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록 범우문고 109
이태준 지음 / 범우사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햇살이 찬란한 오늘.. 이태준의 수필집 <무서록>을 읽는다. 아파트 단지에는 목련이 하얗게 우아한 봉우리로 유혹하고, 개나리 노란색에 눈이 부신다. 바람은 햇살을 가르며 우리집 정원 풍로초를 흔드나 분홍빛 작은 꽃은 외려 바람을 즐기며 춤을 춘다. 풍로초 다섯 꽃잎처럼 섬세하고 다정한 성정을 지닌 이태준은 강원도 철원 사람이다.

 <무서록>은 그가 쓴 글들을 일정한 순서 없이 늘어 놓은 것이라 한다. 순서도 없고 분류도 없는 게 수필집답기도 하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늘어놓은 글들이 순정하게 기분좋게 읽힌다. "상허의 산문, 지용의 운문"이란 말처럼 짧지만 일상에서의 소박하면서도 선한 마음이 잘 드러나 1930년대라는 세월이 비켜가는 듯, 마치 옆집 사는 오라버니의 글을 접하듯 편안하다. 

 이태준은 당시 프로문학의 이데올로기 중심의 문학을 지양하고 문학적 언어의 질감을 살리고자 <구인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김기림, 이효석, 정지용 등과 함께 순수문학을 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그의 대표작 <문장강화> 역시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지 않을까. 하지만 1940년대로 가면 그의 행보가 달라지는데, 오히려 카프문학의 논객인 임화 등과 사상을 같이 하고 마침내 1946년에는 홍명희와 월북하게 된다. 폭풍같은 혼란과 선택의 시대였기에 그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 있었으리라.

 무서록>에서 나를 끄는 글은 '파초, 조숙, 고독, 나는 왜 어머니가 없나, 누구를 위해 쓸 것인가, 병후 ' 등이다. 애써 거름을 주며 정성으로 키운 파초가 꽃이 피자 내년에는 죽을 것이니 팔아 버리라는 이웃이 있다. 득실을 따지면   파초를 팔아 버리는 편이 낫지만 함께 보낸 세월과 추억을 멀리한 채 이웃의 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여린 마음에는 뜨거운 눈물이 고인다.  김동명의 <파초>를 감상하자.

 조국(祖國)을 언제 떠났노,  

 파초(芭蕉)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南國)을 향한 불타는 향수(鄕愁),
 너의 넋은 수녀(修女)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情熱)의 여인(女人),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네의 그 드리운 치마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 [조광](1936.1월호) -

'조숙'은 일찍 익거나 성숙해 버리는 의미인데, 김유정이나 이상처럼 일찍 죽어버린 천재들을 안타까워 하고 , 삶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는 글이다. 그냥 7,80이 되도록 견디는 삶이 아니라 인생의 깊이를 깨닫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고자 오래 살고 싶다고 토로한다. 일찍 익어 낙과하여 제맛을 내지 못하는 배가 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나도 그러하다.

'누구를 위해 쓸 것인가, 평론가, 소설의 맛' 등에는 1930년대 이태준의 문학관을 엿볼 수 있다. 독자나 비평가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작가의 기질에 맞는 형식으로 아름다운 것을 지어낼 수 있어야 한다. 문학은 사상이라기보다 차라리 감정이기를 주장해야 할 것이 철학이 아니라 예술인 이유다. 평론가는 개념보다는 감성에 천재이기를 바란다. 

이태준은 고독을 말한다. 아내와 아이가 옆에서 쌔쌕 잠들어 있지만 저마다의 꿈속에서 저마다의 길을 걷을 뿐, 옆에서 잠 못 이루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외로움을 느껴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면 정말 쓸쓸하고 적막한 것이 본래 자연의 모습일까? 우리가 들어가야만 하는 곳이 바로 여기 이곳일까? 그렇더라도 꿋꿋이 걸어갈 수밖에 없기에 인간은 위대하다. 하지만 이것뿐이 아니라 이태준이 병중에 화색을 돌게 했던 아내가 사온 카네이션 한 송이처럼 우리를 살게 하고 웃게 하는 이들이 있기에 삶은 또한 고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