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감독 홍상수의 이름이 뉴스에서 거론되기에 또 무슨 영문인가 살펴보았더니, 불륜 관계인 영화배우 김민희가 임신했다고 해서 화제인 모양이다. 사생활이니 남들이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지적도 타당하기는 한데, 그 과정이 그리 아름답지 못한 만큼 앞서 논란이 된 정우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위의 빈축을 사게 되는 것만큼은 불가피한 귀결로 보인다.
그나저나 홍상수도 금수저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아서 지금 다시 확인해 보니, 부모 모두 1960년대부터 영화 제작자로 활약한 사람들이어서 그 아들도 어려서부터 영화계를 친숙하게 접하며 자라났다고 전한다. 여기까지 듣고 보니 문득 버드 슐버그가 생각났는데, 역시나 영화 제작자의 아들로 태어난 이 미국 작가의 단편을 연말에 읽었기 때문이다.
지난번 <악마의 형제들>을 읽고 나서 로버트 펜 워런의 다른 작품이 없나 검색해 보니, 예전에 삼성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한 권으로 간행되었지만 나귀님은 아직 구하지 못한 <천사의 무리>의 또 다른 번역본이 있었다. 그것도 이미 갖고 있는 "현대미국문학전집"(전6권, 시사영어사, 1971)에 수록되어 있다기에, 얼른 책장을 뒤져 제5권을 꺼내 보았다.
번역자가 같은 것으로 미루어 <천사의 무리>는 시사영어사의 전집에 먼저 수록되었다가 10여 년 뒤에 출판사를 옮겨 삼성출판사의 전집에 재수록된 듯하다. "현대미국문학전집"은 대략 20년 전쯤에 어느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사다 놓았던 것인데, O. 헨리부터 필립 로스에 이르는 현대 미국 대표 작가들의 중편과 단편을 다양하게 수록한 보기 드문 번역서다.
제5권에는 <천사의 무리>를 비롯해서 제임스 미치너, 캐서린 앤 포터, 유도라 웰티처럼 귀에 익은 유명 작가들과 캐롤라인 고든, 잭 셰이퍼, 캐서린 웨스트, 호텐스 캘리셔처럼 귀에 낯선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골고루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서 특히 관심이 가서 읽어보게 된 작품은 버드 슐버그의 세 가지 단편 "나의 크리스마스 캐롤", "각광", "도전"이었다.
버드 슐버그의 아버지는 한때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중역으로 재직했기 때문에, 연말 크리스마스 파티 때에는 유명 배우들이 갖가지 선물을 들고 집으로 찾아와서 시끌벅적했다고 한다. "나의 크리스마스 캐롤"은 그때의 기억이 반영된 단편으로 보이는데, 어느 해 크리스마스에는 단골 손님 한두 명을 제외하면 모두들 발을 끊어서 꼬마(화자)가 의아하게 여긴다.
나중에 방에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열어본 꼬마는 마치 여러 사람이 보낸 것처럼 보이는 선물에 동봉된 카드가 사실은 한 사람의 필체임을 깨닫게 되고, 잠시 후에 위층에 올라온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영화사를 퇴직해서 독립했다가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더 이상은 유명 배우들이 파티에 오지 않게 되었다는 어른의 속사정을 듣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실제로 버드 슐버그의 아버지는 파라마운트에서 독립해서 야심차게 새로운 제작사를 시작했으나, 절친했던 배우 대부분이 애초의 약속과는 달리 전속을 옮기지 않는 바람에 큰 손해만 보고 사업을 접고 아내와도 이혼하고 말았다. 반면 버드 슐버그의 어머니는 의외의 수완가인지, 이후 할리우드 배우들을 여럿 거느린 에이전시를 운영하며 승승장구했다 전한다.
매우 짧은 단편 "각광"도 저자의 할리우드 체험이 녹아든 것처럼 보이는 내용이다. 어느 영화 촬영장에서 감독이 나이 많은 엑스트라를 하나 골라 몇 마디 대사를 할 기회를 준다. 꿈에 그리던 기회가 찾아왔지만 이 할아버지는 마음과 달리 제대로 연기하지 못하고 실수를 연발하고, 몇 번이나 실패하자 짜증이 치민 감독은 결국 다른 엑스트라에게 기회를 넘긴다.
'아니, 옛날에 윌리 로빈슨이 했던 전설적인 연기 몰라요? 그것만 그대로 따라해도 될텐데, 쯧쯧!' 감독의 핀잔에 머쓱해진 엑스트라 노인은 쓸쓸하게 구석으로 밀려나 다른 사람의 연기를 구경하는데, 잠시 후에 스튜디오에 견학을 온 어느 영화광이 노인을 보고는 반색하며 사인을 요청한다. '세상에, 아직도 현역이셨군요. 정말 팬입니다. 윌리 로빈슨 선생님!'
마지막 단편 "도전"은 젊은 남성 화자가 어느 휴양지에서 만난 젊은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화자는 수상스키부터 수영까지 번번이 자기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여성의 진취적인 모습에 매료되지만, 결국 그녀가 한밤중에 혼자 바다에 나가서 헤엄을 치다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야 도전 정신이라 여겼던 것이 실제로는 자살 충동이었음을 깨닫는다.
아쉽게도 우리나라에 번역된 버드 슐버그의 작품은 이 세 가지 단편이 전부인 것으로 보이며, 번역서인 "현대미국문학전집"도 지금은 구하기 힘든 상태가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이 저자의 펜끝에서 나온 또 다른 작품을 접한 사람은 충분히 많을 것도 같다. 세계 영화사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칭송되는 <워터프론트>의 시나리오 작가가 버드 슐버그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부두 하역 현장에서 벌어지는 노조의 비리와 노동자의 저항을 묘사한다. 비리를 폭로하려던 노동자가 피살되자 가책을 느낀 노조의 행동대원(말론 브란도)이 사망자의 누이(에바 마리 세인트)에게 감화되어 정의파 신부(칼 몰든)와 손잡고 양심 선언에 나서다가 역시나 노조의 하수인인 형(로드 스타이거)을 잃고서 노조 위원장(리 J. 콥)과 현피를 뜬다.
막판에 자기를 봐서라도 한 번만 참고 넘어가 달라는 형의 설득에, 과거에도 형을 위해 승부 조작에 가담했다가 권투선수 경력을 망친 것을 거론하며 퍼붓는 브란도의 원망 섞인 대사가 유명한데, 비상 계엄 직후 국회 청문회에 나와 변명하는 군 지휘관들을 보고 있자니, 경직된 계급 문화에서 양심을 지키기란 얼마나 어려운가를 새삼 실감하게 되기도 했었다.
그나저나 홍상수 영화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만 보고 말았는데, 이응경의 미모가 빛나고 조은숙의 더빙 알바가 인상적인 작품으로 기억한다. 주인공이 김의성이라는 것은 최근에 알았는데, 김수현 극본의 <작별>에서 유호정 상대역으로 나와 인상적이었으나 이후에 보이지 않아서 궁금하던 배우였다. 이제는 악역 전문 중년 배우라니 또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