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문제
이마 이치코 지음 / 시공사(만화)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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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심각한 이야기인데, 이렇듯 자연스럽고 재미나게 그릴 수 있는 것은 뛰어난 작가의 능력 때문일까? 풀기 어려운 문제일수록 그것을 가볍게 다룰 수 있는 세련된 감각이 필요한 때문일까? 현대가 요구하는 가족의 다양성을 최전선에서 이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난 홍석천씨의 커밍아웃을 보고, 굳이 저렇게 밝혀야 했을까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심 타자의 색다름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일 수 없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보수적 성향에도 불만이 많았다.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을 비롯하여, 장애인, 한부모 가족 등에 대한 편견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보통 일반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성향에서 벗어났음을 스스로 알리는 일에 적극적인 그를 지지하는 입장이다.아마도 그는 패닉의 왼손잡이라는 노래의 주인공처럼 고정화된 사고의 틀을 깨는 데에 일조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난 만화를 즐겨 보지 않는 타입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 나의 아버지는 만화를 빌려온 오빠를 맨옷바람으로 쫒아 내신 후, 연탄 아궁이에다가 만화책들을 던져 넣어 태워버린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 기억은 내게 만화 = 나쁜 것이라는 공식을 심어 주었다.난 만화의 주인공으론 탁이와 까치 정도밖엔 알지 못한다.그런데 <어른의 문제>란 이 만화는 여느 사회과학 도서 못지 않게 사회적이며 시사적고 진보적이며 철학적이다. 좋은 만화는 좋은 책의 한 종류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혼한 어머니와 함께 사는 나오토는 한부모 자녀로서 잘 자라 주었다. 성적 취향이 다른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애인을 받아 들일 수 있게 되었고, 복잡하게 얽힌 가계 구도를 만들어 내는 어머니의 재혼을 인정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세상이 하는 사고들이 이처럼 많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다름의 차이가 차별이 아니라, 개성의 차이로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날을 기다리며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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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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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인간을 어떻게 지배하는가를 보아 버렸다고 할까?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부유층 삶의 행태를 보았다고 할까? 70 가까운 할머니이임에도 불구하고 30 -40대의 젊은 감각을 잃지 않는 작가의 글쓰기가 마음에 든다. 소설의 주인공들이 제법 빵빵하게 사는 이들이라 소설의 처음 부분에서는 다소 짜증도 나고, 왜 이런 가벼운 소설을 쓰게 되었을까 의구심을 갖기도 했는데, 다 읽고 난 지금은 재력과 권력의 비애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어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풍요는 인간의 삶을 안정되고 더욱더 아름답게 할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오히려 돈으로 인해 가족의 정체성조차 의심하게 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영빈은 초등학교 때 동창인 현금을 마음에 짐처럼 두고 살아 왔다. 40을 훌쩍 뛰어 넘은 어느날, 유망한 의사와 자유 분방한 이혼녀인 현금의 재회가 이루어지고 둘은 비정상적인 관계로 전락하지만, 현실의 갑갑함을 풀 수 있는 비상구적인 관계로 발전한다.

현금이라는 인물 유형은 그야말로 비현실적이다. 꽤 사는 집안에서 태어나 부유하게 자란 그녀는 집안이 망하는 바람에 자신의 외삼촌집에 얹혀 살게 된다. 다행히 살림은 다시 피어 피아노를 전공하고 유학을 하기도 하지만, 돈으로 맺어진 친족 구조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관계인지를 미리 알아 버렸고, 부유한 집안으로 시집을 가지만, 그야말로 방만한 살림끝에 자식없이 이혼한다. 그것도 순수히 자신의 결단으로. 40대 여성의 일반적인 유형은 전혀 아니다.

영묘는 불쌍한 여자다. 이 소설이 보여 주고자하는 주제는 이 여자를 통해 나타난다. 암으로 죽어가는 남편은 재벌시가의 재력 과시용으로 전락한다. 과학적 의술이 아니라 돈으로 매수한 미신의 힘으로 아들을 살리려는 송씨 집안은, 돈을 벌어 들인 노할머니의 권력으로 좌지우지되고, 가족으로서 인정을 받아 본 적이 있을까 싶게 금방 잊혀져 버리는 존재인 남편은 영묘에게만 아픔이고 영묘에게만 남겨진 쓸쓸한 존재다. 재벌 시가로부터 놓여날까 싶었지만, 다행히 돈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오빠의 힘으로 자유를 찾아 떠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자신이 주체가 되지 못한 영묘의 삶은 고달프기만 하다. 피붙이보다 가까운 아내된 자로서 재벌시가의 힘에 남편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대처하지도 못했고, 오히려 홀로 되었을 때는 그 슬픔을 고스란히 혼자서 감당해야만 했다. 재벌시가에서 철저히 고립된 자라고나 할까... 농담이라... 그녀는 남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조차 농담처럼 흘려 듣고 말아아 하는 운명을 지닌 여자였다.

마지막 치킨 박의 죽음은 의외의 충격이었다. 그는 꼭 그렇게 했어야 했을까?

대한민국의 소시민으로서 일상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번쯤 재벌로의 계급 상승을 꿈꾼다. 그것이 아니라면, 물질에 아쉬워하지 않고 살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와 존엄성을 바탕으로 하고서다.

요즘같이 경제가 흔들리 때에는 가족이 무엇보다 힘이 된다고 한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 있을 때면, 이를 악문단다. 가족을 위해서 .. 살아 남아야 해... 영빈이가 영묘를 늘 염려하는 것, 영진이가 영묘의 앞날을 계획하여 주는 것은 가족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가족의 정체성이 그 외적인 환경에 의해서 흔들리지는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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