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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기술 밀란 쿤데라 전집 11
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 / 민음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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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에세이, 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막연했던 뜻이 명확해지고 이 책이 왜 에세이 분야에 속해 있을까를 다시 생각해야 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문학이론 분야로 분류되어야 할 것 같았던 책. 『소설의 기술

밀란 쿤데라 책을 소설이 아닌 이론집으로 처음 만나게 되었다. 어쩜 그의 소설을 한 편도 읽지 않았는지. 나의 게으른 독서 이력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이야기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예상대로 낯선 내용들에 시선은 활자 위를 겉돌았고 좀처럼 깊게 집중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어설프게나마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겨갈 때 순간순간 가슴을 환하게 하는 문장들이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내 안에 점점 또렷해지는 단어 하나. 소설. 사건과 줄거리를 담고 있는 이야기로써가 아닌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있는, (내가 읽고 덮고 잊어버리는, 우리 곁에서 무수히 태어나고 죽는) '소설이란 무엇인가' 에 관한 생각.

 

 

1부, 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 에는 에드문트 후설이 남긴 유럽의 위기와 유럽 인문정신의 소멸 가능성에 대한 유명한 강연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후설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철학은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를 풀어야 할 의문의 대상으로 파악했으며, 그것은 이러저러한 실제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앎에의 열정이 사람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근대 초기, 갈릴레오와 데카르트가 세계를 단순히 기술적이고 수학적인 개발의 대상으로 축소하고 인간의 삶이 아닌 기술과 과학의 전문화된 분야에 사람들을 몰아넣으며 사람들을 '존재의 망각' 속으로 몰아넣었다는 위태로움이었다. 밀란쿤데라는 이 의견에 대해 '철학과 과학이 인간의 존재를 망각한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바로 이 망각된 존재를 찾아내려는 유럽의 위대한 예술이 세르반테스와 더불어 형성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바로, 소설이 인간을 따라다니며 인간의 구체적인 삶을 살피게 하고 '존재의 망각'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주었다는 것이다.

 

 

해를 거듭하면서 소설은 나름의 방식과 고유한 논리에 따라 존재의 상이한 면모들을 찾아냈다. 세르반테스의 동시대인들과 더불어 소설은, '내면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와 감정의 은밀한 삶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발자크와 더불어서는 역사에 뿌리내리는 인간을 발견한다. 플로베르와 함께 소설은 그때까지 미지의 세계였던 일상의 지평을 탐사한다. 톨스토이와는 사람들의 결정과 행위에 개입하는 비합리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고 시간을 탐색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와 더불어 붙잡을 수 없는 과거의 순간을, 제임스 조이스와는 붙잡을 수 없는 현재의 시간을 탐색하는 것이다. 토마스 만과 더불어서는 시간의 밑바닥세서 유래하여 우리 발걸음을 원격 조정하는 신화의 역활을 묻는다. -p.14

 

 

소설은 작가의 탄생과 그들의 고군분투로 태어난 글에 따라 행로를 만들어왔으며, 그것은 근대의 역사와 더불어 이어져 왔다. 소설가들은 '소설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었고 그것을 소설 속 인물에 투영해 이야기를 꾸려왔다. 그러한 행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소설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냈는데, 그것은 근대의 종말이면서, 새로운 미래와 새로운 예술을 위해 사라지게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매스미디어의 장학. 그것은 세계를 축소했다. ' 인류 전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단순하고 상투적인 똑같은 내용을 전 세계에 퍼뜨린다. 그것들이 가진 서로 다른 기관지들이 상이한 정치적 이해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표면적 상이함의 이면에는 동일한 정신이 군림한다. (p.33)' 그러나 이에 대해 밀란쿤데라는 말한다.- 소설의 존재 이유란 무엇일까. 그것이 우리를 '존재의 망각'으로부터 지키는 것이라면 오늘 날, 매스미디어가 장학하여 개개인의 모습을 똑같이 만들어버리는 이때에 소설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닐까. -라고. 밀란쿤데라는 소설의 죽음, 활자의 죽음을 당연시하는 이들에게 소설이 가진 시간의 연속성과 매개성을 이야기한다. 이제 '앎의 어려움과 잡을 수 없는 진실의 어려움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하는 세르반테스의 원숙한 지혜는 거추장스럽거나 쓸데없는 것으로 보일 뿐' 이다. 현재에 고정된 시대의 정신을 버리지 못하면 시간은 현재의 순간으로만 축소되고 이 같은 체계에 휩쓸린 소설은 더이상 작품이 아닌, 시사적 사건과 내일 없는 몸짓이 될 수 밖에 없다. 소설이 소설로써 '진보'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세계의 진보에 역행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p.35)는 것.

밀란쿤데라의 소설에 대한 애착과 그 위기에 대한 호소가 느껴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소설이란 유희와 도피를 위한 것이 아닌 인간의 생각을 촉발하며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다리 역활을 한다는 것을 느꼈다. 글의 힘이 절실해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소설은 세르반테스의 원숙한 지혜를 과연 버릴 수 있을까, 밀란 쿤데라 제목엔 절하된 유산이라 표현했지만 글의 마지막엔 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 말고는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고 쓰고 있다.

 

 

2부 소설의 기술에 관한 대담 에는 살몽과 쿤데라의 대화의 기술로, 쿤데라의 작품에 대한 작가 본인의 이야기와 의견을 들을 수 있다.

 

 

모든 시대의 소설은 자아의 수수께끼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당신이 어떤 상상의 존재, 인물을 창조해 내는 순간부터 당신은 저절로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에 의해 포착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직면하게 되죠. 소설 자체가 지닌 근본적인 물음 가운데 하나입니다. -p.40

 

 

밀란 쿤데라 유럽 최초의 소설들은 심리적 접근법이 아닌 행동과 모험을 기술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꾸려냈지만 그 이면엔 사람은 '행동에 의해 모두가 서로 그렇고 그런 다람쥐 쳇바퀴 같은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 행동에 의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어 한 개인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담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쿤데라의 소설이 가시적 세계보단 내면의 삶으로 시선을 기울이는 것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쿤데라는 심리 중심의 소설이 인간의 내면적 삶에 대한 탐구의 길로 들어서게 한 리처드슨을 시작으로 괴테, 콩스탕, 스탕달, 그 뒤를 이어 프루스트와 조이스에서 극점을 이루며 그 뒤로 새로운 지향을 가진 카프카 이어진다, 고 설명한다. 그들의 작품이 그에게 준 인상과 영향력은 그가 그들의 작품을 애정어리게 설명하는 것으로 느낄 수 있다. 그의 작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우스운 사랑들』, 『삶은 다른 곳에』 와 단편 속 인물들의 대화와 행동을 짚으며 그들의 자아를 포착하는 방법으로 '실존적 약호'를 포착한다는 것에 대해 설명한다. 그것은 인물의 열쇠어와 같은 것으로 개개인에게 전혀 다른 이름을 갖으며, 행동과 상황을 통해 점차 나타난다. 그는 소설 속 인물을 작가라는 이름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지켜보며 그들이 움직이길 기다렸다. '보시다시피 저는 야로밀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제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여 주는 겁니다. 제가 만든 인물인 야로밀을 오랫동안 관찰한 후 저는 한 걸음씩 그의 태도의 심장부로 접근해 그 태도를 이해하고 그것에 이름을 붙여 주고 그것을 포착하는 것이죠.(p.49)'

 

그에겐 자신의 소설 속에서 역사를 최대한 경제적으로 취급하며 그 가운데서도 인물들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 사회적 역사를 기록한 역사적 연대기를 배제하고 인간의 연대기를 이용해 역사적 분위기를 암시한다. 역사가 인물의 행동과 연결되지 않는 한, 소설에 특별한 영향력을 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p.58~57)

 

 

3부 『몽유병자들』에 관한 단상들 에서는 브로흐의 『몽유병자들』을 분석했다. 삼십 년 동안의 유럽 역사를 포괄한 3부작으로 각각의 시간에 갇힌 인물들의 생각과 행위를 통해 '실존의 가능성'을 포착하고자 한다. 브로흐는 외부의 비합리적인 체계가 이성적인 생각보다 얼마나 더 우리의 태도를 좌우하는지, 그로 인해 우리의 삶은 혼란스러움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브로흐는 그것을 '다주제적'인, 다양한 분야의 '오직 소설만이 찾아낼 수 있는 것'을 추적해 소설을 쓰는 것으로 집중해 표현했다. 이것은 인간의 존재를 비추기 위해 모든 지적 방법과 시적 형식 들을 동원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쿤데라는 그의 위대함을 이 부분에서 꼬집고 있다. '시나 철학은 소설을 포용할 수 없지만 소설은 시나 철학을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더라도 소설의 정체성을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p.98)

 

4부 예술의 구성에 관한 대담 에는 2부에서 이어지는 그의 창작론을 읽을 수 있다. '소설의 건축술과 음악술'에 대한 것으로 그의 소설이 7부나 6부으로 나눠 써지는 것과 각 부나 장마다 음악의 템포 변화와 같은 분위기의 변화를 두어 정서적 분위기의 변화까지를 이끌어 내는 기술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그러나 그것이 미리 짜두고 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라 하니, 소설가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6부 소설에 관한 내 미학의 열쇠어들 에서는 쿤데라 작품의 '실존적 약호'라 할 수 있는, 작품에 쓰인 언어들에 대한 그의 의견과 설명을 만날 수 있었다.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는 장이었다. 그가 이렇게 단어들을 정리하게 된 것이 수많은 나라로 자신의 소설이 번역되어 나가면서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윤색하고 변질하여 소설이 새로 써지는 불상사를 보지 않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단어 하나 하나가 특별하지 않은 친숙한 것들이었지만 그의 설명과 함께 단어를 만나자 내가 알고 있는 세계는 너무나 비좁았다는 사실, 보다 더 넓은 표현의 세계가 있음을 각성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단어의 뜻이 아니라 쿤데라 소설 속에서 의미하는 바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으니 그의 단어장이라 해도 무관할 것이다.

 

 

소설가란 역사가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닙니다. 실존의 탐구자일 뿐이지요. (p.67)

 

 

총 7부로 나뉘어진 이 책을 들추고 덮고 접힌 페이지를 다시 쫓아가 읽으면서 글을 썼다. 복잡하던 마음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어느 만큼은 그의 글을 이해했고 애정했다는 느낌이 남았다. 밀란쿤데라의 소설을 읽으면 무언가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벌써 2년 전 일인가. 은희경 작가님의 낭독회에 갔을 때, 그 분이 밀란쿤데라의 『생은 다른 곳에 』를 곁에 두고 보신다고 했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리뷰 마감일을 맞추기 위해 마음이 급했고, 또 이해하지 못할까봐 미리 겁도 먹었지만 그 마음이 무색하도록 이 책은 내게 소설에 대한 많은 생각들을 가져다 주었다. 10년 전, 글을 쓰고 싶었던 내가 젊은 작가들의 소설만 읽자 교수님은 내게 고전을 먼저 읽을 것을 권했었다. 젊은 작가들의 문장이 샘이 났고 그들처럼 쓰고 싶었던 나는 그분의 충고를 실천하지 못했다. 내 문장은 젊은 작가들을 따라하기에 불과했고, 오롯이 내 문장이 되지 못했다. 그 시절, 내가 좀더 겸손하게 그분의 말을 따르고 좀더 부지런하게 고전을 읽었더라면 무언가 다른 것을 얻을 수 있진 않았을까.

소설 창작을 꿈꾸는 이들에겐 꼭 읽어야 할 책이 아닌가 싶다. 아주 천천히,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야기를 토해내는 재미에 취한 손끝을 보다 묵직하고 힘있게 할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드는 하나의 생각, 이것은 에세이가 아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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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31 15: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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