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현직 교사가 재직 중인 초등학교의 학생을 아무 이유 없이 살해한 일로 또다시 나라가 떠들썩했다. 자해를 했지만 목숨은 건졌다는 가해자의 구체적인 범행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느니, 아동이 소지한 위치 추적 장치가 섬뜩하다느니, 정치인과 아이돌의 조문이 옳다거니 그르다거니 논란이 활발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한 것은 과연 이 사건을 어떻게 지칭해야 하느냐는 점이다. 언론에서는 일단 "대전 초등학생 피살 사건"으로 잠정 통일한 것처럼 보이는데, 지난번 벌어진 여객기 사고에서는 공항 이름을 따서 "무안공항 사고"라고 할지, 아니면 항공사 이름을 따서 "제주항공 사고"라고 할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있었다고 알고 있기에 벌써부터 궁금한 것이다.


여객기 사고의 경우에는 회사명과 편명을 이용하는 것이 규칙이므로 "제주항공 2216편 사고"로 정해진 모양이지만, 일반인의 경우에는 항공사도 잘 모르고 편명은 더욱 모르게 마련이니 편의상 "무안공항 사고"라고 부르는 편이 더 간단하다. 하지만 정작 무안군에서는 이럴 경우 지역 이미지가 나빠질 수 있다는 이유로 명칭 사용 반대 의견을 내놓은 듯하다.


하지만 회사명에도 지역명이 들어가 있다 보니, 제주도에서도 "제주항공 2216편 사고"라는 명칭으로 인한 지역 이미지 악화를 우려하는 반응을 내놓았다는 기사가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제주도가 그 설립에도 관여하고 지분도 보유한 상태이니, 상황이 좋을 때에는 마치 자기네 치적인 것처럼 내세우다가 상황이 나빠지니 딴소리한다는 비판을 피할 길 없어 보인다.


예를 들어 "세월호 침몰 사건"과 "이태원 압사 사고"의 경우처럼, 사건사고에서 관련 물체나 지명 가운데 어느 것을 사용해도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물론 의도적으로 비하하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비판의 여지가 있겠지만, "국민학교"는 틀리고 "초등학교"만 맞다고 주장하는 경우처럼 역사적 명칭조차도 굳이 부정하고 비판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예를 들어 "광주 민주화 운동"을 "광주 사태"라고 지칭한다고 난리가 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인데, 나귀님도 "광주 사태"로 처음 알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 명칭이 먼저 생각난다. 당연히 비하의 의미는 없으며, 오히려 몰래 말해야 했던 시절의 살벌한 기억이 결부된 역사적 명칭일 뿐이다. 따라서 문맥상 폄하의 의미가 없다면 그냥 봐주는 게 맞지 않을까.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으니 명칭부터 조심하자는 것이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의 정신인 듯하지만, 때로는 움베르토 에코의 지적처럼 이것이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새로운 위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난번 "두 나오미"에 관한 책 <도플갱어>를 읽다가, 저자의 "신경다양적인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의아했던 것처럼 말이다.


구글링해 보니 나오미... 클라인의 아들이 자폐아라서 그런 표현을 썼던 모양인데, 솔직히 말해서 '신경다양성'이라는 명칭은 워낙 두루뭉실한 까닭에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신경이 다양하다니, 혹시 여러 군데 관심을 두는 바람에 산만하다는 뜻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사람의 신경보다 훨씬 더 민감해서 더 많은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건지.


물론 해당 증상을 실제로 겪는 사람이 '자폐증'보다 '신경다양성'을 선호한다면 그러시라고 할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과연 그렇게 해서 무슨 이득이 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부정적인 인식이 깃든 '자폐증' 대신 일견 무해해 보이고 살짝 의아해 보이는 '신경다양성'이란 명칭을 사용한다고 해서 해당 증상이 눈 깜짝할 사이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까?


장애를 비롯해 다양한 어려움을 겪는 까닭에 부모와 공감하는 수직적 정체성 대신 같은 처지인 남들과 공감하는 수평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탐구한 앤드류 솔로몬의 서술에 따르면, 장애를 '질환'으로 볼 것이냐 '다양성'으로 볼 것이냐에 대해서는 해당 공동체 내부에서도 찬반양론이 맞서는 모양이니, 명칭이야 어쨌거나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을까.


예전에는 장님, 벙어리, 귀머거리, 절름발이, 앉은뱅이 등 '불구자'라는 단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했지만, 언제부턴가 이를 기피하고 '장애자'라는 단어로 대체하더니, 또 언제부턴가 이조차도 폄칭이 되었다며 '장애인'이라는 단어로 대체해 버렸고, 중간에 '장애우'라는 명칭이 새로 나오는가 싶더니 지칭/호칭의 혼란을 이유로 다시 '장애인'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하지만 막상 영어에서는 한동안 폄칭으로 간주되던 cripple(불구자)의 약칭인 crip(붉?)을 장애인 스스로가 사용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결국 명칭이야 어쨌건 간에 편의를 위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셈이 아닐까. 그렇다면 '광주 사태'건 '불구자'건 간에 그 맥락에 딱히 악의가 없다면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맞지 않으려나.


여기서 문득 생각나는 것이 일본의 고전 수필 <도연초>에 나오는 어느 스님 이야기이다. 절 앞에 커다란 팽나무가 있어서 사람들이 '팽나무 스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짜증나서 나무를 베어 버렸더니 이후로는 '그루터기 스님'으로 통하게 되었고, 역시나 그루터기를 파내 버렸더니 이후로는 그 자리에 생긴 웅덩이 때문에 '웅덩이 스님'으로 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의미와 지시체, 또는 단어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의 관계가 절대적이 아니라 임의적일 뿐이라는 지적은 이른바 20세기 언어철학의 시발점이라고 알고 있다. 굳이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21세기의 두 번째 탄핵 재판의 내용에서조차 자의적 단어 해석에서 비롯된 부조리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의원'이건 '인원'이건 결론은 뻔해 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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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 보니 트럼프가 취임하자마자 잇달아 내놓은 행정 명령 가운데 하나가 빨대에 관한 내용이라기에 무슨 이야기인가 궁금해졌다. 알고 보니 환경 보호를 이유로 연방 정부에서 종이 빨대를 구입해서 사용하는 법령이 있었던 모양인데,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이 조치를 뒤집음으로써 예전처럼 그냥 플라스틱 빨대를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이전 정부의 조치를 일일이 뒤집으려는 속 좁은 행동이 한심스럽기도 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오락가락하는 정책도 현실적으로 문제이지만, 일각에서는 오히려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나오는 듯하니 그간 종이 빨대로 인해 짜증을 품었던 사람이 의외로 많았음을 짐작하게 된다. 물론 나귀님이야 애초에 종이고 플라스틱이고 빨대를 쓰지 않으니 잘 모르겠지만.


빨대 이야기가 나올 때면 문득 떠오르는 것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일화다. 집 대신 통 속에 들어가 살았다고도 전하니 무소유로 일관한 사람인데, 그래도 원래는 밥 빌어먹을 때 사용하는 그릇 하나를 들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아이가 손에다가 물 받아 마시는 모습을 보고 '나는 바보였구나!'하고 탄식하며 그릇을 내버렸다던가.


물론 저 견유학자의 모범을 따라서 내일부터는 모두 컵 대신 손에 뜨거운 커피를 받아 마시자고 주장하려는 것이야 아니지만, 가끔은 사소한 편의를 위해 너무 많은 자원이 낭비되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커피 한 잔을 테이크아웃하면 종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컵부터 시작해서 빨대며 덮개며 슬리브까지 오만가지가 따라오니 말이다.


이건 좀 너무한다는 인식 때문인지 지난 정부에서도 플라스틱 포장재 규제가 생겨났는데, 뜻하지 않은 코로나 대유행을 겪으며 포장 배달이 늘어나자 결국 철회되었는지 지금은 모두 서슴없이 사용하는 듯하다. 그나마 남은 규제라고는 종이 빨대에 대한 것뿐인 듯한데, 이마저도 효용성 의문부터 갖가지 불편으로 원성이 높았으니 실패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환경 보호라는 명분이 뚜렷했더라도 사람들이 싫어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애초부터 고래는 놓아두고 피라미만 규제하는 식으로 방향을 잘못 잡았으니 위선 논란이 나온 것도 당연한 일이었고. 종이 빨대며 금속 빨대 같은 대용품을 들먹일 것 없이, 차라리 법정 스님의 가르침에 디오게네스의 일화까지 덧붙여 빨대 거부 운동을 펼쳤다면 또 어땠을까.


물론 가끔은 신박하고 재치 있는 대용품이 나오기도 하는데, 작년 김천의 김밥 축제에서 일회용 그릇 대신 뻥튀기에 음식을 담아준 것이 그러했다. 김밥이라는 음식의 특성 덕분이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그릇까지 싹싹 해치울 수 있어서 불필요한 낭비를 줄일 수 있었다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물론 커피나 라면까지는 어렵겠지만 비슷한 시도가 쭉 지속되면 좋겠다.


그나저나 그릇까지 싹싹 해치운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문득 <아이네이스>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트로이 전쟁의 여파로 고향을 떠나 타향을 헤매던 아이네이아스 일행은 새와 비슷한 괴물 하르피와 싸우는 과정에서 '너희의 방랑은 식탁까지 먹어 치우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섬뜩한 (중국 미식가에게도 쉽지 않을!) 예언을 듣고서 낙담한다.


그러다가 나중에 한 번은 식사를 하려는데 그릇이 없기에 김밥 축제마냥 빵을 깔고 음식을 올렸는데, 아이네이아스의 아들이 문득 '음식을 다 먹고 빵까지 다 먹으면 진짜 식탁까지 다 먹어치우는 셈'이라고 농담을 꺼냈다. 그 말에 아버지가 결국 예언이 실현되었음을 깨닫게 되어서 오늘날의 이탈리아에 해당하는 바로 그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종이 빨대나 플라스틱 용기 대신 손바닥과 뻥튀기를 사용한다고 항상 부동산을 얻지는 못할 터이고, 사울처럼 나귀 대신 왕국을 얻거나, 레이첼호처럼 아들 대신 고아를 얻는다는 보장도 없기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다만 인류 최고의 발명품인 플라스틱 식기가 없던 시절에도 음식 먹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니 신기한 느낌이 들어 해 보는 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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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마르탱 게르의 이야기를 하면서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의 저서와 그 내용을 둘러싼 논란까지 살펴보고 나니 새삼스레 이 저자에게 관심이 생겼다. 내친 김에 <역사학의 거장들 역사를 말하다>라는 책에서 당당히 한 장을 차지한 그의 이력과 저술에 대한 개요까지 읽고 나니, 이미 오래 전에 사놓기만 하고 아직 한 번도 완독하지는 못한 저서들이 생각났다.


예를 들어 <주변부의 여성들>에서는 구입 당시의 관심사였던 마리아 지뷜라 메리안에 대한 장만 쏙 빼서 읽었고, <책략가의 여행>과 <선물의 역사>는 우연히 중고가 있기에 사다 놓았지만 이후로는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금은 모두 절판된 모양인데, 저자가 2023년 말에 타계했으니 조만간 재간행될 법도 하건만 아직 소식이 없어 살짝 의아하기도 하다.


그중 가장 얇고 만만해 보인 것이 <선물의 역사>라서 선뜻 책장에서 꺼내 뒤적여 보았는데, 알고 보니 단순히 생일이나 크리스마스에 뭔가를 주고받는 전통의 역사가 아니라, 오히려 화폐를 이용한 시장 경제 이전 시대의 선물 경제에 대한 연구라고 해서 살짝 당황했다. 결국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을 16세기 프랑스에서 찾아내는 셈이랄까.


모스와 데이비스는 각각 인류학과 역사학의 관점에서 선물 경제를 논의하는데, 희한하게도 나귀님은 마루 책더미에서 알레스터 크롤리 전기와 해커의 역사 사이에 애매하게 놓인 <증여론>을 오며가며 쳐다볼 때마다 어째서인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 생각나서 한동안 외면하던 차였다. 막상 작년에 두툼한 마르셀 모스 전기까지 정가 인하로 사놓고서도 말이다!


모스와 데이비스의 선물 연구는 하나같이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에 대한 비판을 깔고 있다. 즉 화폐는 근대의 발명품에 불과하며, 인류는 훨씬 더 이전부터 거래를 해 왔다는 것이니, 마치 현재의 제도가 절대적인 것처럼 간주하지는 말자는 내용이다. 데이비스가 결론 부분에서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언급하는 것도 아마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물론 가뜩이나 짧은 역사와 수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가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야말로 이 모든 문제 제기에 대한 현실적 반박이 될 수도 있기는 하다. 게다가 이미 갈 데까지 간 정보화 사회에 와서 마치 <펠레의 새 옷>에 나타난 것처럼 이웃간의 정이 넘쳐나는 물물교환의 시대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도 솔직히 말이 안 되고.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북펀드에서 <증여론>의 새로운 번역이 나온다고 하기에 뭔가 새삼스럽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확인해 보니 무려 '마르셀 모스 선집'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이미 두 권이 간행되었다니 <증여론>이 세 번째 권인 셈일까. 한길사 번역본과 달리 모스의 다른 글 몇 가지도 부록으로 추가되었다고 하니, 한 번 살펴보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이후로도 여러 권이 예정된 듯한데 과연 완간될지 궁금하다. 물론 '발렌타인데이의 수제 초콜릿이 화이트데이의 명품 백과 동등한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모스의 이론으로 입증되든가, 아니면 카리나가 팬들의 수많은 선물 공세에 지친 나머지 <증여론>을 뒤적였다고 고백하지 않는 한, 지금 와서 새삼스레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리는 없겠지만...




[*] 글을 다 쓰고 나서 검색해 보니, 나탈리 데이비스의 저서 제목처럼 아예 <선물론>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또 다른 번역서도 있었다. 서울대출판부에서 간행하는 '서울대 클래식' 가운데 하나로 나온 책인데, 어째서인지 알라딘에서는 마르셀 모스가 아니라 역자 오명석의 이름만 저자로 등록되어 있다. 물론 완역본이 아닌 편역서이기는 하지만, 판권에 저자명이 '마르셀 모스'로 나와 있으니 그대로 따라야 하지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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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필리핀의 어느 유명 관광지에서 고래상어 관광을 결국 중단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고래상어라면 이름과 달리 '고래' 아닌 '상어'이며, 길이가 15미터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물고기이지만 의외로 성격이 온순한 까닭에 관광 자원으로 이용되었던 모양인데, 해안으로 유인하려 살포한 먹이가 부패하며 생긴 수질 오염 등의 논란이 그간 지속되었던 모양이다.


마침 인도와 캄보디아에서도 코끼리와 원숭이가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온 관광객을 습격했다는 보도까지 덩달아 나온 것으로 미루어, 이것 역시 코로나 대유행 직후에 대두한 오버투어리즘 논란의 연장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색다른 콘텐츠를 만들려는 욕심에 유튜버가 위험을 자초한다는 비판도 있으니, 이래저래 참 백해무익한 것이 유튜브인가 싶다.


그러고 보니 고래상어 목격담은 <콘티키>에 수록된 내용으로 처음 접했었다. 노르웨이의 인류학자 토르 헤이에르달은 고대 남아메리카 원주민이 태평양을 건너 폴리네시아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가설을 직접 검증하기 위해 1947년에 '콘티키'라는 이름의 뗏목을 직접 제작해서 바다로 나갔는데, 101일 간의 여행 중에 만난 기묘한 생물 중 하나가 바로 고래상어였다.


즉 하루는 동료 중 한 명이 우연히 바닷속을 들여다보니, 길이 15미터의 뗏목보다 더 큰 물고기가 바로 밑에서 헤엄치기에 기겁했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살아 있는 고래상어를 가까이서 관찰한 사례가 드물다 보니 혹시나 그놈이 뗏목을 공격하기라도 할까봐 모두들 잔뜩 긴장했는데, 의외로 온순한 녀석이여서 그냥 뗏목을 졸졸 따라오다 사라졌다고 전한다.


고래 이야기가 나왔으니 최근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대왕고래'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원래 고래 중에서도 가장 큰 흰긴수염고래를 가리키는 명칭이라는데, 석유 탐사 대상 해역인 이른바 제8광구의 여러 구역명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즉 대왕고래 말고도 '오징어', '명태', '마귀상어' 구역이 있다는데, 아쉽게도 '고래상어'까진 없는 듯하다.


이른바 대왕고래 사업이 논란이 되었던 까닭은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직접 발표에 나서는 등, 각종 논란으로 인한 지지율 하락 추세를 반전시키려는 깜짝쇼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후 조사를 담당한 해외 업체의 실체에 대한 의문부터 시작해서 갖가지 논란만 지속되다가, 결국 사업성이 없다는 결론만 재차 확인된 모양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한국의 근해 석유 탐사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반세기 전 박정희 정부 시절에 처음 추진된 사업이었다. 중동 전쟁으로 인한 석유 파동이 거듭되면서 에너지 위기를 겪은 직후의 일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여차 하면 우리나라도 산유국이 될 수 있다는 기대에 "제7광구"라는 노래가 나올 정도로 기대도 컸지만 그때도 사업성이 없다는 결론만 나왔다.


물론 석유 산업의 역사를 서술한 다니엘 예긴의 책을 보면, 석유 탐사는 워낙 변수가 많다 보니 결코 하루이틀에 결론이 나올 만큼 간단한 일까진 아니다. 예를 들어 '석유 위에 떠 있는 나라'로 비유되는 세계 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도 수많은 실패 끝에 가망이 없다고 간주되어서 탐사업체가 철수하기 직전에야 간신히 석유 발견에 성공한 경우에 해당했다.


그러니 산유국의 꿈과 희망을 갖는 것까지 뭐라 할 수 없지만, 단지 정권의 무능과 대통령의 비리를 가려 보려는 발버둥에서 저 오래 묵은 떡밥을 도로 꺼내든 행태는 얄팍하고 한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후 결국 비상 계엄까지 저지른 것을 보면, 대왕고래 프로젝트야말로 역사의 시계를 반세기 전으로 되돌리려는 부질없는 시도의 전초전이었는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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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에 현역 장교가 내연 관계인 여성 군무원을 살해하며 벌어진 이른바 '화천군 북한강 토막 살인 사건'이 밝혀져서 한창 떠들썩했었다. 그런데 마침 가해자인 양광준의 얼굴이 공개되자, 이를 보도한 어느 뉴스의 아나운서가 대뜸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발언을 내놓았다. '얼굴만 봐서는 흉악스럽게 생기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걸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득 롬브로소의 영향력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얼마 전에 <범죄인의 탄생>과 <여성 범죄인>을 꺼내서 훑어본 다음이고 보니, 범죄자의 외모와 그 범죄성의 관계를 언급한 뉴스 아나운서의 발언에 문득 저 근대 이탈리아의 범죄학자가 심어 놓은 대중적 선입견이 얼마나 지속적인지를 깨닫게 된 까닭이었다.


체사레 롬브로소(1835-1909)는 '범죄학의 아버지'로 평가되는 이탈리아의 사회학자이다. 그 이론의 핵심은 '태생적 범죄자'이다. 즉 범죄란 문명에 반대되는 원시적 행위이며, 범죄자란 원시적 악덕이 격세유전으로 발현된 사례라는 것이다. 이는 모든 범죄가 의도적이므로 엄벌하자는 베카리아의 주장에 반대되는 것으로, 범죄자의 선처를 호소한 진보적인 주장이었다.


하지만 롬브로소의 범죄학은 그 방법에서 여러 가지 허술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당대부터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범죄인의 탄생>과 <여성범죄인>은 영어판 편역본을 재번역한 것인데, 영어판 편역자는 롬브로소의 사상이 왜곡되고 오해되었다고 항변하면서, 이 저자가 19세기의 통념을 답습한 동시에 혜안도 보여준 부분에 주목하자고 권유한다.


물론 롬브로소의 범죄학이 역사적으로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과학적 범죄인류학'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오늘날에는 사실상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봐야 맞을 듯하다. 비록 진화론과 인류학 같은 나름 과학적인 방법론을 도입하긴 했지만 주먹구구식에 불과하며, 애초 장담과 달리 과학적이지도 엄밀하지도 못한 주관적 해석이 많기 때문이다.


롬브로소의 이론에서 가장 악명 높은 대목은 골상학의 방법론을 받아들인 것이다. 예를 들어 '귀가 커서 도드라지는 것'을 범죄자의 특성으로 간주하는 식이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저서인 <인간에 대한 오해>에서 사이비 과학인 사회적 진화론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물론 롬브로소의 영어판 편역자들은 굴드가 왜곡했다고 주장하지만).


주저인 <범죄인의 탄생>(1867)만 해도 범죄자는 열등한 존재라는 전제로 시작하며, 자매편인 <여성범죄인>(1893) 역시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전제로 시작한다. 따라서 롬브로소의 저술 역시 예를 들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학 관련 저술처럼 그저 개척자로서의 의의와 역사적인 가치만 지닐 뿐, 오늘날 그대로 적용하기는 불가능한 내용이다.


다만 그 이론의 타당성과는 별개로 일반 대중 사이에서는 근대 범죄학의 창시자로서 롬브로소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 있으니, 대표적인 것이 사람의 외모와 범죄 성향의 관련성을 은연중 떠올리게 되는 버릇이다. 이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 매체에서 활약하는 수많은 '악역 전문 배우'들의 모습을 통해서 반복되고 강화되면서 강아지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물론 범죄의 유전적 소질이라는 주장은 터무니없지만, 자칫 범죄로 이어지기 쉬운 과격한 성격 같은 경우에는 집안 내력의 영향도 아주 없지는 않아 보인다. 여기에 에드워드 O. 윌슨이 개척한 사회생물학의 결론 같은 것을 감안하면 마치 롬브로소의 이론이 현대적으로 입증된 것처럼 보이지만, 설령 방향이 얼추 맞더라도 '범죄인' 이론은 사이비 과학일 뿐이다.


오늘날에 와서 롬브로소의 기여를 굳이 찾자면 사상 최초로 범죄라는 사회 현상을 과학과 통계 같은 체계적인 방법으로 분석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지만, 문제는 정작 그 창시자 본인의 실제 행동이 그리 엄밀하지 못한 까닭에 그 주장 자체에 설득력이 떨어지는 반면에 외모와 범죄의 연관성 같은 대중의 편견만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니 아쉽다고 하겠다.


물론 외모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편견임을 알더라도 막상 떨치기는 어려운데, 어떤 면에서는 롬브로소가 조장한 이런 편견이 꽤나 보편적 편견이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레스코프의 소설 <괴물 셀리반>이 멋진 반박을 제공하고 있지만, 사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레스코프의 교훈보다는 롬브로소의 이론을 따라 살아가는 듯하다.


그나저나 철 지난 롬브로소의 이론을 오늘 다시 되새겨본 까닭은 며칠 전 대전에서 일어난 현직 교사의 초등학생 살해 사건 때문이다. 사건의 성격이나 잔혹성 모두 유례가 없는 경우이다 보니 크게 공분이 일어난 상황인데, 어쩌면 사건의 여파나 국민적 관심의 정도를 감안해서라도 조만간 가해자의 얼굴과 실명 등 인적사항이 공개되지 않을까 짐작해 보게 된다.


만약 얼굴이 공개되면 십중팔구 롬브로소의 유산인 외모와 범죄성에 대한 언급도 여기저기서 뒤따라나오지 않을까. 어쩌면 멀끔하지 못한 외모에서부터 범죄성이 농후했었다는 비난이 나올 수도 있고, 또 이와는 정반대로 멀끔한 외모 뒤에 범죄성을 숨기고 있었으니 가증스럽다는 비난이 나올 수도 있을 법하다. 물론 어느 쪽이든 간에 근거는 없는 이야기겠지만...



[*] 기억을 더듬어 보니, 롬브로소의 저서는 1970년대에 나온 을유문화사의 (세로쓰기) 세계사상전집 가운데 한 권에 수록된 <천재론>을 읽은 것이 처음이었다.(이건 지금도 새로운 번역본이 간행된 듯하다). <범죄인의 탄생>과 <여성 범죄인>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2000년대에 들어서 미국의 법사학자들이 이탈리아어 원본에서 발췌해서 편역한 영역본을 재번역한 것이다. 편역자들은 롬브로소의 저서가 이전까지 온전한 모습으로 영어권에 소개된 적이 없으며, 그로 인해 오해와 왜곡이 벌어졌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새로운 영역본 편역서에서는 롬브로소의 주장을 온전한 모습으로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자평하지만, 사실 이것도 이탈리아어 원본에서 오늘날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이나 중언부언 산만한 부분은 모두 걸러낸 편집본인 한에는 원저자의 장점과 단점 모두를 온전히 보여준다고 보기는 어려울 법하다. 여하간 의의도 있지만 한계도 뚜렷한 롬브로소라고나 할까. 그나저나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도 오래 전에 사다 놓은 것이 있으니 다시 꺼내 뒤져 보아야 하는데 귀찮...


[**] 글을 올리면서 보니 <범죄인의 탄생>의 또 다른 번역본도 <태생적 범죄자>라는 제목으로 나온 모양인데, 알라딘 서지정보에는 관련 소개 내용이 부족한 까닭에 어떤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다만 저자명부터 "롬브로소 체세레"라고 쓴 것을 보면 그리 신뢰할 만한 번역본까지는 아닌 듯한 인상을 준다. 물론 이런 나귀님의 태도 역시 외모와 범죄성에 대한 저 범죄학자의 유산처럼 편견에 불과하다면 솔직히 할 말은 없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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