대표의 이름을 부르고는 '밟아! 밟아!'를 외치며 함께 발을 구르는가 하면, 지하철 안에서까지 '탄핵 찬성하는 놈들은 때려죽이자'고 외치는 노인네들도 있다던가.


이른바 증오 범죄에 대해서는 과장된 측면이 적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귀님으로서도 (왜냐하면 '증오'와 '범죄' 사이의 간극은 예상 외로 넓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현직 대통령이나 야당 대표를 좋아할 리 만무한 나귀님이지만, 설령 두 사람이 눈앞에 서 있다고 해서 주먹부터 휘두를 리는 없지 않겠나!) 이쯤 되면 진짜 큰일이 나지 않을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탄핵 심판 선고일에 경찰이 갑호비상령을 발동하는 한편, 헌법재판소 인근 학교며 주유소(!)까지도 휴업하게 만들 예정이라니, 이미 어느 정도는 폭동이 당연히 벌어지리라 예견되는 상황은 아닐까. 이쯤 되면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제목처럼 "삶은 콩을 곁들인 연한 구조물, 또는 내전의 예감" 속에 살아가는 판이니, 어쩌다 나라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가 싶다.


여차 하면 과거 다른 여러 나라에서 벌어진 무시무시한 내전 상황과 별 차이 없는 상황이 여기서도 펼쳐지려나. 예를 들어 유고와 르완다 내전 당시에는 수십 년 알고 지낸 동네 사람들이 저마다 무기를 들고 이웃집에 쳐들어가는 끔찍하다 못해 초현실적인, 정말 영화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우리에게도 선례가 없지는 않았다.


바로 육이오 전쟁 동안 우리도 그놈의 '동족상잔'을 지겹게 저질렀다기 때문이다. 지금은 대부분 잊어버리거나 외면해버린 상황이지만, 실제 사례를 보면 그 무지막지함이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어느 마을에 인민군이 들어와 좌익이 기세등등하게 누군가를 학살하면 훗날 국군이 진격하며 우익이 돌아와 보복을 가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하니까.


최근 완독한 강신항 교수의 전쟁 일기에도 그런 목격담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다 전쟁이 벌어져서 고향 아산으로 내려갔더니, 인민군이 들어오고 좌익이 위원회를 만들어 동참을 권유했는데, 몇 번 협조하는 척하다가 자택 다락에 숨어 나가지 않았더니, 나중에는 좌익 여럿이 반동 분자를 잡겠다며 집으로 쳐들어오기도 했다던가.


동네 사람 여럿이 목숨을 잃고서야 인민군이 물러갔는데, 곧이어 국군을 따라 돌아온 우익이 원수를 갚겠다며 좌익 협력자를 뒷산에 끌고 가 처형했다는 것이 당시 자경단이었던 강 교수의 목격담이다. 비록 본인도 구사일생의 상황을 겪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폭력을 폭력으로 갚는 악순환만큼은 좌익이건 우익이건 양쪽이 똑같이 잘못한 듯 보이더라고 평가한다.


지난번 서부지법 난입 사건으로 대표되는 탄핵 반대 세력의 행보에서 가장 사람 질리게 하는 부분도 그 폭력성이다. '태극기 집회'로 지칭되는 극우 활동이야 이전부터 있었지만, 자기네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원을 공격하는 모습이야말로 사실상 유례가 없는 호전성의 표출이었으니까. 그야말로 법치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한 행위가 아닌가!


그런 행동들의 원인 규명은 아마 이번 탄핵 심판이 끝나고 나서도 숙제로 남게 되지 않을까 싶다. 개인 비리에 발목 잡힌 대표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야당의 입법과 탄핵 폭주가 매우 나쁜 선례를 만들어 놓은 것처럼, 극우 세력의 증오와 폭력 표출도 그에 못지않게 나쁜 선례를 만들어 놓은 판이니, 솔직히 어떻게 해야만 법치주의를 회복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전에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나날이 격화되는 정치적 대립을 지켜보면 결국 지난 반세기 이상의 역사가 결국 제자리 걸음이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육이오의 동족상잔도 결국 이념 대립의 허무함을 보여준 사례일 뿐이었건만, "내전의 조짐"에 대한 뉴스가 쏟아져 나오는 지금의 상황은 마치 75년 전으로 돌아간 셈이니 이래저래 착잡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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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리를 하다가 이전에 알맹이만 꺼내 놓았던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 구판 <일본단편문학선>과 <나는 고양이다 (외)>를 케이스에 도로 넣다 보니, 새삼스레 케이스 앞면 하단에 있는 그림에 눈길이 갔다. 무슨 옛날 필사본의 삽화에서 가져온 듯한 모양새인데, 알파벳이 적혀 있기에 뭔가 궁금해 검색해 보니 무려 중세 영국의 헤이스팅스 전투를 묘사한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의 일부였다!


헤이스팅스 전투는 1066년에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가 후사를 두지 않고 사망하면서, 그 왕위를 물려받은 잉글랜드 귀족 해럴드와 그 왕위를 넘기라고 주장하는 노르망디의 공작 윌리엄이 벌인 전투이다. 그 결과 해럴드가 전사하고 윌리엄이 승리하면서 막이 오른 이른바 '노르만 정복'은 이후 영국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이 사건을 기념하려 제작되었다.


높이 50센티미터에 길이 70미터에 달하는 이 초대형 직조물은 해럴드가 에드워드의 명령에 따라 노르망디에 가서 윌리엄을 만난 장면부터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가 윌리엄에게 패해 전사하는 장면까지 총58개 장면에 걸쳐서 노르만족의 잉글랜드 정복 과정을 묘사했다. 을유 세계문학전집 케이스에 나온 부분은 그중 23번째와 24번째 장면의 일부로, 해럴드가 윌리엄을 만나고 돌아와 즉위하는 내용이다.


왜 굳이 이 장면을 케이스에 넣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을유문화사 50년사나 창업자 정진숙 회장의 전기 같은 관련 자료를 다시 뒤져 보면 단서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오랫동안 늘 보면서도 몰랐던 내용을 지금이라도 알게 되었으니 이래저래 감개무량이다. 한편으로는 그림에 나온 라틴어 문장만 검색해도 대번 결과를 도출하는 인터넷의 위력을 새삼스레 실감하게 되었다. 진짜 세상 참 좋아졌구나!



[*] 헤이스팅스 전투 자체를 다룬 단행본까지는 없지만, 글항아리에서 <정복왕 윌리엄>이라는 전기가 나오기는 했다.(번역도 편집도 영 엉터리인 출판사이지만, 그래도 책 고르는 눈썰미 하나는 인정할 만하다!) 기타 중세사며 전쟁사 관련서를 뒤지면 관련 내용이 나올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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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70년 만에 부활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제작'이라기에 뭔가 궁금해 살펴보니, "이즈의 무희"와 시기며 배경이 유사한 "소년"이라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아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가 이제야 원고가 발견된 것까지는 아니고, 예전에 잡지에 연재되다 중단되고 이후 전집에 수록되며 완결되었다니, 결국 아는 사람은 다 알았던 작품이었다고 봐야 맞겠다.


물론 전집에만 완결된 형태로 수록되었고, 동성애를 다루었다는 이유 때문인지 그닥 주목받지 못하다가, 수년 전에 일본에서 단행본으로는 처음 간행되어 화제가 되었던 것까지는 옳은 모양이다. 하지만 '부활'이라는 표현은 과하지 않나 싶다. 전집에만 수록된 다른 작품이며 미발표 원고도 여럿일 터인데, 그러면 그 대부분은 수십 년째 '사망' 상태라는 것일까.


이 작가의 번역서 중 가장 많은 작품을 수록한 <川端康成全集>(전6권, 新丘文化社, 1969)만 해도 사후에 간행된 일어판 전집 전35권에 비하면 '새발의 피'인 격이니, 앞으로도 수많은 '부활'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다른 일본 작가며 세계 작가로 범위를 넓혀 보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니, 사실상 세상 거의 모든 문학 작품이 '부활'을 기다린다고 봐야 하는 것일까.


"소년"은 신구문화사 전집의 연보에도 언급되었으니, 저자의 이력에서 아주 잊힌 작품이라고 볼 수는 없을 듯하다. 미완성 시절에도 비슷한 시기의 작품인 "이즈의 무희"며 "16세의 일기"와 함께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어쩌면 '소년 시절 3부작'으로서 함께 놓고 봐야 할 작품일지 모른다.("16세의 일기"는 신구문화사의 전집에만 들어 있다).


그나저나 이번 사안을 핑계로 신구문화사 전집을 오랜만에 꺼내 뒤적이니, 최인훈이 공역자로 참가한 <동경 사람> 후반부를 실은 제6권 말미에 수록된 세 가지 부록이 눈에 띈다. 첫째는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의 에세이 "가와바따 문학의 아름다운 모순", 둘째는 미시마 유키오의 에세이 "영원한 나그네", 셋째는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 "아름다운 일본의 나"이다.


"가와바따 문학의 아름다운 모순"은 <설국>의 번역가이자 스웨덴까지도 동행해서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 통역까지 담당했던 미국 출신의 일문학자 에드워드 G. 사이덴스티커가 (책에는 엉뚱하게도 "J. 사이덴스테커"라고 잘못 나왔다) 쓴 가와바타론이다. 도입부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이 발표되었을 당시 한국에 와서 여행 중이었다는 일화를 소개하는 점이 흥미롭다.


"영원한 나그네"는 미시마가 감탄과 존경을 듬뿍 드러내며 쓴 가와바타론이다. 당시 주일 미국 대사관의 연세 지긋한 여직원이 가와바타의 팬이어서 <천우학>의 문학상 수상 기념 파티를 열었는데, "천 마리의 학"이라는 제목을 "천 개의 깃털을 가진 학"이라고 직역한 나머지 학 모양 장식을 달랑 하나만 올려 놓은 케이크를 내놓았다는 우스운 일화가 들어 있다.


이 글에서 미시마는 느긋하다 못해 무신경해 보이기까지 하는 가와바타의 평소 태도를 찬탄하지만, 사이덴스티커였다면 선뜻 동의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저 소설가가 특유의 느긋한 성격 때문에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 직전까지 원고를 완성하지 못하면서, 그걸 번역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고 자서전에서 회고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와바타는 "아름다운 일본의 나"에서도 유독 번역하기 힘든 일본 고시(古詩)며 인명을 줄줄이 인용하고 있었으니, 사이덴스티커의 입장에서는 이래저래 짜증이 났을 것도 같다. 물론 그런 까다로운 성격까지 일일이 맞춰주며 보필한 것 덕분에 일문학자 겸 번역가로서 사이덴스티커의 주가가 급상승하며 입지가 튼튼해진 것도 사실이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와바타의 인기는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에 반짝했지만, 이후로는 <설국>을 제외하고 대부분 절판될 만큼 한동안 시들해졌다. 이후 가르시아마르케스가 가와바타의 <잠자는 미녀>를 오마주한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을 발표하고, 문학 전집 간행 열풍과 함께 이런저런 작품들이 재번역되면서 다시 주목을 받나 싶더니, 또다시 대부분 사라졌다.


결국 제아무리 유명 작가라도 대표작 한두 가지를 제외하면 절판의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는 법이고, 소소한 작품까지 다 찾아 읽는 것은 극소수 열혈 독자의 몫인 듯하니, 이번에 자칭 '부활'한 <소년>은 과연 얼마나 갈지 지켜볼 일이다. 흥미로운 점은 문제의 '소년' 이름이 무려 '세이노'라는 것이다. 엉뚱한 곳에서 '세이노의 또 다른 가르침'을 만났다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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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북펀드 광고 중에 "붉은 엄마" 운운하는 것이 있기에, 혹시 무슨 여성 공산주의자 이야기인가 궁금해 클릭해 보니, 빨갛긴 빨간데 빨갱이 이야기까지는 아닌 책이었다. 과민하지 않느냐고 핀잔을 줄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미 <레드 엠마>, <레드 로자>, <레드 예니>라는 선례가 줄줄이 나와 있으니, 순진한 나귀님의 잘못이라고만 탓할 것도 아니다.


그중에서 <레드 엠마>는 아나키스트 에마 골드만의 자서전이고, <레드 로자>는 공산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의 전기 만화이며, <레드 예니>는 마르크스의 부인 예니 마르크스의 전기이다.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경우에는 아동 전기까지 몇 종 나올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알고 있는데, 다방면의 여성 위인을 부각시키다 보니 벌어진 '에바'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특히 위에 언급한 3인 중 하나인 에마 골드만은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으로 지칭되었던 것으로 유명한데, 이건 노동운동가 마더 존스와 전염병유포자 장티푸스 메리에게도 붙었던 별칭이기도 했다. 장티푸스 메리의 경우에는 최근 들어 '억울한 피해자'라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지만, 실제로는 단속망을 피해 다니며 피해자를 양산한 무지한 범죄자일 뿐이다.


얼핏 보면 비판처럼 들리지만, 그런 별칭을 내놓은 사람의 면면을 살펴보면 오히려 칭찬인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히틀러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를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이라고 불렀고, 닉슨은 환각제 옹호자 티모시 리어리를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라고 불렀으며, 슈퍼맨은 배트맨을 "지구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라고 불렀다고 하니까.


주말 사이에 뜬금없이 "가장 위험한 사람"이라는 표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까닭은 최근 한동훈이 이재명을 "한국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라고 지칭하며 벌어진 갑론을박 뉴스 때문이다. 그걸 또 Most Dangerous Man in Korea라고 굳이 영어로 쓰니까, 정관사 The가 빠졌기 때문에 애초의 의도와는 다른 뜻이 되었다는 지적질이 민주당에서 나왔다고 하던가.


그런데 한국인 한정으로는 정관사 유무와 별개로 저 표현이 무슨 뜻인지 오해하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 것이며, 곧바로 나온 반박에서 주장된 것처럼 정관사를 생략하는 사례도 없지 않은 듯하니, 민주당의 지적질 역시 '에바'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게다가 '더'를 종종 빼먹는 것이야 정식 명칭이 '더불어민주당', 약칭이 '더민주'인 '민주당'도 마찬가지이니까.


사실은 이런 식의 유치찬란한 치고받기야말로 오늘날 한국 정치의 저열함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탄핵 심판을 앞두고 가뜩이나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참으로 한가한 소리들을 하고 자빠진 것이 아닌가. 또 한편으로는 이런 식의 한동훈 때리기가 지난 대선의 윤석열처럼 민주당의 '도깨비 사과' 만들어주기 실책이 될 수도 있어 보이고.


그나저나 현재 "한국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현직 대통령이 아닐까. 같은 맥락에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미국 대통령일 터이고. 이재명과 한동훈 모두 다음번 "한국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되기를 꿈꾸고 있을 터이니, 어쩐지 이 대목에서 밤마다 "골든글로브 3회 수상자"가 되는 꿈을 꾼다던 "골든글로브 2회 수상자" 짐 캐리의 발언도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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