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양반이 외출 준비하다 말고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문득 "당신은 가지를 싫어하니까..." 하기에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었다. 딱히 좋아하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굳이 싫어한다 말하기도 애매하다. 마치 붓다의 걸식마냥 굳이 달라 하지는 않지만, 누가 주면 사양하지도 않는달까.
짭짤하거나 매콤하게 졸여 놓으면 괜찮은 반찬이며 술안주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번 마트에 갈 때마다 다른 야채보다 손이 먼저 가는 재료까지는 아니다. 튀김이나 구이가 최고라지만 결국 설거지를 도맡는 나귀님의 입장에서는 치우기 귀찮아서라도 기피하게 마련이니, 애매한 재료라 생각하는 거다.
<가지>라는 만화 역시 애매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예전에 신촌 북오프에서 산 책인 것 같은데,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리틀 포리스트>를 워낙 인상적으로 본 직후라서, 상권 표지를 보니 이것 역시 시골을 배경으로 혼자 살며 가지 농사를 짓는 웬 처녀의 풋풋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넘겨짚고 구입했던 것이었다.
물론 하권 표지를 보니 음침한 중년 남녀의 흑마술 소환 장면 같기도 해서 살짝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막상 구입해 읽어 보니 시골의 가지 농사까지는 맞았는데, 풋풋한 흑마술 따위는 없어서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도 상당히 거칠 뿐만 아니라, 내용도 뭔가 이야기하다 만 것 같은 느낌이어서 별로였다.
제목 그대로 '가지'를 소재로 하는 연작 단편이기는 한데, 인물과 배경과 사건에 약간의 연속성이 있기는 하지만, 유기적으로 잘 짜여진 구조라기보다는 뭔가 제멋대로 뻗어나가려는 기세를 가까스로 억누른 듯한 (쓰고 보니 수록 단편 가운데 엉뚱하게도 SF였던 작품의 내용과도 비슷하다) 느낌이랄까...
그래서 처음에는 읽고 나서도 살짝 애매하다 생각해서 버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나중에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싶어서 도로 꽂아놓았고, 한참 뒤에 다시 꺼내 읽어보고는 역시나 애매해서 그냥 버리려고 마루에 내놓았다가, 또다시 한참 뒤에 다시 읽어보고는 조금 마음에 들기에 그냥 계속 갖고 있기로 했다.
가장 마음에 드는 단편은 하권 표지에 나온 중년 남녀가 '자는' 이야기다. 도시에서 회사 다니는 여자가 시골에서 가지 농사짓는 남자를 간만에 찾아와서, 밥 먹으려 식탁 차리는 사이에 바닥에 눕더니 그대로 22시간 내리 쿨쿨 잠만 자다 간다. 평소에는 불면증이지만 이곳에만 오면 잘 잔다는 이유에서다.
아버지가 빚지고 잠적한 이후 동생들 데리고 시골 친척집에 와서 살게 된 여고생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시골 마을에 영화 촬영 팀이 나타나자 수십 명 분의 식사며 간식을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앞에서 언급했던 하권 표지의 가지 농사짓는 중년 남자와의 호흡이 척척 맞는 것이 재미있다.
만사에 해피엔딩을 열망하는 속물적인 나귀님으로서는 처음에 읽을 때에만 해도 중년 남성이건 여성이건, 여고생이건 사이클 선수이건 간에 뭔가 뚜렷한 결론을 손에 쥐지 못하고 이야기가 끝나 버린다는 것이 불만스러웠는데, 거듭해서 읽다 보니 이것도 결국 인생의 한 단면에 대한 충실한 묘사려니 싶다.
인생의 모호함, 또는 현실의 애매함이랄까 하는 것은 이 작가의 또 다른 작품 <섹시 보이스 앤드 로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목소리 연기에 재능이 뛰어나 전화방의 바람잡이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중생이 우연히 만난 암흑가의 거물의 의뢰를 받아 이런저런 사건을 해결하고 다닌다는 황당무계한 내용이다.
여기서도 사건은 인과관계나 기승전결로 깔끔하게 설명되지는 않고, 주인공의 전력질주로 사건이 해결되더라도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비쩍 마른 아가씨가 종종 빤쓰 바람으로, 가끔 그마저도 벗어던지고 사방으로 뛰어다니지만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하고 끝나는 츠루타 켄지의 작품과도 유사한 면모가 있다.
어쩌면 저자의 서술 방식이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더 이야기할 것이 있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된 이야기꾼의 재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최근 들어 많이 해 보게 된다. 최근 나온 소설 몇 편에서는 군더더기 같은 내용이 많아 실망한 경우가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하려는 내용을 다 말한다고 해서 항상 걸작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은 문학사의 숱한 걸작들을 통해 입증된 바 있다. 엘리엇의 <황무지>는 파운드의 무자비한 교정을 거쳐 분량이 확 줄어들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고, 레이먼드 카버의 인상적인 단편들도 초고보다는 고든 리시의 편집본이 걸작으로 꼽히니까.
어찌 보면 허술함이지만 어찌 보면 절묘함이라 할 수도 있는 이런 특징들이 유난히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까닭은 어쩌면 최근의 이런저런 신작 중에 기시감 드는 것이 많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음악이건 문학이건 영화이건 간에 새롭고 신선한 것보다는 뭔가 잘 팔리는 조리법을 버무린 듯한 것이 많으니까.
뭔가 기성품으로는 나쁘지 않은데 막상 뒤돌아서면 내용을 쉽게 까먹어버리는 범작들과 달리, <가지>나 <섹시 보이스 앤드 로보> 같은 애매하고 미진한 작품들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그건 뭐였지? 그게 뭐였을까? 하는 의문을 품으며 두 번 세 번 읽으면서는 점점 더 뉘앙스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거다.
그나저나 가지 좋아하느냐 물어보던 바깥양반은 그 이유에 대해 전혀 설명이 없었고, 가지를 사오지도 않았다. 현재로서는 마침 그날 저녁 연남동에서 친구들을 만날 약속이 있다고 했던 것으로 미루어, 아마 근처 중국집에 가서 먹을 저녁 메뉴를 고르다가 내 앞에서 불쑥 흘렸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고나...
[*] <섹시 보이스 앤드 로보>는 나귀님도 뒤늦게야 구하려 애썼지만 정말 한동안은 재고가 한 권도 없어서, 과연 이게 정말 출간되기는 했던 것인지 의심까지 들었는데, 최근에 알라딘에 누군가가 고맙게도 중고 물품을 올려주셨기에 감읍하며 구입했다. (흑흑. 감사합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인상적인 작품이지만 국내에서 저자의 인지도나 전작의 판매 현황을 고려해 보면 아마 다시 나오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나저나 저자인 "구로다 이오(우)"(Kuroda Iou)가 <섹시 보이스 앤드 로보>에서는 Kuroda Lou 라고 영어명으로 알라딘에 잘못 표기되어 있어서 검색해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십중팔구 대문자 아이(I)를 소문자 엘(l)로 착각한 까닭이 아닐까.(그나저나 "이오(우)/유황"은 저 유명한 "이오지마/유황도"와 같은 한자다!) 서명도 "섹시 보이스 앤 로보"와 "섹시 보이스 앤드 로보"로 다르게 표기되어 있어서 1권이 중복 등록되어 있는데, 모두 책의 표기대로 <섹시 보이스 앤드 로보>(저자: 구로다 이오우)로 통일되어야 하지 않을까. 일해라, 알라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