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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의 몸값 ㅣ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홍지로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7월
평점 :
작가들에게는 문제가 있다. 작가는 자기 글이 출판되어 많이 팔리면 자기가 위대한 사람인 줄 안다. 자기가 쓴 글이 출판되어 중간 정도 팔려도
자기가 위대한 줄 안다. 자기가 쓴 글이 출판되어 아주 조금 팔려도 자기가 위대한 줄 안다. 자기가 쓴 글이 출판되지 않고 자가 출판할 돈도
없으면, 자기가 진정으로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위대함이라고는 거의 없다. 존재가 너무도 미미해서 보이지도 않을 정도다.
하지만 가장 최악의 작가는 자신감은 철철 넘치되 자기 의심은 전혀 없는 사람이다. 어쨌든 작가들은 피해야할 존재고 나는 그들을 피하려고
노력하지만 당최 가능하지가 않았다. 작가들은 일종의 형제애, 어떤 친교를 원했다. 그런 감정 중 어느 것도 글쓰기와 관련이 없고 타자 치는 데
도움이 안 됐다.
-찰스 부코스키, "여자들", 열린책들, 199쪽
거지의 밥값과 왕의 몸값
그것은 일종의 허세'였다. 도스토예프스키의 < 죄와 벌 > 을 넓은 의미에서 범죄소설'로 분류하는 것 자체를 불경스럽게 볼 사람도 있겠으나 내 눈에는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는 < 죄와 벌 > 만큼이나 흥미진진한 범죄소설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 분류 방식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쾌하다는 눈짓을 보내고는 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숭고한 것이었다. 나 또한, 같은 범죄 소설에 속하지만 에드 맥베인 소설을 좋아한다고 하면 왠지 부끄러워서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을 좋아한다고 해야 마음이 놓였다. 그들에게 도스토예프스키'라는 브랜드는 허파에 바람을 넣는 효과'가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루이비통 가방과 비슷했다.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겨드랑이에 루이비통 가방 대신 < 죄와 벌 > 이나 < 카라마조프家의 형제들 > 이라는 책을 끼고 다녔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 자리가 불편했다. 나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도 좋아했지만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도 좋아했다. 도스토예프스키나 카프카를 루이비통 가방처럼 들고 다니는 사람은 늘 루이비통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을 허세라고 조롱했지만 책을 항상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는 사람 또한 같은 허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책은 가방 속에 넣고 다녀라 !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구로자와 아키라보다는 오즈 야스지로'를 선택해야 보다 더 근사한 시네필'이 되고는 했다. 어떤 이는 오즈 야스지로를 강조하기 위해서 구로자와 아키라를 스펙타클 오락 영화'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오즈 야스지로 영화를 좋아하는 것만큼 구로자와 아키라 영화를 무척 좋아했다 . 오즈는 사람의 옆면을 가장 잘 찍는 감독이었고, 구로자와는 정면을 정확하게 찍는 감독이었다.
나는 옆도 좋았고 앞도 좋았다. 그래서 < 옆 > 이 좋다고 < 앞 > 이 싫다고 말할 수 없었으며, 같은 이유로 < 앞 > 이 좋다고 해서 < 옆 > 이 싫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물에 빠졌는데 어렵사리 오즈를 먼저 구하겠지만 단순히 엄마와 아빠 중 누가 더 좋냐는 식으로 묻는다면 대답하지는 않겠다. 둘 다 좋으니깐 말이다.
( 개인적 취향을 전제로 말한다면, 뒷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찍는 감독은 왕가위와 허우 샤오시엔'이다. 서양이 정면을 중시한다면 동양은 뒷면을 중시한다. 서구 영화계가 구로자와 아키라에 열광했던 이유는 바로 정면을 다루는 미학 때문이었다. 바로 이 시각의 차이가 오즈 야스지로를 위대한 감독으로 만들었다. 오즈의 카메라는 섣불리 배우와 사건에 쉽게 개입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개입하기보다는 겸손하게 곁에서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무례하게 정면을 또렷이 쳐다보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오즈가 가지고 있는 미덕이다. )
내가 보기에는 구로자와 아키라는 대중성과 작품성 모두를 만족시키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었다. 그런 그가 에드 맥베인의 < 킹의 몸값 (1959년) > 을 영화로 만들었다. 범죄 영화의 걸작, < 천국과 지옥(1963) > 이다. 그가 주로 대문호의 고전 작품을 영화로 만들었다는 사실 ( 셰익스피어의 작품인 맥베스를 각색한 '거미집의성', 리어왕을 각색한 '란'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를 각색한 ' 산다 ' ) 을 감안하면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현대 범죄 소설을 선택한 것은 꽤나 이례적이었다.
1. 영화, 천국과 지옥
http://blog.aladin.co.kr/749915104/6763957
< 천국과 지옥 > 은 영화 촬영장을 전쟁터처럼 만들었던, 혈기왕성했던 시절에 비추면 이 작품은 아기자기한 소품처럼 보이지만 그의 실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걸작'이다. 천국 편에 해당되는 곤도(소설에서는 더글라스 킹이다)의 거실은 마치 연극 무대처럼 단조롭다. 영화는 거실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1시간 남짓 머문다. 이 거실에 있는 소품이라고는 전화와 커튼이 전부'이다. 그런데 구로자와는 이 꾀죄죄한 소품 두 개로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카메라의 동선과 배우의 동선은 짝을 이루어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탱고를 추는 무희 같다. 카메라가 스텝에 맞춰 나아가면 배우는 물러나다가 어느 순간 엉키고 풀어진다. 이 조화가 매우 뛰어나다. ( 이 전반부 실내극에서 선보인 카메라와 배우의 환상적인 동선은 히치콕이 잘난 척하려고 만든 < 로프 > 를 떠올리게 만든다. )
그리고 < 커튼 > 은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장치인데 커튼은 마음의 문으로 표현된다. 윤리적 딜레마 앞에서 선택을 강요받을 때마다 곤도'는 커튼 앞에 서 있다. 커튼을 활짝 열 것인가 아니면 꽁꽁 닫을 것인가 ? 이 개폐(開閉)는 마음의 밝음과 어둠을 결정한다. 다음날 그는 자기 아들 대신 유괴된 집사의 아이를 돕기 위해 몸값을 지불하기로 한다. 그때 그는 그동안 닫혀 있던 거실 커튼을 연다. 빛이 쏟아지면 어두컴컴하던 거실은 밝아진다. 구로자와는 커튼을 통해서 주인공이 처한 심리를 적절하게 묘사한다. 소설에서는 " 창 너머로는 11월을 향해 가는 10월 (07쪽) " 이라고 계절을 똑부러지게 명시하지만 영화에서는 가을 대신 무더운 여름을 선택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커튼이 갖는 의미는더욱 분명해진다. 구로자와는 후반부인 < 지옥 편 > 에서 유독 " 땀 " 을 강조한다.
쉴 새 없이 선풍기는 돌아가지만 땀을 증발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지옥 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땀을 비오듯 쏟는다. 반면 < 천국 편 > 에 해당되는 곤도의 집은 창문과 커튼을 닫았음에도 불구하고 쾌적하다. 오히려 쾌적하다기보다는 서늘한 느낌을 준다. 이 말은 곧 곤도의 집이 냉방 시설이 잘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드 맥베인이 더글라스 킹을 끌어들여서 윤리적 문제를 이야기한다면 구로자와 아키라는 빈부 격차를 끌어들여서 계급의 문제를 제기한다.
- 집사의 아들이 납치되었다는 측면에서 보며 이 사건에서의 최대 피해자는 집사이지만 그는 늘 화면 중심으로 나서질 못한다.
- 그는 모든 결정에서 항상 배제되어 있다. 그는 항상 프레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감독은 계급에 따른 배치를 통해 신분과 서열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 후경(後景)에 배치된 두 남자는 집사(운전기사)와 곤도(더글라스 킹)이다. 집사는 울면서 자신의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이때 곤도는 커튼 앞에서 갈등을 한다. 전경에 배치된 인물들은 이 애절한 갈등을 지켜볼 뿐이다.
- 이번에는 아내가 집사를 대신해서 도움을 간청한다. 이때에도 곤도는 커튼 앞에 있다. 살짝 열린 커튼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이미 곤도는 아이를 돕기로 마음이 기울어진 상태이다.
- 곤도는 아이를 돕기 위해 몸값을 지불하기로 한다. 집사가 엎드려 운다. 이때 커튼을 활짝 열려 있다.
2. 소설, 킹의 몸값
소설 속에서 아이를 유괴한 범인들이 요구하는 몸값(ransom)은 50만 달러'이다. 50만 달러가 구두 회사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금액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소설이 쓰여진 때(1959년)를 짐작할 수 있다. 유괴범은 어마어마한 금액을 몸값으로 지불하라고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눈썰미가 있는 독자라면 소설 제목이 모순적이란 사실을 금세 깨달았을 것이다. 유괴범이 제시한 몸값은 운전기사인 찰스 레이놀즈의 아들에 대한 몸값이지 더글라스 킹, 본인의 몸값은 아니기 때문이다. 에드 맥베인은 제목인 " King's ransom " 을 중의적으로 사용했는데 관용적 표현으로 " 막대한 금액 " 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쉽게 저잣거리 입말로 말하자면 떼돈'이라는 뜻이다. 이 제목만을 놓고 보아도 에드 맥베인이 글재주가 뛰어난 양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이 소설은 당신이 평소 생각하는 대중 소설에 대한 선입견을 가볍게 날려버릴 정도로 뛰어나다.
촘촘히 박힌 장치들은 에드 맥베인이 꼼꼼한 작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킹이 사는 성곽과 그 근처 사유지인 " 스모크 라이즈 " 라는 이름은 하나의 헛점과 몇몇장점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이 이름은(사람들은 이곳을 스모크 라이즈라고 불렀다 ,23쪽) 희뿌연 안개에 휩싸인 이미지를 제공하는데, 이 불투명성'은 유괴범들이 운전기사의 아이를 킹의 아이'로 오해하도록 만드는 구실을 제공한다. " 스모크 라이즈 " 는 마치 스티븐 킹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가상의 도시 " 캐슬록 " 을 닮았다. 에드 맥베인은 " 스모크 라이즈 " 라는 이름으로 여러 상황을 동시에 해결하는 솜씨를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독자가 지루해질 때는 무조건 총을 등장시켜야 한다는 하드보일드 소설이 가지고 있는 미덕을 제대로 보여준다. 사실 이 소설은 지루할 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5분마다 총이 등장해서 총을 쏘고는 달아난다.
그래서 독자는 총소리에 놀라서 토끼 눈이 되기 일쑤'다. 여기서 말하는 < 총 > 이란 독자가 상상하는 패턴을 뒤집는 반전을 의미한다. 유괴범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는 흥미를 유발시킨다. 아버지는 어떻게 아들을 무사히 데려올 수 있을까 ? 독자가 나름대로 이런저런 방법을 모색하며 고민에 빠질 때 느닷없이 유괴되었다던 아들이 천연덕스럽게 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온다. 유괴 사건을 다룬 소설에 있어서 " 아들의 무사 귀환 " 은 극적 효과를 위해서 늘 소설 마지막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 법칙인데 유괴를 당했다던 아이는 소설 말미는커녕 71페이지에 등장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 나 불렀어요, 엄마 ?(71쪽) "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개 풀 뜯어먹는,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 주말에 출장을 갔던 남편을 도봉산 등산로에서 마주치는 것만큼이나 뜬금없다. 1108호 이웃집 여자와 함께 있는 남편을 말이다.
이 지점에서 한글 모음 < ㅡ > 자세로 침대 깊숙히 박혀서 설렁설렁 페이지를 넘기다가 " 나 불렀어요, 엄마 ? " 라는 얄미운 대사에 당신은 날새게 자음 < ㄴ > 자세로 앉아서 이 사태에 대해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이 장면은 하드보일드 소설에서 느닷없이 총잡이가 등장해서 총을 쏘고 달아나는 꼴이다. 맙소사, 멍청한 유괴범은 엉뚱한 아이를 유괴한 것이다. 그런데 총소리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유괴범이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실수는 오히려 서스펜스를 강조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유괴범은 뻔뻔하게도 자신이 유괴한 아이가 킹의 아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몸값을 요구한다. " 좋아, 킹, 잘 들어. 이 애가 누구 애인지는 상관없다. 알았나 ? 라디오는 들었지만 상관없다고. 아이는 아직 무사히 살아 있고 우리도 아직 돈을 원한다. 내일 아침까지 준비하지 않으면 아이는 해가 지는 모스블 보지 못할 거다. ( 134쪽 ) "
두 번째 총소리'다 ! 더글라스 킹은 떼돈( a king's ransom ) 을 지키기 위해서 여덟 살 소년의 죽음을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소년을 지키기 위해서 떼돈을 줄 것인가 라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러니깐 첫 번째 총소리보다 두 번째 총소리가 더 크다는 소리이다. 유괴범이 저지른 오류는 부성애라는 한정된 범위를 뛰어넘어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인가 아니면 이타적 존재인가에 대한 문제로 확장한다. 막말로 말해서 판이 커진 것이다. 이 설정은 자식을 위한 단순한 몸값 흥정보다 더 강렬하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 이 제안을 거절했다고 치자. 다음날 뉴스 속보에 12토막 난 어린 아이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보게 된다면 ?! 에드 맥베인은 이처럼 독자가 지루하다 싶으면 총잡이를 등장시키는 타이밍'이 탁월하다. 사실 총잡이가 자주 등장하면 싫증이 나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총잡이의 등장 횟수와 소리의 강도가 기가 막히게 잘 어울어져 있다.
기본적인 서스펜스가 잘 짜여져 있다 보니 틈틈이 삽입된 87분서 형사들의 애환도 넉넉하게 읽힌다. 또 한 가지, 이 소설은 영화가 보여주지 못했던 유괴범들 간의 갈등을 자세히 엿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도 이 책은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미덕은 자음 니은( ㄴ ) 으로 시작된 자세가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는 점이다. 찰스 부코스키가 지적했듯이 문학을 지나치게 전지전능한 아우라'로 숭배하는 것은 꼴사나운 짓이다. 작가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밥벌이를 위해 글을 쓸 뿐이다. 설령, 밥값 수준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몸값( a king's ransom )을 버는 대중 작가'라고 해서, 그 작품에 대해 미리 색안경을 끼고 가자미 눈으로 째려볼 필요도 없다. 그리고 생전에 겨우 밥값이나 벌면서 글을 썼다고 해서 그 작가가 매우 훌륭한 작가라고 말하는 것도 색안경'이다. 그것은 모두 선입견에서 비롯된 자세가 아닐까 싶다. 대중문학, 특히 장르소설을 순문학의 아류'라고 폄하하는 자세는 옳지 않다.
오즈 야스지로를 강조하기 위해서 굳이 구로자와 아키라를 폄하할 필요가 있을까 ? 같은 말을 반복하자면 도스토예프스키를 강조하기 위해서 굳이 에드 맥베인을 폄하할 필요가 있을까 ? 또다시 같은 말을 반복하자면 엄마가 좋아 아니면 아빠가 좋아 라는 말은 얼마나 멍청한 질문인가 ? 부모가 자꾸 여덟 살인 당신에게 그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진지하게 이렇게 말하자. " 아빠의 정자가 엄마의 나팔관 안으로 무사히 안착해서 수정을 했으니, 제가 태어났지요. 두 분 모두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도 알건 다 아는 나이입니다. 살 만큼 살았어요. 호호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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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미지 출처, 네이버 블로그 " 조르바의 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