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중고매장에 나온 독일 타셴의 화집 시리즈 보급판 가운데 록 음악 앨범 표지를 모은 것이 있어서 구입해 보았다. 이전에도 음반 표지 1000종을 모아 소개한 비슷한 내용의 화집을 산 적이 있었는데, 저자명을 비교해 보니 아예 다르기에 안심하고 구입했다.



ROCK COVERS: 750 ALBUM COVERS THAT MADE HISTORY by Robbie Busch & Jonathan Kirby. Ed. by Julius Wiedemann (Koln: Taschen, 2014; 2022)


"록 음반 표지: 역사를 만든 음반 750종"이라는 제목처럼 다양한 음반 표지를 소개하는데, 레드 제플린이나 핑크 플로이드 같은 고전도 있고, 신선하다 못해 위악적인 펑크 음반은 물론이고, 조니 미첼이나 제임스 테일러 같은 의외의 가수들의 음반도 포함되었다.


특이한 점은 우리나라 음반도 하나 들어 있더라는 것인데, 바로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라는 가사로 유명한 노래 "또 만나요"를 부른 밴드 딕 훼밀리의 1집(작별 / 또 만나요)이다. 가수명은 DICK FAMILY, 발행년도는 1976년, 음반사는 JIGU로 나온다.


비스듬하게 뻗어 있는 건물 기둥 사이에 밴드 멤버 일곱 명이 나란히 선 모습이 절묘한 구도를 형성한 까닭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흥미로운 점은 이 음반의 제목이 DICK FAMILY / QUEST'S FAMILY 라고 적혀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밴드명인데 후자는 도대체 뭘까?


구글링해 보니 그 당시 정부의 외국어 금지 조치 때문에 "딕 훼밀리" 대신 "서생원 가족"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는데, 멤버 중 한 명인 "서성원"의 이름을 활용한 말장난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1집 표지에는 "서생원"이 아니라 "서생의" 가족이라고 나온다.


결국 QUEST'S FAMILY라는 영어명은 "서생의 가족"의 번역으로 추정되는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QUEST와 "서생" 사이의 연관성이 떠오르지 않는 거다. 혹시나 하고 "QUEST + 서생"으로 구글링해 보니 영화 <음란서생>의 영어명이 FORBIDDEN QUEST 라고 나온다.


이 영화가 2006년작이고 타셴 화집의 초판이 2014년에 간행되었으니, 어쩌면 "서생의 가족"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음란 서생 = FORBIDDEN QUEST"이므로 결국 "서생 = QUEST"라는 잘못된 추론이 이루어지는 바람에 "서생의 가족 = QUEST'S FAMILY"가 된 것이 아닐까?


물론 확증까지는 없지만 현재로서는 이 정도가 가장 그럴듯한 해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나저나 구글링해 보니 딕 훼밀리는 "나는 못난이"가 수록된 2집을 내놓은 이후 해체했고, 38년 만인 2014년에 컴백했지만 그룹 이름을 둘러싼 분쟁도 없지 않았던 모양이다.


즉 엣 멤버들이 재결합한 것이 아니라 저마다 활동을 전개하면서 "딕 훼밀리"라는 이름을 가져다 쓰는 바람에 서로 '내가 원조'라고 주장하는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급기야 "서생의 가족"인지 "서생원 가족"인지의 유래인 서성원이 나서 밴드 이름의 속뜻을 설명했다.



>>> "딕 훼밀리의 딕(Dig)은 '파다' '연구하다'는 뜻이죠. 즉 '음악을 공부하는 가족'이란 뜻으로 제가 지었어요. 근데 제가 활동을 안 할 적에 다른 '딕 훼밀리'들이 마구 만들어졌는데 딕(Dig)을 딕(Dick)으로 쓰고 있더군요. 낯 뜨거웠지요. 외국인이 보면 깜짝 놀랄 겁니다."(출처 : 천지일보, 2014. 08. 22) <<<



왜냐하면 DICK은 영어에서 음경을 가리키는 속어이기 때문이다. 직역하면 "자지 가족"이니 황당하고, 심지어 사진에 나왔듯 멤버 가운데 한 명은 여자이기 때문에 더욱 황당할 수밖에. 하지만 "딕 훼밀리"라는 이름을 듣고 DICK 대신 DIG을 떠올릴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무리 좋은 의도였더라도 DIG FAMILY라는 영어명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이니, 훗날 DICK FAMILY로 와전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또 어쩌면 바로 그렇게 와전되어 희한해진 이름 때문에 타셴 화집의 저자들도 이 음반에 주목했을지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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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서 정부가 식품 제조 기계의 안전 장치 설치 의무를 강화하는 조치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지난번 SPC 공장에서 연이어 일어난 근로자 사망 사고를 염두에 두었다고 하는데 너무 늦지 않았을까.


가장 어이없는 점은 자칫 사람 목숨도 앗아갈 수 있는 위험한 기계인데도 불구하고, 덮개가 열리면 기계가 자동 정지하거나, 신체가 감지되면 자동 정지하는 최소한의 장치도 이제껏 의무가 아니었다는 거다.


문득 작년 연말에 무슨 농산물 공장에서 작업용 로봇이 사람을 죽인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 기억난다. 포장된 농산물 박스를 들어서 옮기는 로봇인데, 수리 중 오작동이 일어나서 작업 기사가 사망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로봇인가 궁금해서 구글링해 보았더니만, 긴 팔 끝에 달린 집게로 박스를 집어 들고 옮기는 기계였다. 네모난 박스를 집어 들기에만 특화된 디자인이어서 딱히 위협적인 외양까지는 아니었다. 


사건 당시 피해자가 박스를 들고 있었는데, 재가동한 순간 로봇이 그 박스를 작업물이라고 인식해서 다짜고짜 팔을 뻗어 집어 들었고, 이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수리 기사의 신체가 끼어서 참변을 당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카프카의 "유형지에서"를 비롯한 갖가지 소설 속 살인 기계를 떠올렸었는데, 실상은 최근 수년 사이 벌어진 여러 공장의 사망 사례와 유사하게 안전 장치 미비로 일어난 사고라고 하니 더욱 안타깝다.


산업용 로봇이라면 이렇게 한 자리에 고정된 상태로 이리저리 팔을 움직여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운반이나 조립을 담당하는 모습이 맨 먼저 떠오르는데, 최근에는 자유롭게 오가는 산업용 로봇도 있는 모양이다.


예를 들어 지난번 뉴스에 나온 쿠팡의 물류 센터에서는 사람 대신 크고 작은 화물 운반용 로봇들이 사방으로 쉴새없이 오가며 갖가지 물건을 가져와 박스에 넣고 포장하는 모습이 상당히 신기하고도 재미있었다.


다만 이 과정에 투입되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며, 물품의 낱개 포장이 이미 이루어져야 하는 등의 자원 낭비며를 감안해 보면, 과연 사람 없이 로봇만 가동하는 공장이 더 저렴하고 유용한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기업 입장에선 임금 상승이며 노사 분규 같은 인력 운용의 단점이 없다는 점에서 전자동화 공장이 좋은 대안일 수 있지만, 최근 철도청 전산망 먹통 사건처럼 기계화나 자동화도 완전무결하지는 못할 테니까.


심지어 로봇조차도 아직 만능까지는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얼마 전 경북 구미에서 로봇 주무관을 채용해서 업무에 활용한 바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계단에서 굴러 파손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건 또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서 구글링해 보니, 식당이나 카페에서 음식을 운반할 때 사용하는 일반적인 주행 로봇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로 문서 배달이나 청사 안내 같은 단순 업무만을 담당했다고 전한다.


로봇 기술 특화 도시에서 나온 국내 최초 로봇 공무원이라는 점도 화제였지만, 파손 원인을 두고도 자살인지 타살인지, 업무 중 순직인지 과로사인지, 공무원 생활이 그렇게 힘든지 등 농반진반의 의견이 많았다.


나귀님 눈에야 챗GPT 열풍처럼 한때의 유행, 또는 흥밋거리에 불과해 보이지만, 일각에서 산업용 로봇이나 공무원 로봇의 보편화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지금 와서 다시 검토하고 실천해야 할 원칙이 하나 있다.


바로 공상과학소설의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가 1940년대에 내놓은 로봇 공학 3원칙이다. 그 내용은 "로봇은 인간은 해칠 수 없다", "로봇은 인간에 복종해야 한다", "로봇은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로 요약된다. 


물론 고성능 AI를 장착한 인간형 로봇 이야기이니 여전히 공상의 차원이라 일축할 수도 있지만, 이 3원칙에 함의된 안전 의식이야말로 산업용 로봇이나 공무원 로봇이나 식품 제조 기계 모두에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알고 보니 로봇 공학 3원칙은 2006년에 이미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의 서비스 로봇 분야 국가 표준(KS)으로 세계 최초 채택되었다고 나온다. 늘 그랬듯 원칙이 없는 게 아니라 지키지 않은 게 문제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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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양반이 외출 준비하다 말고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문득 "당신은 가지를 싫어하니까..." 하기에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었다. 딱히 좋아하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굳이 싫어한다 말하기도 애매하다. 마치 붓다의 걸식마냥 굳이 달라 하지는 않지만, 누가 주면 사양하지도 않는달까.


짭짤하거나 매콤하게 졸여 놓으면 괜찮은 반찬이며 술안주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번 마트에 갈 때마다 다른 야채보다 손이 먼저 가는 재료까지는 아니다. 튀김이나 구이가 최고라지만 결국 설거지를 도맡는 나귀님의 입장에서는 치우기 귀찮아서라도 기피하게 마련이니, 애매한 재료라 생각하는 거다.


<가지>라는 만화 역시 애매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예전에 신촌 북오프에서 산 책인 것 같은데,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리틀 포리스트>를 워낙 인상적으로 본 직후라서, 상권 표지를 보니 이것 역시 시골을 배경으로 혼자 살며 가지 농사를 짓는 웬 처녀의 풋풋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넘겨짚고 구입했던 것이었다.


물론 하권 표지를 보니 음침한 중년 남녀의 흑마술 소환 장면 같기도 해서 살짝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막상 구입해 읽어 보니 시골의 가지 농사까지는 맞았는데, 풋풋한 흑마술 따위는 없어서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도 상당히 거칠 뿐만 아니라, 내용도 뭔가 이야기하다 만 것 같은 느낌이어서 별로였다.


제목 그대로 '가지'를 소재로 하는 연작 단편이기는 한데, 인물과 배경과 사건에 약간의 연속성이 있기는 하지만, 유기적으로 잘 짜여진 구조라기보다는 뭔가 제멋대로 뻗어나가려는 기세를 가까스로 억누른 듯한 (쓰고 보니 수록 단편 가운데 엉뚱하게도 SF였던 작품의 내용과도 비슷하다) 느낌이랄까...


그래서 처음에는 읽고 나서도 살짝 애매하다 생각해서 버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나중에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싶어서 도로 꽂아놓았고, 한참 뒤에 다시 꺼내 읽어보고는 역시나 애매해서 그냥 버리려고 마루에 내놓았다가, 또다시 한참 뒤에 다시 읽어보고는 조금 마음에 들기에 그냥 계속 갖고 있기로 했다.


가장 마음에 드는 단편은 하권 표지에 나온 중년 남녀가 '자는' 이야기다. 도시에서 회사 다니는 여자가 시골에서 가지 농사짓는 남자를 간만에 찾아와서, 밥 먹으려 식탁 차리는 사이에 바닥에 눕더니 그대로 22시간 내리 쿨쿨 잠만 자다 간다. 평소에는 불면증이지만 이곳에만 오면 잘 잔다는 이유에서다.


아버지가 빚지고 잠적한 이후 동생들 데리고 시골 친척집에 와서 살게 된 여고생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시골 마을에 영화 촬영 팀이 나타나자 수십 명 분의 식사며 간식을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앞에서 언급했던 하권 표지의 가지 농사짓는 중년 남자와의 호흡이 척척 맞는 것이 재미있다.


만사에 해피엔딩을 열망하는 속물적인 나귀님으로서는 처음에 읽을 때에만 해도 중년 남성이건 여성이건, 여고생이건 사이클 선수이건 간에 뭔가 뚜렷한 결론을 손에 쥐지 못하고 이야기가 끝나 버린다는 것이 불만스러웠는데, 거듭해서 읽다 보니 이것도 결국 인생의 한 단면에 대한 충실한 묘사려니 싶다.


인생의 모호함, 또는 현실의 애매함이랄까 하는 것은 이 작가의 또 다른 작품 <섹시 보이스 앤드 로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목소리 연기에 재능이 뛰어나 전화방의 바람잡이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중생이 우연히 만난 암흑가의 거물의 의뢰를 받아 이런저런 사건을 해결하고 다닌다는 황당무계한 내용이다.


여기서도 사건은 인과관계나 기승전결로 깔끔하게 설명되지는 않고, 주인공의 전력질주로 사건이 해결되더라도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비쩍 마른 아가씨가 종종 빤쓰 바람으로, 가끔 그마저도 벗어던지고 사방으로 뛰어다니지만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하고 끝나는 츠루타 켄지의 작품과도 유사한 면모가 있다.


어쩌면 저자의 서술 방식이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더 이야기할 것이 있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된 이야기꾼의 재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최근 들어 많이 해 보게 된다. 최근 나온 소설 몇 편에서는 군더더기 같은 내용이 많아 실망한 경우가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하려는 내용을 다 말한다고 해서 항상 걸작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은 문학사의 숱한 걸작들을 통해 입증된 바 있다. 엘리엇의 <황무지>는 파운드의 무자비한 교정을 거쳐 분량이 확 줄어들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고, 레이먼드 카버의 인상적인 단편들도 초고보다는 고든 리시의 편집본이 걸작으로 꼽히니까.


어찌 보면 허술함이지만 어찌 보면 절묘함이라 할 수도 있는 이런 특징들이 유난히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까닭은 어쩌면 최근의 이런저런 신작 중에 기시감 드는 것이 많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음악이건 문학이건 영화이건 간에 새롭고 신선한 것보다는 뭔가 잘 팔리는 조리법을 버무린 듯한 것이 많으니까.


뭔가 기성품으로는 나쁘지 않은데 막상 뒤돌아서면 내용을 쉽게 까먹어버리는 범작들과 달리, <가지>나 <섹시 보이스 앤드 로보> 같은 애매하고 미진한 작품들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그건 뭐였지? 그게 뭐였을까? 하는 의문을 품으며 두 번 세 번 읽으면서는 점점 더 뉘앙스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거다. 


그나저나 가지 좋아하느냐 물어보던 바깥양반은 그 이유에 대해 전혀 설명이 없었고, 가지를 사오지도 않았다. 현재로서는 마침 그날 저녁 연남동에서 친구들을 만날 약속이 있다고 했던 것으로 미루어, 아마 근처 중국집에 가서 먹을 저녁 메뉴를 고르다가 내 앞에서 불쑥 흘렸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고나...



[*] <섹시 보이스 앤드 로보>는 나귀님도 뒤늦게야 구하려 애썼지만 정말 한동안은 재고가 한 권도 없어서, 과연 이게 정말 출간되기는 했던 것인지 의심까지 들었는데, 최근에 알라딘에 누군가가 고맙게도 중고 물품을 올려주셨기에 감읍하며 구입했다. (흑흑. 감사합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인상적인 작품이지만 국내에서 저자의 인지도나 전작의 판매 현황을 고려해 보면 아마 다시 나오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나저나 저자인 "구로다 이오(우)"(Kuroda Iou)가 <섹시 보이스 앤드 로보>에서는 Kuroda Lou 라고 영어명으로 알라딘에 잘못 표기되어 있어서 검색해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십중팔구 대문자 아이(I)를 소문자 엘(l)로 착각한 까닭이 아닐까.(그나저나 "이오(우)/유황"은 저 유명한 "이오지마/유황도"와 같은 한자다!) 서명도 "섹시 보이스 앤 로보"와 "섹시 보이스 앤드 로보"로 다르게 표기되어 있어서 1권이 중복 등록되어 있는데, 모두 책의 표기대로 <섹시 보이스 앤드 로보>(저자: 구로다 이오우)로 통일되어야 하지 않을까. 일해라,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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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미들코프의 <위대한 대의: 미국 혁명 1763-1789>는 2017년에 한 권으로 나왔다가 절판되었고, 2022년에 <미국인 이야기>로 제목을 바꿔 세 권으로 재간행되었다. 본래 '옥스퍼드 미국사' 가운데 하나로 예정되었지만, 나머지 책이 간행되지 못하면서 결국 이것 하나만 내고 시리즈가 좌초한 모양이다.


구글링해 보니 옥스퍼드 미국사는 무려 1950년대에 처음 구상된 시리즈로, 1961년에 가서야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공동 책임 편집자가 되어서 본격적으로 저자를 섭외하기 시작했고, 다시 20년이 지난 1982년에 제2권인 <위대한 대의>가 맨 먼저 간행됨으로써 비로소 궤도에 오르기 시작된 장기 계획 출판물이다.


그 간행은 현재까지도 진행형이어서 전12권 가운데 아홉 권만 간행되었고, 19세기 후반의 재건/도금 시대를 다룬 제7권이 2017년에 나온 이래로 아직까지 속간 소식이 없다니, 완간이 되려면 앞으로도 더 오랜 세월이 필요할 것 같다. 그 와중에 <위대한 대의>처럼 미리 나온 책들은 개정판이 나오고 있다.


<위대한 대의> 번역본에는 제4권 <자유의 제국>, 제5권 <신의 의지>, 제6권 <자유의 함성>이 근간 예고되었지만, 이미 7년이 지난 지금으로선 결국 출간이 좌절되었다고 봐야 맞을 것 같다. 특히 <자유의 함성>은 남북전쟁 분야에서 손꼽히는 명저라서 더 아쉬운데, 나귀님은 알라딘에서 중고 원서를 사 두었다.


<위대한 대의>는 부제에 나왔듯이 1763-1789년의 미국 독립 과정을 서술한 책인데, 이 시기에 활동한 '건국의 아버지' 가운데 나귀님이 각별히 흥미를 느끼는 인물은 최근 두툼한 전기에다 뮤지컬까지 나와서 재발굴되며 주목을 받은 알렉산더 해밀턴, 그리고 책 좋아했던 것으로 유명한 토머스 제퍼슨이다.


제퍼슨이라면 오늘날에는 민주공화당의 설립자로 간주되지만, 이 정당명은 후대의 편의상 구분일 뿐이며, 당대에는 공화당 내 제퍼슨계 정도로 일컬어진 모양이다. 하지만 훗날의 민주당과 유사한 성향을 보인 까닭에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제퍼슨을 사실상 자기네 정당의 원조로 공인한 것도 사실이라고 한다.


그나저나 이 '민주당의 아버지'에 관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다양한 논란이 제기된다. 대표적인 것이 민주주의를 독려하면서도 노예제를 부정하지 않은 이중적인 면모이고, 아내의 몸종인 흑인 노예와의 사이에서 사생아까지 낳았다는 사생활 논란인데, 따라서 생전에는 물론이고 사후까지도 평가가 엇갈린다.


그나마 이런 논란을 일축할 만큼 비범한 업적을 숱하게 내놓은 인물이니 역대 대통령 평가 순위에서 비교적 상위권에 위치하는 것이지, 그나마도 없었다면 더욱 박한 평가를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렇다 치더라도 순위 밑바닥에 있을 닉슨과 클린턴과 트럼프만큼 최악의 대통령까지는 아니라고 해야겠지만.


그나저나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민주당의 아버지'라는 표현이 등장했다기에 상당히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지역 기반이 어마무시했던 생전의 김대중조차도 그런 낯 뜨거운 아첨은 받지 않았던 것 같은데, 평민당부터의 계보만 따져도 그저 인성 썩은 '의붓아버지'에 불과해 보이는 사람을 왜 그렇게 떠받드는 걸까.


나귀님 입장에서는 김대중이나 노무현도 생전에 문제가 많았다고 생각해서 호의적으로 평가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런 두 사람과 비견해도 한참 부족한 사람을 우두머리로 추대하는 것도 모자라 우상화까지 서슴지 않고 있으니, 누군가의 말마따나 민주당에 민주주의가 없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된 것인가 싶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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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에서 불길한 악역 겸 장애물로만 등장했다가, 진 리스의 재해석과 페미니즘 비평가의 저서를 통해 유명해진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남성우월적 사회에서 여성이 당하는 유폐를 상징하는 한편, 지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자립이 가능했던 '신여성'과 상반되는 '구여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근대 사회에서 여성의 교육 기회가 늘어나면서 배출된 신여성은 전통적인 가치관에 순응하는 구여성과 갈등을 빚게 되었는데, 당시의 가부장적/남성우월적 사회 구조에서 양측의 갈등이 고조된 원인은 당연히 남성의 이기적이고 이중적인 태도이지만, 신여성 역시 일면 동조한 탓이 없지 않았다.


대표적인 문제점이 중혼이었는데, 이미 구여성과 결혼한 지식인 남성이 신여성과 재혼하는 경우가 그러했다. 중국의 경우에는 루쉰이 본처를 내버리고 제자인 쉬광핑과 중혼해서 아이까지 두는 바람에 두고두고 비난을 받았던 것이 그러했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이런 사례는 여럿 찾아볼 수 있었다.


구여성이 일방적으로 소박맞은 억울한 피해자였던 반면, 신여성은 제아무리 사회적 억압과 상황적 한계를 탓하더라도 사실상의 가해자, 또는 최소한 공범자가 된 셈이었다. 이혼을 꺼렸던 사회 통념상 신여성 애인의 권리는 부정되었던 반면, 구여성 본처의 권리는 보장되었던 셈이니 꽤나 역설적이다.


영문학자 나영균의 회고에는 그 시대 신여성과 구여성의 운명을 보여주는 "구석방 고모"와 "익선동 아주머니"의 사례가 등장한다. 전자는 당연히 그의 고모 나혜석인데, 생전에는 대표적인 신여성이었고 사후에는 페미니즘의 원조 격으로 추앙되지만, 말년에는 오빠네 집 구석방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이혼 후에 나이가 들며 생계가 막막해지자 정기적으로 오빠 집에 찾아왔는데, 나영균의 회고에 따르면 어느 날 하교 중에 웬 거지가 앞에 걸어가고 동네 아이들이 뒤에 따라가는 모습을 보고 희한하다 생각하던 차에, 그 거지가 자기네 집으로 들어가기에 질겁해서 뒤따라가 보니 자기 고모였다 한다.


그래서인지 조카는 구석방 고모 옆에 가까이 가지 않았고, 거지꼴을 하고 찾아온 시누이를 씻기고 먹이고 재우는 일은 물론이고 당장 나가라고 호통치는 남편/오빠까지 달래는 일도 그 어머니가 전담했다고 한다. 그랬던 구석방 고모가 지금은 위인 취급을 받으니 조카의 심정도 상당히 묘할 법하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말년이 신여성의 불운을 체화한 것처럼 보이는 나혜석도 젊은 시절에는 구여성을 울린 가해자였다는 점이다. 첫사랑 상대 역시 구여성과 결혼한 유부남이라서 여차 하면 중혼까지 갈 뻔한 상황에서, 그가 사망하며 나혜석이 다른 남자를 선택해 그 유명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구여성을 울린 전력은 나혜석의 올케, 즉 나영균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이쪽도 가정이 있는 남자와 중혼해서 자녀를 낳은 신여성이기 때문이다. 딸의 회고에 따르면, 학교에 다니게 되어 가족 증명서를 떼어야 하는 상황이 오자 부모가 뒤늦게야 그런 사실을 알려주어 충격을 받았다고 전한다.


알고 보니 나영균의 아버지는 본처와의 결혼을 원치 않아 첫날밤부터 동침을 거부한 끝에 별거하게 되었으며, 당황한 집안에서는 이혼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종의 대안으로 익선동의 집을 사줘서 새색시 혼자 살아가게 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돈이라도 있는 집안이었으니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결국 생모가 측실 취급을 받으면서 나영균도 호적상으로는 아버지의 본처인 "익선동 아주머니"의 딸로 되어 있었던 것인데, 이건 예전부터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역사학자 김기협의 생부 김성칠과 생모 이남덕 역시 중혼 상태에서 호적이 꼬이는 바람에 이후로도 가족 간에 갈등이 있었던 모양이다.


본처도 딱한 사람이니 가끔 찾아가서 안부라도 전하라는 아버지의 말에 몇 번인가 그렇게 했던 나영균은 "익선동 아주머니"의 초라한 행색이며 무지한 언행에 실망한다. 급기야 결혼을 원망하며 자살까지 입에 올렸던 아버지의 심정이 이해된다고 말하지만, 소박맞은 본처 역시 억울하기는 매한가지다.


이쯤 되면 아무리 '사빠죄아'라는 논리를 들이대더라도, 위와 같은 사례들에서 신여성이 구여성에게 피해를 입힌 것은 엄연한 사실로 보인다. 공동 피해자인 신여성과 구여성이 합심하여 문제의 원인인 남자를 붙잡아다 거세하는 사이다 듬뿍 자매애 뿜뿜 결말 대신 서로를 원망하기 바빴던 셈이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남자 쪽이다. 어떤 면에서는 축첩제가 잔존하는 상황에서 자유 연애를 편리한 핑계로서 악용했던 셈이니까. 자기도 친구들처럼 신여성을 만나고 싶었지만 구여성인 본처가 겪을 고생을 생각하니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는 국어학자 이희승의 회고만 봐도 그 비윤리성을 알 수 있다.


제인 에어가 로체스터의 중혼 공범이라면, 신여성도 사실상 마찬가지이다. 그나마 제인은 중혼 사실을 미처 몰랐다는 변명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신여성은 대부분 그런 사실을 아는 상태에서도 기꺼이 받아들인 경우이기 때문이다. 자기 표현이며 시대와의 불화도 좋지만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아닐까.


그나마 자기 표현인지 변명인지가 가능했던 신여성 "구석방 고모"는 훗날 재평가라도 받아내는 반면, 그마저도 불가능해 속을 끓였을 법한 구여성 "익선동 아주머니"에 대해서는 아무도 두둔하거나 기억하지 않으니, 이것도 아이러니한 일이다. 여자는 다 평등하지만, 어떤 여자는 더 평등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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