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현직 교사가 재직 중인 초등학교의 학생을 아무 이유 없이 살해한 일로 또다시 나라가 떠들썩했다. 자해를 했지만 목숨은 건졌다는 가해자의 구체적인 범행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느니, 아동이 소지한 위치 추적 장치가 섬뜩하다느니, 정치인과 아이돌의 조문이 옳다거니 그르다거니 논란이 활발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한 것은 과연 이 사건을 어떻게 지칭해야 하느냐는 점이다. 언론에서는 일단 "대전 초등학생 피살 사건"으로 잠정 통일한 것처럼 보이는데, 지난번 벌어진 여객기 사고에서는 공항 이름을 따서 "무안공항 사고"라고 할지, 아니면 항공사 이름을 따서 "제주항공 사고"라고 할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있었다고 알고 있기에 벌써부터 궁금한 것이다.
여객기 사고의 경우에는 회사명과 편명을 이용하는 것이 규칙이므로 "제주항공 2216편 사고"로 정해진 모양이지만, 일반인의 경우에는 항공사도 잘 모르고 편명은 더욱 모르게 마련이니 편의상 "무안공항 사고"라고 부르는 편이 더 간단하다. 하지만 정작 무안군에서는 이럴 경우 지역 이미지가 나빠질 수 있다는 이유로 명칭 사용 반대 의견을 내놓은 듯하다.
하지만 회사명에도 지역명이 들어가 있다 보니, 제주도에서도 "제주항공 2216편 사고"라는 명칭으로 인한 지역 이미지 악화를 우려하는 반응을 내놓았다는 기사가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제주도가 그 설립에도 관여하고 지분도 보유한 상태이니, 상황이 좋을 때에는 마치 자기네 치적인 것처럼 내세우다가 상황이 나빠지니 딴소리한다는 비판을 피할 길 없어 보인다.
예를 들어 "세월호 침몰 사건"과 "이태원 압사 사고"의 경우처럼, 사건사고에서 관련 물체나 지명 가운데 어느 것을 사용해도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물론 의도적으로 비하하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비판의 여지가 있겠지만, "국민학교"는 틀리고 "초등학교"만 맞다고 주장하는 경우처럼 역사적 명칭조차도 굳이 부정하고 비판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예를 들어 "광주 민주화 운동"을 "광주 사태"라고 지칭한다고 난리가 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인데, 나귀님도 "광주 사태"로 처음 알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 명칭이 먼저 생각난다. 당연히 비하의 의미는 없으며, 오히려 몰래 말해야 했던 시절의 살벌한 기억이 결부된 역사적 명칭일 뿐이다. 따라서 문맥상 폄하의 의미가 없다면 그냥 봐주는 게 맞지 않을까.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으니 명칭부터 조심하자는 것이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의 정신인 듯하지만, 때로는 움베르토 에코의 지적처럼 이것이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새로운 위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난번 "두 나오미"에 관한 책 <도플갱어>를 읽다가, 저자의 "신경다양적인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의아했던 것처럼 말이다.
구글링해 보니 나오미... 클라인의 아들이 자폐아라서 그런 표현을 썼던 모양인데, 솔직히 말해서 '신경다양성'이라는 명칭은 워낙 두루뭉실한 까닭에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신경이 다양하다니, 혹시 여러 군데 관심을 두는 바람에 산만하다는 뜻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사람의 신경보다 훨씬 더 민감해서 더 많은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건지.
물론 해당 증상을 실제로 겪는 사람이 '자폐증'보다 '신경다양성'을 선호한다면 그러시라고 할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과연 그렇게 해서 무슨 이득이 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부정적인 인식이 깃든 '자폐증' 대신 일견 무해해 보이고 살짝 의아해 보이는 '신경다양성'이란 명칭을 사용한다고 해서 해당 증상이 눈 깜짝할 사이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까?
장애를 비롯해 다양한 어려움을 겪는 까닭에 부모와 공감하는 수직적 정체성 대신 같은 처지인 남들과 공감하는 수평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탐구한 앤드류 솔로몬의 서술에 따르면, 장애를 '질환'으로 볼 것이냐 '다양성'으로 볼 것이냐에 대해서는 해당 공동체 내부에서도 찬반양론이 맞서는 모양이니, 명칭이야 어쨌거나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을까.
예전에는 장님, 벙어리, 귀머거리, 절름발이, 앉은뱅이 등 '불구자'라는 단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했지만, 언제부턴가 이를 기피하고 '장애자'라는 단어로 대체하더니, 또 언제부턴가 이조차도 폄칭이 되었다며 '장애인'이라는 단어로 대체해 버렸고, 중간에 '장애우'라는 명칭이 새로 나오는가 싶더니 지칭/호칭의 혼란을 이유로 다시 '장애인'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하지만 막상 영어에서는 한동안 폄칭으로 간주되던 cripple(불구자)의 약칭인 crip(붉?)을 장애인 스스로가 사용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결국 명칭이야 어쨌건 간에 편의를 위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셈이 아닐까. 그렇다면 '광주 사태'건 '불구자'건 간에 그 맥락에 딱히 악의가 없다면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맞지 않으려나.
여기서 문득 생각나는 것이 일본의 고전 수필 <도연초>에 나오는 어느 스님 이야기이다. 절 앞에 커다란 팽나무가 있어서 사람들이 '팽나무 스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짜증나서 나무를 베어 버렸더니 이후로는 '그루터기 스님'으로 통하게 되었고, 역시나 그루터기를 파내 버렸더니 이후로는 그 자리에 생긴 웅덩이 때문에 '웅덩이 스님'으로 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의미와 지시체, 또는 단어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의 관계가 절대적이 아니라 임의적일 뿐이라는 지적은 이른바 20세기 언어철학의 시발점이라고 알고 있다. 굳이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21세기의 두 번째 탄핵 재판의 내용에서조차 자의적 단어 해석에서 비롯된 부조리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의원'이건 '인원'이건 결론은 뻔해 보이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