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맘바 이야기를 하느라 어슐러 르귄의 에세이를 다시 꺼내 뒤적이다 보니, 환상 문학의 특성을 설명하는 글에서 極(GK)체스터턴의 <정통>의 한 구절을 인용한 대목이 문득 눈에 띄었다. 마침 체스터턴의 대표작 세 가지가 새로운 번역으로 간행되었던데, 그 이야기를 해 볼까 하다가 살짝 방향을 틀어서 판타지의 규칙 이야기나 해 보자.


체스터턴은 환상의 세계에서도 1+1=2라는 규칙은 마찬가지이며, 다만 황금과 호랑이가 열리는 나무가 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환상의 세계라고 해서 배경에 자연 법칙이 없지는 않으며, 인물 역시 각자의 한계와 계약에 얽매인다는 뜻인데, 사실 인간 세계와도 유사한 그런 설정이 있어야만 인물과 사건과 배경 모두가 실감나게 마련이다.


"판타지 소설은 온갖 법 제도를 파괴하고 배수진을 치는 허무주의적 폭력까지는 허용하지 않는다. (...) 2 더하기 1은 3이다. (...) 작용은 반작용을 낳는다. (...) 운명, 운, 필연의 힘은 (...) 판타지 소설 속 중간계에서도 거침없이 발휘된다. 판타지 소설은 (...) 서사적 예술로서의 의무와 책임의 지배를 받는다."(<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133쪽)


<반지의 제왕> 영화가 나왔을 때 어느 초딩이 '마법사가 너무 약하게 나왔다'고 불평하는 감상문을 내놓아 모두의 웃음을 자아냈던 것도 그래서인데, 십중팔구 주문 한 마디로 대군을 쓸어버리는 게임이나 무협지의 묘사에 친숙한 까닭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르귄의 소설만 봐도 마법사는 자연에 최대한 순응하다가 최소한으로만 개입한다.


톨킨과 르귄의 작품에서는 물론이고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도 계약과 규칙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이마에 흉터를 가진 아이가 살아남게 된 것도 모종의 규칙 때문이며, 학대를 당했던 친척 집이 오히려 안전한 장소였던 것도 비슷한 규칙 때문이고, 결국 만악의 근원인 악당과의 일대일 대결에서 의외의 이유로 승리했던 것도 마찬가지이다.


닐 게이먼의 '샌드맨 시리즈'에서는 심지어 불멸의 존재조차도 계약과 규칙에 얽매인다. 주인공 꿈(모르페우스)은 필멸자의 마법 주문에 사로잡혀 수십 년간 갇혀 지내다가 결계가 실수로 깨지고서야 가까스로 탈출하고, 비슷하게 억류된 전처 무사(뮤즈) 칼리오페를 구출할 때에도 무작정 규칙을 깨는 대신 감금자를 찾아가 대화를 시도한다.


'샌드맨 시리즈'에서는 악마도 예외는 아니어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지옥에 온 꿈이 재치 대결에서 승리하자 루시퍼도 이를 갈며 순순히 보내준다. 역시나 DC 코믹스 세계관을 공유하는 영화 <콘스탄틴>에서 등장한 루시퍼 역시 계약과 규칙에서 자유롭지 않아서, 막판의 반전에 허를 찔리자 계약과 규칙 내에서 상황을 최대한 수정한다.


영화 <엑소시스트>에서도 소녀의 몸에 빙의한 악마는 십자가와 성수에 억제되는 규칙을 따르고, 기만의 명수답게 갖가지 말로 신부들을 미혹해서 풀려나고자 치밀한 심리전을 도모한다. <파우스트>와 <페터 슐레밀>을 비롯해 악마와의 계약을 소재로 하는 모든 문학 작품에서도 핵심은 계약의 빈틈을 각자에게 유리하게끔 이용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계약과 규칙이란 현실의 인간과 환상의 존재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해 보이는데, 우리나라의 현직 대통령은 도대체 무슨 존재이기에 상식도 법률도 위반하며 멋대로 행동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리스 신화에서 오만(hubris)의 죄를 범한 필멸자의 운명을 보면 그의 최후도 그리 아름답진 못할 듯하다만...



[*] "뱃사람의 낙원"으로서의 極체스터턴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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