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번에 얼핏 보니 알라딘에서 이동식 책 선반을 사은품으로 주는 이벤트를 하는 것 같더니만, 지금 다시 검색해 보니 아예 굿즈로 만들어 2만 원대에 판매하는 모양이다. 정식 명칭은 본투리드 3단 트롤리라는데, 쉽게 말해 바퀴가 달려 끌고 다닐 수 있게 만든 플라스틱 3단 선반이다.
그런데 나귀님 경험상 저런 물건은 생각만큼 유용하지도 않고 튼튼하지도 않다는 것이 문제다. 알라딘 트롤리는 한 칸이 폭 45센티, 깊이 26센티, 높이 25센티로 나오는데 일반적인 신국판 도서 규격이 가로 15센티, 세로 22센티이므로, 아무리 많이 넣어 보아야 한 칸에 한 줄씩만 들어간다.
예를 들어 집집마다 한 질씩은 있을 법한 '해리 포터' 시리즈의 구판을 가지고 알아보자면, 1999년에 나온 <마법사의 돌> 1권이 신국판, 236쪽, 두께 2센티, 무게 458그램이다. 단순 계산하면 트롤리 한 칸에 22권이 들어가는데, 문제는 '해리 포터 시리즈' 완질이 무려 23권이라는 거다.
어찌어찌 쑤셔넣어서 한 칸에 전23권 완질이 들어간다고 가정하면, 알라딘 트롤리가 모두 3칸이므로 결국 해리 포터 완질 3세트 총69권을 담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각 권의 무게가 1권과 동일하게 458그램이라 가정하고 계산해 보면, 완질 3세트의 무게는 30킬로그램이 넘어버린다.
알라딘 트롤리의 상품 정보에는 안전 하중이 선반당 3.5킬로그램, 총10.5킬로그램이라고 나온다. 결국 해리 포터 구판과 비슷한 신국판 도서로 세 칸을 욕심껏 채우면 무게 한도의 세 배를 초과해서 파손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빈 공간이 아까워도 해리 포터 한 세트 이상은 무리이겠다.
그런데 최근 새로 나온 해리 포터 20주년판은 전23권의 무게가 12.7킬로그램에 달한다니, 겨우 한 세트만으로도 알라딘 트롤리의 무게 한도를 초과하는 셈이다. 혹시나 구판이나 양장본이나 일러스트판이나 원서나 기타 관련서까지 올려둔 광팬이라면 혹시나 망가질까 조마조마하지 않겠나.
판타지 소설만의 문제도 아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단독 저서 16종의 무게가 총5킬로그램인데, 공저와 선집과 특별판까지 합치면 10킬로그램 가까이 되어서 역시나 아슬아슬하다. 구판이나 영역본까지 정성껏 모아둔 사람이라면 파손 가능성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
이런 모든 사실을 종합해 볼 때에 알라딘 트롤리는 결국 실용성이라고는 떨어지는 장식용 가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세 칸이나 되지만 한 칸만 책으로 가득 채워도 파손 위험이 있다니, 실제로는 상품 소개 페이지에 올라온 사진처럼 책이 아닌 다른 물건이나 담으라는 뜻이 아닐까.
나귀님처럼 책을 제법 가진 사람들이 이런 제품들을 불신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디자인이나 재질이나 간에 책의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책을 안 보는 사람들이 만들어서 판매하는 제품이다 보니, 실제로 책을 보고 쌓아두는 사람에게는 불편하다는 것이다.
책이 하찮아 보여도 열 권, 스무 권이 모이면 그 무게는 상당하다. 그러니 책을 쌓아 두는 사람의 경우에는 이 세상 그 어떤 책장도 허술해 보일 수밖에 없다. 넣으라는 공간마다 최대한 넣다 보면 가로판은 아래로 늘어지고 세로판도 옆으로 휘어져서 머지않아 못과 나사로 보강해야 한다.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책장도 책의 무게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으니, 이동식 트롤리 따위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때 나귀님도 커다란 텔레비전을 너끈히 지탱한다는 이동식 받침대를 동네 가구점에서 구입해 보았는데, 책을 올려놓으니 일주일도 못 가서 플라스틱 바퀴가 망가지고 말았다.
고심 끝에 발견한 해결책은 화물 운반용 달리였다. 택배 기사가 물건을 담아 끌고 다니는 초록색 카트와 유사한 물건인데, 손잡이 없이 빨간색 바퀴와 초록색 상판만 있는 것을 달리라고 한다. 가로 40센티, 세로 60센티짜리 소형 달리 다섯 개를 구입해서 2단 책장을 두 개씩 올려 놓았다.
2단 책장 두 개면 대략 신국판 서적이 200권쯤 들어가는데, 달리 한 대에 최대 100킬로그램까지는 버틴다고 하니 끄떡없다. 물론 무게가 상당하다 보니 밀어서 움직이기도 아주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바퀴가 빠지거나 우그러지는 등 망가지는 조짐은 20년 가까이 되는 지금까지도 없어 보인다.
책을 가진 사람이 이동식 책장에 흥미를 갖게 되는 것은 이동의 편리함 때문이라기보다는 공간의 효율성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동식 책장이 있더라도 수시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넓은 공간이 필요할 때를 대비하여 언제라도 공간을 창출할 준비를 갖춘다는 의미일 뿐이다.
나귀님도 처음 달리를 이용해서 튼튼한 이동식 책장을 만들었을 때에는 이리저리 굴려서 이런저런 공간을 연출해 보며 큰 만족감을 느꼈고, 나중에 예정에도 없던 부엌 공사를 할 때에는 줄줄이 방으로 입장시켜 창출한 마루 공간에 부엌 살림을 쌓아두는 등 상당히 유용하게 써먹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책을 사는 사람의 욕심이 끝없다는 점이다. 이동식 책장에 가장 필요한 것은 빈 자리, 즉 책장이 옮겨갈 여유 공간이다. 그런데 책을 모으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공간이 모자라게 마련이니, 책을 사다 보면 언젠가는 이동식 책장에 필요한 빈 자리에조차도 책이 쌓여 버리고 만다.
지금 나귀님의 마루 풍경이 딱 그러하니, 한때 어디로든 굴러다닐 수 있었던 이동식 책장도 지금은 앞뒤며 옆쪽까지 이런저런 책더미에 가로막혀 꼼짝달싹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물론 그 책더미만 치우면 다시 움직일 수 있겠지만, 그 가동 범위도 예전보다는 현격히 줄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이동식 책선반에 가장 혹할 만한 사람이야말로 정작 그 제품의 혜택을 가장 못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오히려 책을 모으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지금 알라딘에서 판매하는 것과 같은 작고 소중한 이동식 책선반을 가장 잘 활용하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25. 03. 04. 추가: 최근 알라딘에서는 '트롤리'와 유사하지만 형태는 다른 '북 카트'라는 물건도 내놓은 모양인데, 이것 역시 무게 한도가 10킬로그램이니 '해리 포터' 한 질을 싣기에는 역부족이다. 그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낱권 스물세 권 가운데 뭘 싣고 뭘 싣지 말아야 할지, 어떤 권을 집어넣고 어떤 권을 뺄지 고민하는 탓에 밥맛도 없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으며, 짜증이 늘어 주위 사람과 곧잘 다투고, 부부 관계도 냉랭해지다 못해 험악해져서 출산율 급감에 일조하게 되지 않을까. 나귀님 입장에서 보자면 솔직히 왜 만들고 왜 사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물건이긴 하다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